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그때 아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넓은 등이 크게 들썩였다. 한숨을 쉰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아델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이리 피곤한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그때였다. 뒤돌아 있던 루카스가 아델에게로 몸을 돌렸다.
“신관님, 마무리를 지어주십시오.”
아까와는 다르게 강압적인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담긴 힘에 신관은 저도 모르게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이로써 약혼식이 끝났습니다. 모두 행복한 두 사람에게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카스가 아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다른 손으로는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며 입을 맞췄다.
모든 것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고 해도 그것이 입맞춤인 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몸이 반응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아델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자유로운 손으로 문질렀다. 화장을 했기에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는데, 버티기가 힘들었다.
“루카스 님!”
뒤쪽에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지금부터 아델은 제 약혼녀입니다. 예의를 갖춰 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초대받으신 손님들은 파티를 즐겨 주십시오. 조금 이따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델을 번쩍 안아 들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으아아!’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연기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아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단호했다.
“그대에겐 미안하지만,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실제로 입을 맞추지 않으면 그걸 물고 늘어질 사람들이야.”
“그, 그렇군요.”
아델은 드레스 자락을 꾹 잡아 눌렀다.
“많이 놀랐나?”
“아니, 안 놀랐어요. 각오는 했는걸요!”
씩씩하게 대답한 아델은 루카스의 품에서 내려서 준비실로 향했다.
‘태연하게 굴자, 태연하게.’
하지만 첫 키스인걸!
원래는 하는 척만 하려고 했단 말이다!
과거에 헤이른도 입맞춤은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한 게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하는 입맞춤이었다.
“으으으.”
준비실로 들어선 아델은 곧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녀가 오기 전까지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난 괜찮다. 괜찮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고개를 드는데, 앞에 누군가가 서있는 게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게다가 문 앞은 아델이 몸으로 막고 있었다. 시녀라도 아델 모르게 안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아델.”
“헤이른 님.”
아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경계하듯 문에 붙어 섰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 소리를 지를 셈이었다.
“지금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어. 정령으로 막아 놨거든.”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델은 침착하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걸 찾기 위함이었다.
“모르겠다고?”
헤이른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화사한 미남이 웃고 있건만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도리어 반발심만 일었을 뿐이다.
“내 아이를 낳아 놓고서 뻔뻔하게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려 하지 않았나.”
“죄송하지만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약혼을 했어요.”
“아직 신전에 올라가지 않은 약혼을 무효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지.”
원래대로라면 식이 끝나자마자 신관은 신전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헤이른이 그걸 막은 모양이었다.
“신관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곱게 모셔 놓았지.”
그게 그거지. 아델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런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없어요.”
“그건 봐야 아는 일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헤이른은 아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델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피하는 건가?”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 아델은 꿋꿋하게 피하며 헤이른을 노려보았다. 그를 본 헤이른이 낮게 한숨지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네?”
“진심으로 프레데릭가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건가? 그게 불가능할 거라는 건 지나가던 아이도 알 텐데. 진심은 아니겠지?”
헤이른이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에게 맞장구를 칠 수는 없지 않은가.
“뭘 원하는지 말해라. 뭐든 내가 이루어 줄 테니. 비록 첩으로밖에 맞이하지 못한다고 하나, 그도 잠시다. 론슈카가 두각을 드러내면 그땐 부인의 자리를 줄 수도 있어.”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뭘 원하는지 말하라 하셨죠? 그럼 지금 말할게요. 다시는 헤이른 님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델은 말을 이었다.
“론슈카도, 저도 둘이서도 잘 살 수 있으니 그냥 모른 척 가 주세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처음으로 헤이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장신의 남자란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도 질 수 없어!’
아델은 여차하면 의자라도 휘두를 생각으로 화장대 가까이 이동했다.
“루카스가 너무 오냐오냐한 모양이군. 주제도 모르고.”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이 공포스러웠다.
“예의도 없어.”
“갓 약혼식을 마친 사람의 방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
물론 아델은 조금도 지지 않았다.
“건방지기도 하고.”
“그건 헤이른 님에게만 그런 거랍니다. 그게 싫으시면 나가 주세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전 저를 믿는답니다.”
아델은 마침내 의자를 손에 쥐었다. 다소 묵직하긴 했지만, 들어 올릴 만했다.
“그걸로 뭘 하려고?”
“더 가까이 오면 휘두르겠어요.”
“별 소용 없을 텐데.”
이어 손에 들고 있던 의자가 순식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델이 놀라 손을 놓자마자 의자는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위기의 상황이었다.
* * *
‘너무 과했나.’
가녀린 등을 보며 루카스는 그리 생각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 그럴 리가 있나.
마음이 없는 남자와의 입맞춤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미안한 일이군.’
루카스 본인 또한 첫 입맞춤이긴 했지만, 당장은 아델이 더 걱정되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나.’
처음에는 동정심으로 데려온 모자가 어느새 루카스의 선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그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몇 없었는데.
“루카스 님,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로님들은?”
“접대실로 안내했습니다.”
“좋아. 가 보도록 하지.”
루카스는 접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앉아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루카스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중년의 남자 이름은 센카. 프레데릭가의 방계 출신으로 루카스가 어렸을 적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센카.”
“저도 있습니다.”
그보다 나이 많은 남자의 이름은 기이. 이쪽은 직계로 전대 가주의 동생중 하나였다.
권력에는 욕심이 없는 탓에 장로가 되고 나서도 본가를 지탱하는 충신이었다.
한마디로 둘 다 루카스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란 소리였다.
“기이도 오랜만에 뵙는군요.”
“허허, 그러게요. 이 얼마 만입니까? 마지막으로 뵌 게 몇 년 전이지요?”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이의 말에 센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안부 인사는 이걸로 됐습니다. 그보다 용건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 말에 센카와 기이가 시선을 교환했다.
“루카스 님.”
먼저 입을 연 건 센카였다.
“이번에 약혼을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거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도착해 보니 진실이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진실입니까? 상대가 제대로 된 성도 없는 평민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도 진실입니다.”
“맙소사!”
기이가 고개를 내저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됩니다. 위대한 프레데릭가의 안주인이 평민이라니요! 저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기이 님, 일단 조금 진정하고 대화를 이어 봅시다.”
흥분한 기이를 센카가 달랬으나, 크게 소용이 없었다.
“적어도 백작가의 여식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수도에 가면 결혼을 원하는 영애들이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보잘것없는 평민입니까!”
기이의 심정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루카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가주가 되리란 기대를 받았었다.
비록 실제론 가주 생활을 얼마 하지도 않고 가문을 뛰쳐나왔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