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이미 예행연습은 여러 번 했다.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가슴이 뛰었다.
아델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손으로 가슴 중앙을 지그시 눌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시종이 두 사람의 이름을 크게 외치자마자 곧바로 시선이 몰렸다. 규모가 크다 보니 시선의 농도도 더 짙게 느껴졌다.
“오, 루카스 경. 이게 얼마 만입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몰려온 사람들이 루카스를 감쌌다. 어떻게든 옆에 붙어 있으려 애썼지만 이 남자들, 너무 무례하다.
한 소리 해야 할까, 아니면 모르는 척 발이라도 밟을까, 하고 고민하는데 루카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제 약혼자가 부담스러워합니다.”
그제야 가까이 붙었던 몇몇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아델도 들어 올렸던 발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루카스 경의 약혼자를 드디어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쳐다보는 시선이 불쾌하다. 마치 더러운 것을 보는 듯했다.
‘하긴 귀족에게 평민은 하찮은 존재일 테니.’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건 옆에 루카스가 있기 때문이리라.
아델은 저 또한 가식적인 얼굴로 그들의 인사에 답했다.
“반갑습니다. 루카스 님의 약혼자 아델이라고 합니다.”
“성은 무엇이신지요?”
없다는 걸 알면서 묻기는. 성격이 고약하다.
평민도 드물게 성이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델은 없었다.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마을에서 자란 데다가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도 아버지에 대해 말해 주지 않으셨다.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루카스가 그런 아델을 바라보더니 대신 대답했다.
“약혼을 했으니 곧 제 성을 따르게 되겠지요.”
“그러면 프레데릭가에도 새로운 안주인이 생기는 겁니까?”
궁금한 것도 참 많다.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니요? 그렇다면?”
시선이 더 고약해졌다. 그들이 다음 말을 내뱉기 전에 루카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프레데릭가를 나왔으니까요. 기사로서 받은 백작위가 있으니, 그 성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아아, 경은 기사로서도 훌륭하신 분이시죠. 그럼 다시 수도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글쎄요. 아직 생각 중입니다.”
루카스는 능숙하게 대화를 넘기며 점차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
나중에는 나이 들어 보이는 귀족까지 붙어서, 아델이 계속 옆에 있기도 애매해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루카스는 아델을 근처 발코니로 데려다주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네.”
아델도 이쪽이 편하다. 아직 황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전까지는 여기에 혼자 있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올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발코니 앞은 루카스가 막고 있었으니까.
커튼을 치니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그제야 아델은 여유롭게 음식을 먹고 마셨다. 루카스가 떠나기 전 가벼운 와인과 핑거 푸드를 가져다주었기에 먹을거리는 충분했다.
술이 들어가서일까? 내내 뛰던 심장도 차분해졌다. 오늘 황제만 만나게 되면 이후 별다른 일은 없을 거라 하였다.
‘정말 그럴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느긋하게 음식을 다 먹고 난간에 기대 정원을 바라보았다. 원래 지내던 저택보다 훨씬 커서 볼거리도 더 많았다.
그때,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의 돌아온 모양이었다.
“오셨어요?”
아델은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이내 굳어 버렸다.
발코니로 들어온 사람은 곱상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나이는 40~50대쯤. 입고 있는 드레스의 질로 보아선 고위 귀족이다.
아델은 여기 오기 전에 배웠던 귀족 명부를 떠올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여성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루카스의 어머니. 현재 프레데릭가의 가주 대리인 케일라였다.
‘그러니까 시어머니인 셈이네?’
귀족 간에는 법칙이 있다. 친분이 없는 경우 신분이 낮은 자는 더 높은 자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 없다.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걸어 주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아델은 일단 케일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델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였다.
‘기 싸움인가.’
슬슬 목이 아파 온다. 그래도 여기서 고개를 들었다간 어떤 트집을 잡힐지 모른다. 아델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케일라가 입을 열었다.
“아델이라고.”
저걸 인사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목이 아팠던 아델은 인사로 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아델이라고 합니다. 케일라 님을 처음 뵙습니다.”
“날 알고 있군.”
‘귀족 명부에서 보았답니다.’
키슈가 요주의 인물이라고 동그라미에 별표도 쳐 줬다.
“그렇다면 내가 할 말도 짐작하고 있겠지.”
알다마다요. 아델은 전생에 TV에서 보았던 수많은 시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다졌다.
“평민에 아이까지 있다고. 그런데도 루카스와 약혼을 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지만, 말투가 지나치게 싸늘하다.
“그런 여자가 노리는 거라면 뻔하지. 루카스의 재산, 권력. 내가 그걸 가만히 지켜보아야 할까?”
“오해십니다.”
“뭐가 오해라는 거지?”
“저와 루카스 님은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내뱉은 말이건만 어쩐지 속이 간질간질하다.
“사랑한다고?”
케일라가 코웃음을 쳤다.
“사랑은 허상에 불과하다. 고작해야 얼마 버티지 못할 열정에 불과해. 그런데 그걸 핑계로 공작가 안주인 자리를 꿰어 차겠다? 뻔뻔해도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와아, 너무 정석적인 악역 같다 보니 상처도 되지 않는다.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 아래에서 루카스가 태어났을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천박하기 그지없어. 목숨이 아깝다면 좋게 말할 때 물러나라.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나대면 어떻게 되는지 손수 알려 주기 전에.”
“그건 좀 곤란한데요.”
“곤란하다고? 정말 곤란한 상황이 뭔지 알려 줄까? 내 소중한 아들에게 거머리 같은 미혼모가 들러붙은 거야! 하나뿐인 자식이라도 간수하고 싶다면 알아서 몸 사리는 게 좋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 론슈카를 건드린단 소리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델은 고개를 들어 올려 케일라를 마주 보았다.
“제 아이를 건드리겠다고 하신 건가요?”
“어차피 우리 가문의 피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람?”
“상관하셔야 할 텐데요.”
아델은 이를 으득 물었다. 제 자식 소중한 건 알면서, 내 아이는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저에게 손대는 건 좋아요. 하지만 만약 제 아이를 건드리신다면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죠.”
그 말에 케일라가 비웃었다.
“네가 어떻게? 사지가 뜯어져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네, 어떻게든 복수할 거랍니다. 다리가 없다면 팔로, 팔이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서라도.”
독기를 담아 내뱉는 말에 케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지만, 아델은 물러나지 않았다.
“건방져.”
케일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들어 올린 손을 보아하니 따귀라도 때리려는 모양인데 얌전히 맞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참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전생의 기억이 아델을 자극했다. 그러니 내려치는 손을 잡기라도 해야겠다.
아델도 막 손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누군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루카스였다. 그는 케일라의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만두십시오.”
“놔! 당장 놓지 못해?”
“못 놓습니다.”
“루카스!”
“그렇게 소리 높이지 않으셔도 알아듣습니다.”
케일라는 입술을 깨물더니 다시 뒤로 물러났다.
“네가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루카스, 난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게 이런 여자와의 약혼 소식이라니!”
“아델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틀린 말을 했어?”
“네, 틀립니다.”
생각 이상으로 단호한 대답에 케일라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델은 좋은 사람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압니다.”
바로 앞에서 행해지는 칭찬에 아델의 얼굴이 서서히 빨개지기 시작했다.
“네가, 네가 미쳤구나. 저 여자가 너를 미치게 만든 거야!”
“저는 정상입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다 저 여자 때문이야. 예전처럼! 하지만 괜찮다, 루카스. 이번에도 이 어미가 다 해결해 주마.”
“미친 건 어머니입니다!”
루카스가 처음으로 소리를 높였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케일라를 노려보았다.
“만약 아델과 아이들에게 손을 대시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더는 예전의 무력한 제가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루카스는 아델을 발코니 밖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