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에라스 자작 부인의 말에 모여든 부인 중 일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 같긴 했어.’
그 때문에 루카스와도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다. 이 모든 일이 론슈카를 위한 것인데, 인제 와서 감출 게 있으랴.
아델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네, 귀여운 아들이 있답니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당당한 말에 에라스 자작 부인은 순간 말을 잃었다.
“부끄러움이 없으시군요.”
한참 만에 부채를 흔들며 말을 내뱉어 보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바뀐 상태였다.
“제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라스 부인은 더는 아델의 건드리지 않았다. 찔러도 아델의 반응이 태연하거니와, 얼마 지나지 않아 루카스가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데서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어울리기 마련인데 약혼자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보니 에라스 자작 부인도 슬슬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중심이 되는 에라스 자작 부인이 그러니 다른 이들도 말조심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치라 남작 부인은 아델에게 간이라도 꺼내 줄 듯 상냥하게 굴었다.
“사교 활동은 처음이신가요? 그렇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감사드려요. 하지만 모든 사항을 숙지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내 곱게 말을 하자니 입이 간지러웠지만, 그날 아델은 키슈가 연습시킨 대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 * *
“우와아아!”
아델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구두를 벗어 던지고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드레스가 구겨졌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몽펠 백작가의 식사 초대는 약과였다. 이후 이어지는 초대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다. 루카스가 최대한 조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힘들었다.
‘귀부인들은 전부 에너자이저인가!’
아델은 한숨을 쉬며 눈을 깜박였다.
화장도 지워야 하고 드레스도 벗어야 하는데 힘이 없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시녀들이 방으로 들어와 아델을 도와주었다. 덕분에 어찌어찌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론슈카가 그녀를 찾아왔다.
“엄마, 많이 힘들어?”
“아니, 전혀 힘들지 않아.”
그러면서 양팔을 벌리자 론슈카가 달려와 안긴다.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조금 힘든 걸로 해 두자.”
아델은 그렇게 말하며 론슈카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하얗고 빵빵한 뺨이 절로 입술을 불렀다.
‘어쩜 이리 귀여울까!’
자신의 아들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귀엽다.
‘피로가 풀린다.’
론슈카를 안고 있자니 피로가 절로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보다 이제 진짜 파티가 얼마 남지 않았네.’
파티의 주최 명목은 타국에 유학 가 있던 황제 여동생의 귀환 축하. 황족을 위한 파티니만큼 규모가 대단할 것이라 들었다.
일단 황족과 같은 색의 드레스는 피하는 게 좋다. 같은 맥락으로 작위가 높은 사람의 부인이 입은 옷과 비슷한 모양도 피해야 했다.
다행히 루카스의 가문은 공작인 데다가 제법 알아주는 가문의 부인들은 대부분 나이가 있어 드레스가 겹칠 확률은 낮다고 하였다.
그렇게 겹치는 드레스를 피하고 나면 다음에는 액세서리를 골라야 한다.
“너무 저렴한 건 안 됩니다.”
키슈는 단호하게 말했다.
“작위에 맞는 가격대의 세공품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러고는 억 소리가 나오는 금액의 액세서리를 더 공수해 왔다.
“그냥 원래 있던 걸 쓰면 안 되나요?”
의상실에서 맞춘 액세서리들도 저렴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평소라면 괜찮으나 이번은 안 됩니다.”
정말 이렇게 써도 루카스의 금전 사정이 괜찮은 걸까.
아델은 했던 걱정을 또 했다.
“그날 아델 님은 그 누구보다도 완벽해 보이셔야 합니다.”
귀족 사회는 복잡하기도 하지. 약혼만 하면 헤이른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오다니.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황궁 파티가 열리는 날 아침이 되었다.
아델은 잠을 푹 자고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약혼식 때와 거의 흡사한 절차를 끝내고, 미리 준비해 둔 드레스를 입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연둣빛의 드레스는 과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다른 색도 대보았지만, 약혼식에서도 그러했듯이 이 색이 가장 잘 어울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하얀 장갑을 꼈다. 그러고 밖으로 나서니 루카스가 아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
돌아서는 루카스의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 사람, 어울리지 않는 옷이 있을까?’
누더기를 입혀 놔도 빛을 발할 외모인데, 옷까지 완벽하니 심장이 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델은 살짝 떨리는 손을 루카스의 팔 위에 얹었다.
“걱정되나?”
그 떨림을 오해한 듯 루카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사실 이건 당신이 너무 잘생겨서 떨리는 거랍니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아델은 두려움을 가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절대 혼자 두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마.”
듬직한 말이었다.
저택에서 나온 둘은 마차에 올라탔다. 론슈카도 레온도 따라오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번엔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사교계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는 무슨 일을 겪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둘은 황궁으로 향했다.
* * *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기다란 금발 머리, 호수와도 같은 파란 눈. 새하얀 피부에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황녀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만다 님.”
아만다의 전속 시녀인 리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의 고국이지요? 파티가 기대되시나요?”
“조금.”
아만다는 새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그 소문이 사실이야?”
“어떤 소문 말이신가요?”
“모르는 척하기는. 루카스 님이 약혼했다는 소문 말이야.”
리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도 그런 모양이에요. 신전에도 등록되어 있답니다.”
“말도 안 돼!”
아만다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생 배우자는 없을 거라 했으면서, 지금 와서 뭐? 약혼을 했다고? 그럼 그동안 기다려 왔던 나는?”
파란 눈이 빛을 머금고 흔들렸다.
“아만다 님.”
그런 아만다를 보는 리사 또한 안타까웠다.
루카스는 완벽한 남자였지만,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황녀님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했으므로 황제가 아만다를 해외로 보내려고 했을 때, 리사도 그에 동의했다. 몇 년만이라도 외부에서 쉬다가 오면 그녀도 생각이 바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내가 틀렸어.’
아만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외려 더 커진 것 같았다.
“오늘 약혼자도 같이 온다지? 제대로 얼굴을 봐야겠어.”
아만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만약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옆에 서 있다면 어떻게든 떼어 놓을 생각이었다.
“드디어 오늘이군.”
아만다와 마찬가지로 찬란한 금발을 가진 남자, 셀렉시온은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약혼이라니. 루카스 경도 많이 변한 모양이야. 안 그런가?”
그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한 쪽으로 변하긴 했지만, 달라진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쪽이라면?”
“남의 것을 탐내는 행동을 하니 말입니다.”
“남의 것을 탐낸다, 라. 그건 루카스 경의 약혼자 이야기인가?”
“그의 약혼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원래 제 것이었습니다.”
야광석으로 만들어진 등불이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기다랗고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에 붉은 눈. 그는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헤이른이었다.
“혼인도 하지 않은 사이 아닌가.”
“제 아이를 낳았습니다.”
“흠.”
셀렉시온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와인잔을 재차 기울였다. 그 모습에 헤이른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곧 파티가 시작됩니다. 그만 마시십시오.”
“일부러 호위 기사도 내보냈건만, 이번엔 경이 잔소리인가?”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 어차피 슬슬 그만 마시려고 했다. 이제 사람들도 거진 다 왔겠지.”
셀렉시온이 테이블 위의 종을 흔들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달려와 옆에 섰다.
“준비해.”
“네.”
이미 귀족들은 전부 도착해 있다. 그러나 셀렉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황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저는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든가.”
셀렉시온은 헤이른에게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금 여기서 그걸 지적할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