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반갑습니다, 아델 양.”
그의 태도는 정중했다.
“저는 아스펜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소개를 할 때 일부러인지 성을 말하지 않았다. 평민인 아델을 배려하기 위함인 듯했다.
“오랜 친우의 약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왔는데, 덕분에 아름다운 분을 뵙게 되었군요. 앞으로 있을 나날에 축복이 깃들길 빕니다.”
아무래도 루카스가 호의적인 사람들 위주로 먼저 인사를 하게 한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아델을 배려하기 위함이리라.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은혜를 어떻게 전부 갚을 수 있을까.’
곤경에 처한 아델과 론슈카를 구해 주고, 머물게 해 주었다. 그로도 모자라 지켜 주고 있다.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아.’
어디 가서 사기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았다.
‘잘하자.’
그를 위해 오늘 완벽한 약혼녀를 연기해 내자.
자신의 인생에서는 론슈카가 첫 번째였지만, 이제는 루카스를 그다음으로 놓아도 될 것 같았다.
이후에도 인사는 순조로이 이어졌다.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해 준 루카스 덕분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사람까지 만나고 나니 긴장이 탁 풀렸다. 곧이어 본식이 이어지겠지만, 그래도 한고비를 넘어서니 안심이 되었다.
아델은 다음 드레스로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루카스 또한 예복을 바꿔 입고 나올 것이다.
세 번이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니 벌써 한숨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두 번째 드레스는 본식을 위한 것이라 갈아입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바꾸고, 화장과 머리 모양도 새로 하였다. 그러고 나니 딴사람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고 있던 마들렌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마들렌?”
“아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래요. 세상에나, 전 루카스 님이 평생 혼자 사실 줄 알았답니다.”
그러면서 기뻐하는데 괜히 찔렸다. 실상은 마들렌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그럼 나갈까요?”
기다란 드레스 자락을 시녀가 잡아 주었다. 그 상태로 사뿐사뿐 걸어 외부로 나갔다.
이번에는 루카스 대신 키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코트해 주기 위함이었다.
원래라면 아버지가 해야 하는 역할이었으나.
‘나에게 아버지는 없으니까.’
평생을 아버지 없이 살았고 어머니는 몸이 약해 언제나 말없이 누워계셨다.
그 때문에 아델은 무척이나 외로웠다. 어쩌면 그게 헤이른과 밤을 지낸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땐 사랑인 줄 알았지.’
아델은 작게 한숨지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남은 건 증오뿐이라 그때 가졌던 마음이 사랑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가시죠.”
아델은 키슈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화동이 아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여워!”
가봉된 옷을 입은 모습을 한번 보긴 했지만, 다시 봐도 귀여웠다. 평소와 달리 뒤로 넘긴 반듯한 앞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꼬마 신사들이네.”
웃으며 그리 말하자 심통 난 얼굴로 서 있던 론슈카가 아델에게로 돌진했다.
안기려는 것 같았지만, 그 전에 레온에게 저지당했다.
“안 돼. 드레스 구겨져.”
말투가 제법 단호하다.
그제야 버둥거리던 론슈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시녀가 건네주는 꽃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아델 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뿌리시면 됩니다.”
시녀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꽃잎 뿌리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어 홀의 문이 열리고, 아델의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던 시녀가 손을 놓았다.
아델은 키슈와 함께 바닥에 깔린 붉은 공단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평민이라면 상상도 못 할 씀씀이네.’
값비싼 공단을 바닥에 깔고, 그걸 밟고 가다니.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을 생각하니 심장이 조여 왔다.
‘그래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걷자. 지금은 그래야 하는 자리니까. 아델은 굳게 마음을 먹고 앞으로 나아갔다.
공단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루카스가 아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식의 시작이었다.
* * *
매튜는 그늘진 나무 아래에서 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길을 걸어 끝에 다다른 아델이 웃으며 루카스의 손을 잡았다.
이어 초빙된 신관이 정해진 내용을 읊는다. 더는 손을 써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었다.
‘케일라 님께서는 대체 왜 나를 혼자 보내신 걸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 상황을 보고 전달해 주는 것뿐이었다.
‘어째서.’
루카스는 왜 모든 걸 버리고 저런 여자를 택한 걸까. 매튜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약혼을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묻기는 하지만, 그냥 형식상 하는 절차일 뿐이다. 전부 약혼에 찬성하는 사람만 불러다 놨는데, 저기에 답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아니, 한 사람 있긴 했다.
자기 자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매튜 본인뿐이었다. 하지만 문득 바라본 루카스가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어서 그를 망설이게 했다.
“두 번째로 묻습니다. 약혼을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이번에도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신관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약혼을 반대하시는 분 계십니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 약혼식은 이대로 무사히 끝나려는 모양이었다.
매튜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정원 한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는 기대 있던 나무에서 튕기듯 몸을 떼어 내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화려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헤이른 드 웨더필드!’
누군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도에 머물면서 몇 번이나 봐 왔던 얼굴이니까.
그런데 그가 여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초대 손님?’
아니다. 그렇다기엔 분위기가 이상하다.
예기치 못한 소란에 신관은 약혼식의 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헤이른이 외쳤다.
“난 이 약혼을 반대한다.”
이게 무슨 일이지? 손님으로 초대된 귀족들은 당황한 얼굴로 헤이른과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의견은 필요 없다.”
루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절차를 무시하겠다고?”
그러나 헤이른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 명은 손꼽히는 검사, 다른 한 명은 손꼽히는 정령사.
가진 힘이 대단하니 그 여파가 보통이 아니다.
“난 정당한 요구를 할 뿐이다.”
“뭐가 정당하다는 거지? 민폐일 뿐이다.”
“정말 몰라서 묻나?”
헤이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아델, 그녀는 내 사람이다.”
그 말에 루카스의 옆에 서 있던 아델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부정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면서 한구석에 물러나 있던 화동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중에서 붉은 머리를 가진 화동이었다.
“론슈카는 내 아이이지 않나.”
정원에 모인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기가 막힌 사건에 귀를 기울이며 웃었고, 일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는 매튜도 있었다.
매튜는 론슈카를 바라보다가 이어 헤이른을 보았다. 확실히 둘은 지독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신관님, 무시하고 식을 진행해 주십시오.”
그사이 루카스는 신관을 재촉했다. 하지만 신관은 쉽사리 그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들을 필요 없습니다.”
“신관님이 말하는 걸 왜 멋대로 부정하지?”
거기에 헤이른이 끼어들었다. 이미 식은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 * *
아델은 치솟아 오르는 화를 내리눌렀다. 지금 화를 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다.
헤이른이 떠났기에,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여 약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그리고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다시 나타나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꽃다발은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헤이른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태연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뭘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새로운 손님이 나타났다.
“루카스 님.”
중년의 남자와 그보다 나이 든 남자 하나. 그 둘을 본 루카스의 표정이 변했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말도 존대로 바뀌었다. 쉽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란 소리였다.
“이런 중한 일이 있는데 와야지요.”
중년의 남자가 말하자, 다른 남자가 말을 받았다.
“루카스 님이 약혼을 하신다는데, 저희가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두 분을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늙은이들을 내쫓으시려고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만큼 알아서 물러나시리라 믿습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둘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어느새 아델에게 가까이 접근한 마들렌이 속삭이듯 말했다.
“프레데릭가의 장로님들이세요. 먼 지방에 계셨을 텐데 어떻게 기한 내에 도착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마들렌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