#059
루카스의 시선이 아델에게 닿아 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키슈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아델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살며시 그녀의 등을 밀었다.
뒤를 돌아보니 몽펠 백작 부인이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을 재차 밀었다.
“이럴 땐 맞이하러 가 줘야죠.”
그런 건가? 아델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걸어갈수록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그리고 마침내 루카스의 앞에 다다랐을 때,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레이디, 손을.”
레이디란 말은 익숙지 않았지만, 제법 듣기 좋았다. 아델이 손을 앞으로 내밀자 그 손을 잡은 루카스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장갑으로 손이 가려진 상태인데도 입술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레이디에게 승리를 바칩니다. 레이디가 가진 물건 중 하나를 받을 수 있을까요?”
루카스는 친절하게 아델이 해야 할 행동을 알려 주었다.
‘물건, 물건?’
대체 뭘 줘야 하나. 아델은 허둥거리다가 한쪽 귀걸이를 빼냈다. 그리고 그걸 루카스의 손에 올려 주었다.
루카스는 받아 든 귀걸이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리자는 루카스 경입니다!”
레이긴의 뒤늦은 통보를 끝으로 결투는 끝났다. 데페르는 곧바로 치료를 위해 자리를 이동했고, 남은 이들은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루카스의 모습에 일부 영애는 질투를, 일부 영애는 부러움을 눈에 담았다.
여성들 못지않게 남성들도 들떴다. 지난 결투를 상기하며 당장이라도 토론을 펼칠 기세였으나, 그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폐하.”
결투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헤이른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아아, 헤이른 경.”
“저 또한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결투를 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셀렉시온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깊게 웃었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누구와?”
헤이른의 시선이 루카스에게 닿았다.
“오늘따라 루카스 경이 인기가 많군. 그래, 결투 이유를 알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저는 제 사람을 되찾아 오고 싶습니다.”
누가 제 사람이야?
아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공개된 자리에서 그런 일을 떠들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아까부터 하는 걸 보아하니 부끄러움이 없는 모양이었다.
“헤이른 경의 사람? 그게 누군가?”
셀렉시온도 전부 알면서 장단을 맞춰 주는 것 같았다.
헤이른의 시선이 이번에는 아델에게로 향했다. 불쾌함에 부채를 들어 올려 보았지만, 보이는 걸 전부 가릴 수는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루카스를 찬양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다.
“루카스 경의 약혼자입니다. 제 아이의 엄마가 되기도 하죠.”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 말을 거의 모든 사람이 들었다. 작게 시작된 수군거림이 점차 커지고, 아델의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호오,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되는 거지?”
셀렉시온의 말에 헤이른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루카스가 끼어들었다.
“그에 대해선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란 거지?”
헤이른의 말에 루카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장갑 한쪽을 그에게 던졌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장갑은 허공에서 불타올랐으나,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결투를 신청하지.”
일이 엉망으로 돌아간다. 원래 소설에서도 둘이 싸우는 장면이 있었던가? 아델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좋아, 그리 원한다면 둘의 결투를 허가하지. 대신 지금 이 자리에서 더 하는 건 그러니 다른 날짜를 잡는 건 어떻겠나? 그래도 아만다의 축하 파티인데 결투만 할 수도 없으니. 어디 보자.”
셀렉시온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달 뒤에 사냥 대회가 있으니, 대회 시작 전, 여흥으로 결투를 하는 건 어떻겠나?”
여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신분 차만 없었으면 셀렉시온부터 한 대 때렸을 것 같았다.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둘의 동의를 받아 결투일이 결정되었다. 이후엔 다시 흩어져서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으나, 곳곳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아만다의 축하 파티만 엉망이 된 셈이었다.
“괜찮은가?”
레이긴이 아델에게 물어 왔다.
“괜찮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약하게 보일 수는 없었다. 아델은 고개를 꿋꿋이 들고 루카스에게 다가갔다.
사실은 헤이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더는 말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미친 인간 같으니.’
더불어 루카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는 손꼽히는 강자라고 나오지만, 그런 강자도 결국 론슈카의 손에 죽었다. 어쩌면 정령이 약점일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괜찮겠어요?”
루카스는 단단히 굳은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이군.”
“저는 괜찮아요.”
헤이른 같은 작자 때문에 동요하기는 싫었다. 그렇기에 아델, 자신은 괜찮아야만 했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얼굴에 철판을 깔자. 당장 아델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이후 루카스는 아델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그러고 있으니, 다른 귀족들도 쉽사리 접근하려 들지 않아 편하긴 했다.
그렇게 첫 황궁 파티가 끝났다.
아델과 루카스는 조금 이르게 나와 마차에 올랐다. 돌아가는 마차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어색할 정도인지라 아델이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레이긴 경과는 친분이 있으세요?”
오늘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니, 그저 지나치며 인사를 하는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도와준다고? 그는 시종일관 아델에게 친절했으며, 도와주려 애썼다.
“이번에 이렇게까지 나서는 건 나도 처음 보는 일이군. 원래는 어느 일에도 나서려 하지 않는 분이시니.”
“그런데 왜 그러셨을까요?”
“글쎄… 굳이 추측해 보자면, 잃어버린 딸과 나이가 비슷해서 그럴 수도 있겠군.”
딸을 잃어버렸다니. 이것 또한 로맨스 판타지의 소재가 아니던가. 그에 관해 생각나는 건 없었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분의 따님 덕분에 도움을 받은 거로군요.”
“그런 셈이지.”
“빨리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아델은 친절을 베푼 레이긴에게 좋은 일이 생기길 빌었다.
* * *
파티가 온전히 끝난 후,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비가 오는군.”
레이긴은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딸과 아내를 잃어버린 날도 이런 날이었다. 가느다란 비가 부슬부슬 떨어지던 날, 레이긴은 아내와 딸의 곁을 떠나 가문으로 돌아갔다.
자의는 아니었다. 원래 후계자인 형이 죽자, 아버지에게는 차기 후계자가 필요해졌다. 방계도 있었지만, 그는 원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레이긴은 사랑 하나만을 바라보며 모든 걸 던져 버렸다. 귀족으로서 살아왔기에 일해서 돈을 버는 건 쉽지 않았지만, 노력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아버지는 기어코 레이긴을 찾아냈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네 부인과 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그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레이긴은 갓 태어난 딸과 부인을 두고 본가로 돌아가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되었다.
중간중간 어떻게든 그들의 소식을 알아보려 했지만, 방해가 만만치 않았다. 나중에는 그저 소식을 접하려 드는 것만으로도 둘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약했다.’
세월은 흐르고 절대 넘어서지 못할 것 같던 벽인 아버지는 죽었다. 배우자로 맞이했던 다른 여인조차 아이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제야 레이긴은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늦었지.’
원래 살던 마을에 찾아가 보았지만, 아내도 딸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 말로는 빚을 지고 밤중에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다 하였다.
이후엔 사람을 풀어 이곳저곳을 뒤졌다. 하지만 갈 수 있을 만한 곳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일반적인 도시나 마을이라면 괜찮았지만, 화전민 마을로 들어가면 답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레이긴은 끈질기게 사람을 풀어 둘의 행방을 찾았다. 찾고, 또 찾고. 그렇게 흐른 세월만큼 늙어 갔다.
“그래도 아직 포기할 수 없어.”
레이긴은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스승님.”
그때, 해맑은 인상의 청년이 그에게 다가와 우산을 드리웠다.
“카이.”
아버지가 돌아가고 나서 데려와 제자로 삼은 아이도 훌쩍 자라 훌륭한 청년이 되었다.
“날이 서늘합니다. 이제 건강을 관리하셔야 할 나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건강을 관리해서 오래 살아야지.”
레이긴은 허허 웃으며 카이와 함께 마차로 향했다.
“그나저나 오늘 결투는 굉장하지 않았습니까? 일방적이더군요.”
“그래, 제대로 봤으면 많은 공부가 됐을 거다.”
“역시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수였습니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내 제자 아니더냐.”
“절 그리 좋게 봐 주는 분은 스승님뿐입니다.”
“하하, 그럴 리가.”
둘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그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