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아스펜이 물었다.
“재력가의 딸인가?”
“아니.”
“그럼 법률가의 딸인가?”
“그도 아냐.”
“그럼 대체 누구인가?”
아스펜의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그녀는 물질적인 건 가지고 있지 않아.”
재산이 없다는 소리였다.
“뒤를 받쳐 주는 가족도 없지.”
고아란 소리다.
“하지만 영리해. 새로운 걸 배우는 데 있어 망설임이 없고 빨라. 그리고.”
그때, 창문을 내다보던 루카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뭔가 싶어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니 한 여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갈색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여성은 아이 두 명과 정원을 걷고 있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가 제법 고급스러운 걸로 보아 저 여성이 아델일지도 모르겠다.
“따뜻하더군.”
의미를 모르겠다. 아스펜은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폈다.
“그리고?”
“뭐가 더 필요한가?”
루카스는 어느새 미소를 지우고 아스펜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필요하지, 필요해.’
록텐에게까지 초대장을 보낸 걸 보면, 제국 수도에도 약혼 소식을 퍼트리려 한 것이 분명하다.
소문이 퍼지고 모두가 아델이란 여성이 누군지 알게 되면 괴로워지는 건 그녀일 터.
루카스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린 걸 보면 뭔가 속셈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도통 모르겠다.
‘만나지 못한 세월이 너무 길었나.’
아스펜은 그리 생각했다.
“문제가 많이 생길 거야.”
“알고 있어. 내가 제대로 해야겠지.”
“그렇다 해도 상처받을 거야.”
“그도 알고 있어. 그래도 그녀는 강인한 사람이야.”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시무시한 곰을 막아섰다. 그로 인해 다쳤음에도 언제나 아이부터 걱정했다.
‘누군가와는 다르게.’
그렇기에 루카스는 괜찮으리라 믿었다.
“…자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아스펜은 양손을 들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준비를 해 뒀을 터였다.
더는 자신이 참견할 부분이 아니라 판단한 아스펜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데 아이가 둘이라니. 누구인가?”
“금발은 레온. 내 제자다.”
“그사이 제자도 들였군.”
“어쩌다 보니.”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루카스는 처절한 눈빛을 가진 어린아이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품고 있는 지독한 복수의 마음을 알면서도 데려오고 말았다.
원래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군.’
레온은 루카스에게 소중한 아이가 되었기에, 쉽게 떠나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붉은 머리 아이는?”
“아델의 아들이야.”
“아, 아들… 아들?!”
아스펜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들도 있어?”
“그래, 이제 일곱 살이지. 생일이 지난 지 얼마 안 됐거든. 레온과는 두 살 차이군.”
“나이에 비해 작군… 아니, 이게 아니라! 루카스, 제정신이야?”
“난 충분히 제정신이다만?”
평민인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까지 있다니. 게다가 아이가 일곱 살?
이렇게 되면 반드시 아델이란 여성을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순진한 친구를 넘겨 버린 요사스러운 여자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아이 아버지는 알고?”
“알지.”
“죽었겠지?”
“살아 있어.”
갈수록 이야기가 꼬인다. 심지어 아이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그럼 이혼녀라는 소리 아닌가.
“루카스, 약혼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는 거겠지?”
“물론이지.”
루카스는 태연히 대답했지만, 아스펜은 그럴 수 없었다.
비록 지금은 은거하고 있다지만, 조금도 모자란 게 없는 친구였다.
조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작위가 있고─소드마스터가 된 그에게 황제가 백작위를 내렸다─, 잘생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검술 또한 손꼽을 정도로 강하다.
황제 또한 그런 루카스를 총애하고 있어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복귀할 수 있다.
그런 완벽한 남자가 흠이 많은 여자와 약혼하겠다니.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루카스와 헤어져 방을 안내받은 아스펜은 짐을 풀자마자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작정 저택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아델의 위치를 사용인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진 않기로 했다.
수도에 있을 적에 루카스는 사용인을 철저하게 관리해 왔다. 그렇기에 사용인에게 무언가를 말하면 그 이야기는 반드시 루카스에게 들어갔다.
지금은 세월이 지나 조금 더 느슨해진 루카스였지만, 아스펜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혼자서 어떻게든 찾아볼 셈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정원을 돌아다니고 있자니 저 멀리 꽃밭 앞에 쪼그려 앉은 작은 아이 하나가 보였다.
붉은 머리를 보아하니, 아델이란 여자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흠흠.”
괜히 기침을 하며 접근하자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하게 반들거리는 빨간 눈동자가 어딘가 익숙하다. 하지만 그걸 어디서 봤는지는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안녕?”
아스펜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으나, 아이는 그대로 다시 돌아섰다. 그러고는 정성껏 꽃을 꺾기 시작했다.
“안녕?”
혹시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 말을 걸어 보아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며 서 있자니 다른 아이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쪽은 키가 제법 컸다.
“안녕, 레온이지?”
레온은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손님이신가요?”
“그래, 루카스의 친구이지. 내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어?”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괜히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 오래 사귄 친구인데 이야기 한번 없었다니.
‘매정한 녀석.’
속으로 루카스를 욕한 아스펜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어요.”
레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꽃다발?”
“만들어서 예쁘면 약혼식에 쓸 거예요. 그렇지, 론슈카?”
마들렌이 그렇게 말했기에 레온은 의욕에 가득 찬 상태였다. 그에 비해 론슈카는 내내 시무룩한 상태였다.
약혼을 허락하긴 했어도,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꽃을 꺾는 모양새가 무성의하다.
론슈카는 끝까지 레온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론슈카를 보며 아스펜은 생각했다.
‘내성적인 아이인가.’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차가운 느낌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아이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아스펜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러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내 이름은 헤이른 드 웨더필드. 위대한 웨더필드 가문의 정령사다.’
첫 만남부터 건방진 말을 늘어놓았던 꼬맹이. 론슈카는 그와 닮아 있었다.
‘아니, 아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이미 상황은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여기서 뭔가 더 있으리란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닮았는데?’
아스펜은 슬그머니 론슈카의 옆에 몸을 굽히고 앉았다. 커다란 덩치가 쭈그려 앉으니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론슈카, 나도 도와줄까?”
마음 같아서는 네 친부가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조금 더 친해진 뒤에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슬며시 접근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매정하다.
“필요 없어.”
“론슈카!”
레온이 반말을 내뱉는 론슈카의 이름을 불렀다.
“…필요 없어요.”
존대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론슈카는 지저분하게 뜯긴 꽃을 레온이 가져온 바구니에 담았다.
“꽃이 왜 이래? 예쁘게 뜯어야지. 아델 님이 드실 텐데.”
레온이 조곤조곤 이야기하자 론슈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꽃을 좀 더 조심스럽게 뜯는다. 그 옆에서 레온도 꽃을 뜯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스펜도 끼려고 했으나, 레온이 난처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꽃다발은 저희 힘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더 끼어들 수 있을까. 아스펜은 조금 떨어진 정원의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하늘에서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거기에 자그마하나 머리 두 개가 열심히 정원을 누빈다. 둘 다 귀엽게 생겨서 그런지 제법 눈이 즐겁다.
“걱정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저 멀리 커다란 대문을 통과하는 마차가 보였다. 두 번째 손님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스펜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도착한 손님은 몽펠 백작가의 록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화사한 금발의 청년이 과하게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 옆에는 무뚝뚝한 표정의 갈색 머리 청년이 있었는데, 장신에 단단한 몸을 보니 기사인 것 같았다.
‘아니, 잠깐.’
청년이 입고 있는 복장이 무척 익숙하다. 저건 프레데릭가에 소속된 기사단의 제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