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신사였다.
“그만두도록 하지, 데페르 경. 레이디에게 너무 난폭하네.”
그 말에 남자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이런 여자도 레이디라 불러야 하는 겁니까?”
“여성은 모두 레이디지. 그대도 기사의 규율을 알고 있을 텐데.”
“제 기사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데페르가 그렇게 말한 순간, 그의 옷자락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쪽에서는 헤이른이, 앞쪽에서는 루카스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니, 왜 불이!”
손으로 불을 털어 보았지만, 불씨는 떨어지지 않았다. 외려 더 부피를 키워 나가는 통에 소란이 점점 커져 갔다.
‘아이고, 머리야.’
아델은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짚었다.
‘도와주지 않겠다더니.’
뭐에 비위가 뒤틀려 사람에게 불을 지르는지 모르겠다.
“아델, 괜찮나?”
가장 먼저 도착한 루카스가 아델을 세심하게 살폈다.
“네, 괜찮아요.”
세게 잡혔던 손목이 아파 왔지만, 장갑 덕분에 다행히 드러나지 않았다. 여기서 소란을 더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판단했다. 아델은 일단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저분이 도와주셨거든요.”
“레이긴 경.”
“오랜만이네, 루카스 경. 이런 곳에선 약혼자를 혼자 두면 안 되지.”
“제 불찰입니다.”
레이긴이라 불린 사람은 시종일관 온화하게 루카스를 나무랐다. 루카스도 얌전히 수긍하는 걸 보니 원래 알던 사이 같았다.
‘아, 맞다!’
아직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델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레이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데페르 경이 철없는 짓을 한 게지.”
간만에 제대로 된 귀족을 만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건 어쩔 텐가?”
데페르는 불타오르는 재킷을 벗었지만, 이번에는 셔츠에 불이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음.”
아델은 그를 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쪽에서 손쓴 건 아닌데 굳이 도와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쯤 데페르도 헤이른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후작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데페르가 씩씩대며 외쳤다. 그 말에 헤이른이 느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거지?”
“여기서 불을 다룰 수 있는 분은 후작님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헤이른은 이제는 아예 팔짱을 끼고 불을 끄기 위해 허리를 굽힌 데페르를 내려다보았다.
그 싸늘한 눈빛을 바라본 데페르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사교계에 도는 헤이른의 소문을 생각하니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부탁드립니다. 불을 꺼 주십시오.”
“내가 왜?”
“후작님!”
“소리는 그만 지르도록. 품위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저 모습이 조금은 통쾌해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헤이른에 대한 호감도가 올랐다는 소리는 아니다.
“저 사람인가?”
그때 루카스가 물어 왔다.
“아는 사람이에요?”
“알겠지. 과거에 같은 기사단이었으니까.”
아직 가지 않은 레이긴이 옆에서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열등감에 젖어 있더니 결국 사고를 치는군. 그보다 레이디, 이쪽으로 물러나 있으시게.”
그 말에 루카스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델이 얌전히 레이긴의 옆으로 대피하자, 루카스가 장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구르고 있는 데페르에게 장갑을 던졌다.
철썩.
하얀색 장갑은 정확히 데페르의 얼굴에 맞고 떨어졌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장갑에 맞았던 부분의 살이 빨갛다.
“결투를 신청한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루카스 경의 검 솜씨를 보게 되는가?”
“누가 이길 것 같나?”
“몇 년간 루카스 경은 모습을 안 보였으니, 이번에야말로 데페르 경이 이길지도 모르지.”
“그건 아닐 것 같다만.”
떠들어 대는 모습들이 얄밉다. 그사이 상황은 이상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데페르에게 화상을 입히고 나서야 불을 끈 헤이른과 루카스가 대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럼 순서를 지켜. 결투는 내가 먼저 한다.”
“제대로 된 결투 신청도 안 하지 않았던가?”
“다른 방식으로 했지.”
헤이른은 데페르의 그을린 재킷을 가리켰다.
지금 이 사람들, 자신이 먼저 데페르와 결투하겠다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어느 쪽이건 데페르란 사람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그보다 더는 시선을 모으고 싶지 않은데.’
이미 늦은 듯하다. 저편에서 황녀가 이리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지 마세요!’
속으로 간절히 빌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황녀가 루카스와 헤이른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물었다.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둘의 말이 겹쳤다.
“결투 말인가요?”
황녀, 아만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저자가 제 약혼자를 모욕했습니다.”
루카스가 먼저 답했다. 그래, 그건 모두 아는 사실이니 황녀도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문제는 헤이른이었다.
‘입을 막고 싶다.’
아델은 초조한 얼굴로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가 아델을 배려해서 말을 조심해 줄까?
“제 아이 엄마를 돕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럴 리가! 절망적이다. 아델은 손등을 이마에 댔다.
“아이, 엄마요?”
아만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헤이른에게 되물었다. 누가 저 작자가 입을 열지 못하도록 해 줬으면 좋겠다.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 같으니.
“헤이른.”
루카스가 위협적으로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헤이른의 이름을 불렀다.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나?”
헤이른은 위협을 당하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외려 자신의 힘을 써서 루카스의 압박에 대응해 나갔다. 그 때문에 홀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주변 사람들은 헤이른이 내뱉은 말을 해석하기 위해 바빴다.
“그만두세요!”
결국 아델이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델.”
“누가 당신 아이의 엄마란 말인가요?”
“알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나?”
말을 할수록 구덩이에 빠지는 느낌이 났다. 헤이른은 아델의 말꼬리를 잡으며 그가 자신이 말한 아이의 엄마임을 재차 확인시키고 있었다.
루카스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델의 아이는 내 아이야.”
“친아들은 아니지 않나.”
“친아들과 다름이 없지.”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만다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요?”
“아델의 아이가 제 아이라는 소립니다.”
헤이른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반면 루카스는 사나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곧 결혼을 하게 될 테니, 제 아이입니다.”
그리고 때를 맞춰, 황제가 홀에 입장했다.
“위대한 제국의 하나뿐이신 빛,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보통 황제가 입장하면 전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나, 상황이 이런지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어떻게든 먼저 해결하려 했던 아델의 노력은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려던 게 아닌데.’
어느새 너무 멀리 왔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몸을 팔로 감싸 안았다.
“너무 떨지 마시게나.”
그런 아델을 옆에 서 있던 레이긴이 달래 주었다.
“잘못을 저지른 자는 따로 있으니.”
그건 아델도 알지만, 이 세계는 불합리하다. 평민이라는 이유로 아델이 나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나도 도와줄 테니까.”
레이긴은 그리 내뱉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도와준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이런 이런.”
홀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자신의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곧바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걸어옴에 따라 귀족들이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만한 이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표한다.
아델 또한 같이 고개를 숙였다.
“루카스 경!”
황제, 셀렉시온은 가장 먼저 루카스의 이름을 불렀다.
“이게 얼마 만인지. 고개를 들도록. 불러도 불러도 오지 않던 귀한 얼굴을 봐야지.”
말속에 뼈가 있었다. 예전이라면 태연하게 대꾸했을 터이나 지금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필요는 없고. 이제라도 왔으면 다행이지. 그래, 오늘 약혼자도 같이 온다 하더니,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폐하.”
아델의 옆에 서 있던 레이긴 경이 친절하게 도움을 주었다. 아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흐음.”
셀렉시온은 아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어 아만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