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기이, 무례합니다.”
루카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델은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먼저 약혼을 권유한 건 접니다.”
론슈카를 지키기 위해서 권유한 것이지만, 이렇게 말하니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다.
“사랑하시는 겁니까?”
센카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루카스 님은 예전부터 불쌍한 존재한테 한없이 약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루카스 님의 성정을 알고 접근한 게 틀림없습니다!”
“기이, 무례하다고 했습니다.”
루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경고했다.
“무례하다 해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이번 약혼식은 당장 취소하십시오. 아직 신전에 오르기 전이니 취소는 쉬울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루카스는 신관이 곧바로 신전에 돌아가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신관을 붙들어 둔 겁니까?”
“잠시 모셔 둔 겁니다.”
센카가 변명하듯 말했다.
“가문으로 돌아오십시오. 루카스 님을 믿기에 몇 년간 가만있었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도 수도는 매일같이 변해 가고 있습니다.”
기이가 열정적으로 말을 토해 냈다.
“이럴 때일수록 유능한 가주가 필요한 법입니다! 지금은 케일라 님께서 가주 대리를 맡고 있지만, 루카스 님과 비할 바가 아니지요!”
“기이 님의 말이 다소 심하긴 하지만, 틀린 건 아니라 봅니다.”
거기에 센카가 말을 얹었다.
“돌아오십시오, 루카스 님.”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가문의 성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어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문의 이름. 루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이번 약혼식의 초대장에 성을 적어 보냈다.
사실 그러기는 싫었지만, 그래야 원하는 사람들이 약혼식에 참여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 가지고 늘어질 줄이야.’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지만 제법 귀찮다.
“센카, 기이.”
“네.”
“네, 루카스 님.”
“다시 말하지만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후 프레데릭의 성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성을 버려도 아직 루카스에겐 많은 것이 남아 있었다. 헤이른을 상대하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루카스 님!”
기이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센카도 다르지 않았다.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제 약혼녀에게 더 이상 무례를 범하지 않길 바랍니다. 신관도 신전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시고요.”
“안 됩니다!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기이가 발악을 하며 매달렸지만, 루카스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어린 시절 추억을 공유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들을 떨쳐 낼 때가 된 모양이었다.
* * *
론슈카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레온은 화동 일이 재밌을 거라고 했지만, 그 말은 틀렸다.
재밌기는커녕 짜증이 나기만 했다. 그래서 꽃도 건성으로 뿌렸다.
‘싫어!’
엄마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웃어 주는 건 보기 싫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걸 알아도 말이다.
그런 론슈카에게 레온이 물어 왔다.
“우리는 들어가서 푸딩이나 먹을까? 푸딩 좋아하잖아.”
좋아하지만 지금 먹고 싶진 않다. 그래서 고개를 내저으려 했지만, 레온은 힘으로 론슈카를 질질 끌고 갔다.
론슈카에게는 정령이 있었지만, 그걸 사용할 수는 없었다. 레온이 다치면 엄마가 슬퍼할 테니까.
예전에는 엄마의 감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부정적인 감정이건, 긍정적인 감정이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면 족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배우고 겪어 가면서 론슈카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웃는 게 좋아.’
화내거나 슬퍼하는 엄마보다는 웃는 엄마가 더 좋다.
그러니까 엄마가 남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론슈카의 태도도 좀 더 유해졌다.
레온은 부엌으로 론슈카를 데려와 앉혀 놓고는 푸딩을 가져왔다. 몇 남아 있던 시녀의 도움이 있어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전부터 식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 먹자.”
“엄마가 해 주는 게 더 맛있는데.”
론슈카는 투덜거리며 푸딩을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하지만 오늘 아델 님은 바쁜걸.”
“알아.”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론슈카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엄마한테 가 볼래.”
슬슬 식도 끝났을 것 같았다.
“같이 갈까?”
레온이 그렇게 말했지만, 론슈카는 혀를 내미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온이 물러난 건 아니었다. 그도 이제는 제법 요령이 생겨서 론슈카를 다루는 방법을 익혀 가고 있었다.
론슈카와 레온은 준비실로 다가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은데?”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론슈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안쪽에서 익숙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퐁!
정신을 집중하자 허공에 불꽃으로 만들어진 새가 나타났다. 새는 포로로 날아 그대로 문으로 돌진했다.
“론슈카!”
당황한 레온이 말리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으으.”
이대로라면 문이 박살 나고 둘 다 혼날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으나,
“어?”
변한 건 없었다. 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역시 이상해.”
론슈카는 재차 불꽃 새를 돌진시켰으나, 새는 문에 닿기도 전에 알 수 없는 것에 머리를 박고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그래도 불꽃 새는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연이어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머리를 박고, 또 박았다.
그쯤 되니 레온도 모를 수가 없었다.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 스승님을 불러올게!”
레온은 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였다. 론슈카가 깨지 못한 것이라면 자신도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레온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은 론슈카는 문을 노려보았다.
문을 뚫으려면 좀 더 큰 불꽃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저런 작은 새로는 불가능하다.
더, 더 큰 정령을 불러야 했다.
론슈카는 정신을 집중했다. 흑마법사를 만나서 처음 늑대를 불러낸 이후, 좀 더 쉽게 불러내기 위해 여러 차례 연습했다.
그 연습의 성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불꽃 새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타난 늑대는 예전보다 그 모습이 훨씬 더 커져 있었다.
“부숴.”
론슈카는 늑대에게 명령했다.
쿵.
늑대의 돌진은 새의 것과는 달랐다. 내내 굳건하게 버티던 보이지 않는 무형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론슈카에게도 타격이 왔지만, 이 정도는 버텨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늑대의 불꽃이 깎여 나가 좀 더 작아질 무렵, 벽이 깨졌다.
론슈카는 그걸 확인하자마자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
“론슈카?”
구석에서 촛대를 쥐고 있던 아델이 론슈카의 이름을 불렀다.
“제법인걸.”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헤이른은 아델에게서 론슈카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정령을 이용해서 막을 깬 건가? 흠. 바람의 중급 정령을 뚫고 들어올 정도라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정령이 필요하겠지. 빠른 성취야.”
헤이른은 론슈카에게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를 놓아줘.”
“론슈카, 엄마가 그렇게 소중하니?”
“소중해.”
“여전하군. 이득을 계산하지 못하는 건 아직 어려서 그런가.”
헤이른은 나지막이 웃었다.
그가 어렸을 적에는 론슈카의 나이에도 이득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론슈카는 평민에게서 교육도 없이 자라 왔을 테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하지만 아델, 내가 말한 걸 잘 기억해 둬야 할 거야.”
헤이른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둘의 약혼이 성사될 수는 없어. 결국 어떤 선택이 현명했는지 깨닫게 될 거야. 좋게 대우해 줄 때 옳은 선택을 해.”
그 말을 끝으로 헤이른은 등을 돌렸다. 다시 외부로 나가려는 모양이었지만, 론슈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따라 들어온 늑대가 빠르게 움직여 헤이른의 등을 공격했다.
“아이도 엄마를 닮나 보군.”
달려들던 늑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런 늑대를 바닥에 짓누르고 있는 건 론슈카의 작은 새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거대한 새였다.
‘이건 이길 수 없다.’
그걸 알면서도 론슈카는 물러나지 않았다.
늑대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매의 형상을 지닌 새에게서 벗어나려 애썼다.
“조금 교육이 필요하겠군.”
헤이른이 허공에 손을 올리는 순간, 아델이 론슈카에게로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으로 들어선 한 인영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