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맞아.”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세 벌만.”
“아이, 그건 너무 적어요. 명색이 루카스 님의 약혼자이신걸요.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면 옷차림부터 신경 쓰는 게 좋답니다.”
일리아는 웃으면서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다른 귀부인에게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큰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이쪽은 아무것도 모르니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 생각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루카스는 일리아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고, 아델의 표정도 바뀌었다.
“이 정도는 루카스 님에게 부담도 되지 않아요. 제가 예쁜 옷만 골라서 내올 테니 골라 보세요.”
일리아는 아델을 살살 구슬리며 다시 옷 갈아입기 지옥으로 끌고 들어갔다.
외출복을 열두 벌쯤 고르고 나서 다음은 필요한 액세서리와 소품을 골랐다.
“의상에 맞는 양산은 필수지요.”
일리아는 양산을 여러 개 꺼내 보여 주었다.
가느다란 실로 짜낸 레이스가 반짝이는 공단과 엮여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거기다 대는 값비싼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손잡이는 보석을 깎아 만든 듯 아름다웠다.
‘이것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소시민적인 생각이 아델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래도 필요한 거라고 했으니까.’
아델은 꿋꿋하게 소품을 골라 나갔다.
“다음은 드레스입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드레스를 본 적이 있을까.
수많은 드레스가 아델의 앞에 하나씩 대령되었다.
“드레스는 티타임용, 파티용으로 일단 열 벌만 맞추도록 하지.”
그 말에 일리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제 아델은 더는 항의할 기력도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새로 산 옷만 해도 서른 벌이 넘어갔다. 거기에 액세서리와 소품, 모자에 구두까지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돈이 나갔으리라.
“이러면 나중에 은혜도 못 갚아요.”
의상실을 나오며 아델은 울상을 지었다.
“갚을 필요 없다.”
“그래도요.”
전부 아델의 몸에 맞춘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도 없다. 이러면 나중에 루카스와 결혼할 여자가 자신과 사이즈가 같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아델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혹시 더 사고 싶은 게 있나? 필요한 게 있다면 가감없이 말하도록.”
“없습니다!”
아델이 기겁하며 외치자 루카스가 미소 지었다.
“씩씩해서 좋군. 그럼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외출 준비를 해 볼까?”
“네?”
“잊고 있었나? 오늘 저녁 몽펠 백작가의 저녁 식사 자리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그거라면 기억하고 있어요.”
잊었을 리가 있나. 그 일정 때문에 키슈에게 죽어라 예법 교육을 받았는데.
더불어 수도의 귀족 리스트를 보며 벼락치기 공부도 했다.
“그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최근 힘들게 공부하지 않았나. 이번에 익힌 걸 전부 써 보도록 해.”
“노력해 볼게요.”
둘은 거리를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에는 이미 가봉을 마친 드레스가 두 벌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델은 시녀의 도움으로 몸을 깨끗이 씻고, 화장을 받으며 그 동안 외웠던 것들과 키슈에게 들은 정보를 되새겼다.
‘몽펠의 록텐은 수다쟁이… 수도에서는 그렇게 이야기가 합니다만, 의외로 백작 부부는 아들과는 좀 다릅니다.’
백작 부부는 가십에 예민한 아들과는 다르게, 사교계에 큰 관심이 없다. 귀족으로서의 의무는 잊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권위를 세우지 않는다.
그 때문에 루카스는 첫 외출을 몽펠가로 잡았다. 실수를 하면 곤란해지겠지만, 하지 않는다면 쉽게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걸 소문내 줄 사람도 하나 있었고.
‘그런 이유로 다른 모임에도 몇 번 더 참여할 생각이다.’
루카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아델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황제는 아마도 이번 달 말에 열리는 커다란 파티에 루카스와 아델을 초대하려는 것 같았다.
사실 루카스가 버리려는 것들을 생각하면, 모임의 참여는 최대한 줄이는 게 좋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델은 첫 사교계 데뷔를 황궁 파티에서 하게 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파티에 참여해 보지 못한 사람이 황궁 파티에 간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그 때문에 루카스는 다른 자잘한 일정을 더 잡아 두었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아델이 좀 더 능숙해지기를 원해서였다.
그는 이를 미리 아델에게도 말해 주었고, 아델도 동의했다. 일종의 연습인 것이다.
치장을 마치니 마침 딱 나갈 시간이 되었다.
“잘 어울리는군.”
새로운 드레스를 걸친 아델을 보며 루카스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루카스 님만 할까요.”
아델은 진심을 듬뿍 담아 말했다.
아델이 반딧불이라면 루카스는 태양이었다. 남색에 은실로 자수가 들어간 정장을 입은 그의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런 사람 옆에서 걸어가야 하다니.
‘정말 괜찮을까?’
“엄마, 예뻐!”
“아델 님,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아이들이 칭찬을 해 주었지만, 자신감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 엄마 없다고 식사 대충하지 말고 제대로 다 먹어. 그리고 과자는 조금만 먹는 거다?”
“응!”
론슈카에게 잔소리를 하고 이번엔 타깃을 바꿨다. 잔소리를 듣는 론슈카를 레온이 부러워하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레온도 깨끗이 목욕하고, 과자는 조금만 먹고, 양치질 깨끗하게 해야 해?”
“네!”
시무룩해 있던 레온의 표정이 변했다.
‘사실 레온은 지적할 게 거의 없는데 말이지.’
매번 생각해 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당분간 잔소리는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 * *
몽펠 백작가는 루카스의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걸어가도 충분할 것 같은 거리였지만, 둘은 사두마차에 올라탔다. 귀족의 체면 때문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사용인이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실례지만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프레데릭가의 루카스와 약혼자인 아델.”
그러면서 초대장을 내밀자 사용인이 그것을 공손히 받아 들고는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이미 도착한 몇몇 사람들이 가벼운 다과와 함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프레데릭가의 루카스 님과 약혼자 되시는 아델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외치자, 사람들이 시선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중 몇몇은 저들끼리 작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 저 사람이 그?”
“평민 출신이라죠?”
“그뿐이에요? 소문엔 아이도 하나 있다던데.”
“네? 그게 정말이에요?”
백작 부부는 인격자였지만, 초대 손님이 전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뒤에서 이야기가 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오, 어서 오세요!”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 몽펠 백작 부인이 가장 먼저 루카스와 아델을 반겨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작 부인.”
“그러게요. 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요. 록텐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번에 약혼을 하셨다지요?”
“네.”
“그럼 소개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이쪽은 아델입니다.”
루카스의 소개에 아델은 능숙하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아델이라고 합니다. 인망이 자자한 몽펠 백작 부인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최대한 우아한 표정을 짓자니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려 왔다.
‘아니, 애초에 우아한 표정이란 뭐야?’
키슈가 가르쳐 주긴 했지만,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반가워요, 아델 양. 오늘은 가벼운 다과회나 다름없으니, 편히 즐기다 가세요.”
첫 번째 고비는 무사히 넘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몽펠 백작 부인이 물러나자마자 다른 귀족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부 품위는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라스 자작 부인이랍니다.”
“저는 치라 남작 부인이에요.”
여러 부인들이 아델을 둘러싸는 바람에 루카스와는 떨어지게 되었다. 도움을 요청하려 루카스를 보았지만, 그 또한 다른 신사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델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아델 양에 대해 궁금한 게 무척 많았답니다.”
“맞아요. 대체 어떻게 루카스 님을 사로잡으신 거예요?”
“철벽이라 불리던 분이신데 말이죠. 이번에 약혼을 했다는 소문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지 뭐예요?”
수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딱히 사로잡은 건 아니고요. 도움을 받는 처지랍니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입 다물고 있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아델은 조금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사로잡았다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어쩌다 인연이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수줍게 웃어 보이니 몇몇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로맨틱하네요.”
요염하게 생긴 에라스 자작 부인이 그리 말했다.
“그런데 제가 들은 소문이 있는데 말이죠.”
에라스 자작 부인의 말에 치라 남작 부인이 잽싸게 물었다. 빨간 입술이 열리며 이야기를 뱉어 낸다.
“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직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