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 아침 식사에는 좋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가 나왔다.
평소라면 신나게 먹어 치우고 하나 더 먹었을 테지만, 도저히 식욕이 나지 않았다.
적게 먹는 모습을 본 아델이 그를 걱정했지만,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아홉 살이 다 되어 가는데. 이런 사소한 이유로 다른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레온이 너무 의젓한 나머지 벌어진 일이었다.
식사를 마친 레온은 평소처럼 연무장으로 갔다. 루카스가 가르쳐 준 검술을 연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몇 번 휘두르고 나니 지쳐 버렸다.
레온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연무장 가에 심어진 나무 밑에 앉았다.
연무장에서는 스승님의 방 창문이 보인다. 레온은 손가락으로 창문을 세어 보았다.
최근 론슈카는 엄마인 아델과 함께 스승님의 옆방으로 옮겼다.
안다. 자신의 방도 스승님과 먼 게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마음이 드는 건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인 걸까?
‘나도 스승님과 같이 자고 싶은데.’
너무 어린애 같은 욕망이었다.
실제로 레온은 어린아이가 맞았지만, 성숙한 사고방식은 그를 생각지 못하게 했다.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저 멀리에서 정원을 산책하는 루카스와 아델이 보였다.
어쩐 일로 론슈카는 빠져 있었지만, 둘만 있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루카스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아델은 빨간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모양이었다.
‘무서워.’
아델이 스승님과 더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이 일었다. 둘은 약혼한 사이니 론슈카도 곧 입적되겠지.
‘그럼 나는?’
나는 계속 제자로만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가족이 되고 싶어.’
론슈카처럼 스승님 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걸 직접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레온은 목검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마저 마음을 흔드는 것 같았다.
‘축하해 줘야 해.’
잘된 일이니까.
‘그러니 잊자.’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해내야 한다.
그리 생각하면서 고개를 드는데 바로 앞에 아델이 서 있었다.
“아델 님!”
레온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네? 네!”
아델은 레온의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오늘 날씨가 좋네.”
“네.”
“그런데 이 좋은 날에 레온은 무슨 일인 걸까? 왜 기분이 안 좋아?”
표정을 최대한 관리했는데, 들킨 모양이었다. 레온은 그게 부끄러웠다.
“그냥 실력이 빠르게 늘지 않아서 그래요.”
“정말? 루카스 님은 레온의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했는데?”
“ⵈ정말요?”
“그럼.”
언제나 직접적인 칭찬은 없었던 루카스이기에 레온의 얼굴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마치 아까의 아델처럼 말이다.
“그보다 레온이 처져 있는 건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거고.”
“ⵈ네.”
“그럼 이렇게 하자. 당장은 말하지 않아도 돼. 말하고 싶을 때 말해 주는 거야.”
아델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라.
그 말이 레온의 용기를 자극했다.
지금 참고 넘기면 다시 말할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저도.”
“응?”
“저도 스승님과 같은 방을 써 보고 싶어요. 아니면 옆방에서 지내거나.”
“그리고?”
레온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론슈카처럼 가족이 되고 싶어요.”
말했다. 말해 버렸다.
레온은 슬쩍 고개를 들어 아델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아델이 그렇게 나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임을 알지만, 긴장감 때문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구나. 좋아, 그럼 레온.”
“네?”
“지금 루카스 님한테 가 보자!”
“방금 집무실로 가시는 것 같았는데… 바쁘지 않으실까요?”
“아무리 바빠도 귀여운 제자 만날 시간이 없겠니?”
막무가내 같았지만, 가슴이 뛰었다.
“가자!”
아델은 레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밀자 천천히 걸어 나간다. 아직 어린 레온의 발걸음을 배려하는 듯했다.
‘더 빨리 가도 되는데.’
그 사소한 배려가 또다시 가슴을 간질였다.
집무실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누군지 묻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마도 스승님은 다 알고 계실 것이다. 그는 찾아온 사람을 마법처럼 맞히곤 했으니까.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그 말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루카스가 펜을 내려놓았다. 시간을 내주겠단 소리였다.
“자.”
뒤에서 아델이 레온을 슬며시 떠밀었다.
“직접 말해 봐.”
심장이 너무 뛰어서 목구멍에서 뛰쳐나올 것 같았다.
‘용기를 내 봐.’
자신을 바라보는 아델의 시선에서 용기를 얻고, 레온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스승님.”
“레온.”
“저도 스승님의 가족이 되고 싶어요!”
바들바들 떨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귀여웠다. 루카스는 감정 표현에 다소 박한 면이 있어서,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델은 살며시 레온의 등을 밀어 주었다.
‘스승님을 믿어 봐.’
원작대로라면 루카스는 나중에 레온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던 중 죽는다. 그만큼 레온을 소중히 여긴단 소리였다.
그런데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니 레온이 이러는 거다. 둘 다 아직 멀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넌 이미 내 가족이다.”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럼 저도 론슈카처럼… 스승님 아래에 입적할 수 있는 건가요?”
그게 부러웠던 거구나.
하긴, 레온은 아델이나 론슈카보다 더 오래 루카스의 곁을 지켰다. 그런 마음이 들 만했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돌아온 대답은 상냥했다. 그 상냥함에 레온은 뚝뚝 눈물을 흘렸다.
레온이 우는 모습에 루카스는 당황한 듯했지만, 이건 괜찮다. 기쁨의 눈물이니까.
아델은 뒤에서 가만히 레온을 끌어안아 주었다.
* * *
레온이 훌쩍이다 떠난 자리, 아델은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약혼녀가 되었다고 해서 원래 하고 있던 일을 게을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기에 펜을 드는데, 루카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들 입적 말인데.”
“네.”
“문제가 생겼다.”
“문제요?”
아델의 물음에 루카스가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신전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일단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돈을 들이고 있긴 한데.”
루카스의 수려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쪽 신전은 너무 쉽게 휘둘리는지라.”
제국과 마주한 왕국의 작은 도시.
그렇기에 신전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손을 쓰면 쉽게 이야기를 들어 주리라 생각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신전의 우두머리인 고위 신관이 지나친 욕심쟁이였다.
“나와 다른 사람을 가늠하고 있어.”
돈을 얼마나 더 줄 수 있을지 말이다.
“다른 신전에서 등록하면 안 되나요?”
“신전은 지역마다 있고, 다른 지역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요?”
“흠.”
루카스는 펜을 내려놓고, 서류를 정리했다.
“그래서 잠시 여행을 다녀올까 한다.”
갑자기 여행을 한다고? 아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행이요?”
“일종의 눈속임이지. 약혼은 여행차 방문한 신전에서도 등록이 가능하거든.”
다른 지역의 신전을 쓰기 위한 간단한 편법이었다.
그건 이 지역의 고위 신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조금이라도 돈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무리수를 둔 거다.
“그렇군요.”
“일단 여행 후보지는 몇 군데 정해 놨으니, 직접 고르도록.”
루카스는 그리 말하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다른 지역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전부 거리도 멀지 않다.
“아이들과 같이 봐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지. 대신 밖에는 이야기가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여행지는 비밀로 할 거니까.”
“네!”
아델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일과를 마친 후, 방에 돌아온 아델은 루카스에게 받은 종이를 다시 펴 보았다.
‘여행이라.’
약혼만으로도 버거운데 여행까지 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부끄럽네.”
아델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여행지는 셋.
온천 마을, 포도주가 유명한 마을, 특별한 건 없지만 별장이 있어 조용하게 지냈다 올 수 있는 변두리의 마을.
“일단 아이들에게 물어보자.”
먼저 레온에게 물어보았다.
“저는 온천 마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온천이 피부 미용과 건강에 좋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다음은 론슈카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엄마가 좋으면 다 좋아.”
“엄마도 론슈카가 좋으면 다 좋아. 그래도 하나 골라 볼까?”
“그러면 나는 별장. 조용한 게 좋아.”
아이들의 의견이 갈렸다. 루카스는 아델에게 선택을 맡겨 뒀으니 이제 아델만 고르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