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어두운 외부에 있다가 밝은 내부로 들어서니 눈이 부셨다. 황궁은 그 비싼 발광석을 여기저기 사용하고 있어, 어두운 저녁인데도 내부는 낮처럼 환했다.
루카스와 아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예의 시선들이 다시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호기심과 악의가 적절히 버무려진 시선들. 이미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왔음에도 가슴이 조여 옴을 느꼈다.
‘론슈카를 위해서 힘내야 해.’
그리 생각하며 몸을 바로 세우는 순간, 루카스가 아델의 손을 잠시 놓았다.
당황한 순간, 몸을 돌린 루카스가 아델의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잡은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저와 춤을 추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웃어 보이는 루카스의 얼굴이 빛나 보였다. 아무래도 아델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음, 그러니까…….”
키슈가 필사적으로 연습시키긴 했지만, 아직 아델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손을 잡아당긴 루카스가 아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나만 믿으면 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할까. 아델은 웃으며 답했다.
“그렇다면 기꺼이.”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는 순간 둘은 홀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가벼운 왈츠를 들으며 아델은 자연스럽게 루카스의 팔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음악에 맞춰 꽃처럼 흔들렸다. 가까이 닿아 오는 루카스의 몸은 자연스럽게 아델을 이끌었고, 덕분에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악의가 담긴 시선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저 남의 이야기만 듣고 아델을 경원시하던 사람은 둘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 경이 저렇게 부드럽게 웃는 건 처음 보는군요.”
“그런가, 사랑인가.”
시작은 나이 든 귀족들이었다. 거기에 몽펠 백작이 말을 얹었다.
“참 보기 좋군요.”
물론 아직은 긍정적인 사람보다는 부정적인 사람이 많았다.
“평민이라니, 천박합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프레데릭가에 평민이라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의견은 한결같았다.
“고귀한 피를 더럽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연주가 끝났다. 아름다운 춤을 보여 준 둘은 다시 구석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때마침 황궁의 시종장이 황족의 발걸음을 알렸다.
그러자 다소 어수선하던 홀이 금방 조용해졌다.
“이번에 외국에 유학 가셨던 아만다 님께서 돌아오셨다지요?”
“어려서부터 기품 있던 분이시니 지금은 어떠실지 기대되네요.”
이윽고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만다였다.
찬란한 금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아만다는 연둣빛의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만만한 얼굴로 홀로 들어섰다.
“어머나? 오늘 입기로 하신 드레스는 하늘색이 아니었나요?”
몇몇 귀부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통 황족이 드레스를 고르면 최대한 비슷한 색이나 모양은 피해 가기 마련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은 사전에 알려 주었는데, 오늘은 예상과 다른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아델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와, 이런 일도 생기네.’
일부러 황녀와 똑같은 드레스를 피했는데, 당일에 드레스를 변경했다? 저건 틀림없이 노린 거다.
평민이 감히 귀족을 노리는 게 못마땅했든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겠지. 아델은 그 다른 이유로 추측되는 루카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사이일까?’
궁금해져 왔지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느 소설이나 그렇지만, 조연의 인생을 상세히 적어 내진 않는다. 그렇기에 아델도 루카스에게 죽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레온의 삶에 비추어 짐작만 해 볼 뿐이었다.
“드레스가 겹치는군.”
살짝 고개를 숙인 루카스가 아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게요.”
“변덕이 심하신 분은 아닌데, 왜 갑자기 드레스가 바뀌었는지 모르겠군.”
모르는 건 당신뿐 아닐까요? 아델은 그리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럼 저는 저기 발코니로 피해 있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혹시 몰라서 키슈에게 다른 드레스를 더 준비해 두라 했으니. 시녀도 데리고 왔으니 휴게실로 가서 갈아입고 오도록.”
“네.”
아델은 루카스의 도움을 받아 몰래 홀을 빠져나가 시녀를 불러왔다.
따라온 시녀는 둘, 수는 적었지만 둘 다 경험자라 그런지 능숙하게 탈의를 도왔다.
새로운 드레스는 연한 노랑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주홍빛이 감도는 독특한 모양새였다.
‘맞아, 이런 것도 샀었지.’
아델은 시녀의 도움을 받아 잽싸게 옷과 머리 장신구까지 바꾸고 나서야 휴게실을 나섰다.
홀과 달리 복도에는 발광석이 박혀 있지 않아 다소 어두웠다.
그 어둠 속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자니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했다.
늘씬한 실루엣으로 보아 남성인 것 같았다. 아델은 슬며시 벽에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그림자가 멈췄음을 깨달았다.
“아델.”
익숙한 목소리에 아델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헤이른 님.”
저런 작자에게 존대를 써야 한다니. 짜증 나고 열이 올랐지만, 이곳은 신분제 사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오다니, 겁이 없군.”
“제가 겁먹어야 할 일이 있던가요?”
“많지.”
헤이른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아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부채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고귀한 파란 피에 더러운 피를 섞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넌 이물질일 뿐이야.”
파란 피. 과거 귀족의 피부는 햇볕에서 일하는 평민과 다르게 하얬기에 핏줄이 더 잘 비쳐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얀 살갗에 비쳐 보이는 핏줄의 색은 파란색. 그 때문에 그걸 보고 말하곤 했다. 귀족은 파란 피를 가졌노라고.
실상 칼로 그어 보면 다 똑같은 붉은 피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우월감을 가졌다. 이는 헤이른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내뱉어선 안 되는 말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델은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애썼다.
‘그놈의 귀족이 뭐라고!’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
“할 말이 그게 다라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델은 헤이른을 피하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도 뒤따라올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사람이 많은 홀로 들어서자 그제야 긴장이 탁 풀렸다.
루카스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했으니, 아까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아델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저 멀리 루카스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아델은 발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다시 점점 느려졌다.
그는 혼자 있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아름다운 황녀님이 루카스의 옆에 서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아 원래 알던 사이 같았다.
‘하긴 원래는 황궁에서 일했으니까, 알 수도 있겠지.’
그걸 아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불안함인가?’
루카스가 아름다운 황녀에게 빠져 자신과의 계획을 뒤로하면 어쩌나, 하는 데서 생기는 불안감 말이다.
아델은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차마 발걸음을 내디딜 수 없어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는데 무언가가 그녀를 툭 쳤다.
처음에는 지나가던 사람이 쳤나 싶어 신경도 안 썼는데 무언가가 아델의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악!”
통증에 놀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손목을 잡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은 좋지만 얼굴이 말상인 남자였다.
아무리 보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라고 배웠더라?
아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뒤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례하시군요!”
“무례하시군요!”
남자는 나지막이 웃으며 아델의 말을 따라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새 주변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수는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포함해 넷밖에 되지 않았지만, 체격이 다르다.
손목을 잡은 남자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루카스 경이 선택한 사람이라니. 아무래도 궁금하지 뭐야. 그런데 어떻게 보아도 생각과는 다르군.”
루카스를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 말이다.
‘난감하네.’
고작해야 조롱 정도를 예상하고 왔는데 파티가 이루어지는 홀에서 이렇게 대놓고 나올 줄이야.
게다가 위치도 절묘해서, 휴게실이 있는 복도에서 나오는 입구 쪽이라 루카스에게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복도에서 봤던 헤이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이 남자들은 아직 보지 못했다.
아델이 곤경에 처한 걸 본 헤이른이 입을 움직였다.
‘도와줄까?’
저딴 작자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도와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델은 헤이른을 봤을 때처럼 부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얼굴을 후려치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사교계의 언어를 표현하는 부채가 무기가 되는 순간이다.
“고작해야 평민에 천박한,”
남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누군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