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침대 위에 작은 상이 올려지고, 그 위에 음식을 늘어놓았다. 따끈한 단호박 수프, 신선한 샐러드. 빵에는 두 종류의 잼과 버터가 딸려 있었다.
마실 것은 우유와 홍차가 있었다.
“양이 좀 많은걸요?”
“론슈카 님도 같이 드실 것 같아서요.”
그래도 많았지만, 아델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호의로 한 행동이니까, 최대한 먹어 볼 셈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살포시 미소 짓자 마들렌이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화답한 뒤 방을 나갔다.
“론슈카.”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론슈카가 슬며시 눈을 떴다.
“엄마?”
“이제 아침이야. 식사는 하고 자자.”
“더 자도 돼?”
“안 될 건 뭐람?”
그 말에 론슈카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델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이거 엄마 먹어!”
론슈카는 잼과 버터를 치덕치덕 바른 빵을 아델에게 넘겨주었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든 아델은 론슈카의 빵에도 잼을 발라 주었다.
“맛있어!”
아델과 론슈카는 생각보다 많은 양을 먹어 치웠다. 서로서로 먹여 주다 보니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친 아델은 론슈카와 함께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러면 소화는 잘 안 되겠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델은 푹 자고 먹고를 반복했다. 중간에 의원에게 진료도 받았다.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는 건가?’
최근엔 무척 바빴기에 이런 여유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약혼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당사자가 다쳤으니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마들렌에게 슬쩍 물어보기도 했지만, 잘 진행되고 있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 아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멍은 그대로 있었지만, 내내 누워서 환자 취급받는 것도 심심했기에 일을 하기로 했다.
“이제 괜찮은가?”
“네, 움직일 만해요.”
루카스는 집무실로 찾아온 아델을 반겼다.
“더 쉬어도 되는데.”
“할 일이 많은걸요.”
그러면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잡는데 어디선가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웃은 건가?’
아델은 잽싸게 고개를 돌려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는 웃고 있었다. 뛰어난 미남이 웃고 있으니 눈이 호강하는 느낌이었다.
“씩씩해서 좋군. 그러면 다른 일도 이 기회에 해결하도록 하지.”
“무슨 일인데요?”
“사용인들의 처리다.”
“네?”
“그대가 잠든 사이 론슈카의 증언을 들었어. 라이아란 시녀가 계단에서 밀었다고 하더군.”
어느새 루카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엄격함이다. 그의 자안(紫眼)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였다.
“그래서 그 뒤로 다른 사용인들도 조사해 보았다. 아델,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어째서 말하지 않았지?”
아델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말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째서?”
“그야 진짜 약혼녀가 아니니까요. 나중에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분이 해야 할 일이에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리는 없다만.”
루카스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아델은 물러서지 않았다.
“세상에 절대란 건 없어요. 언제 그런 사람이 생길 줄 알고요.”
“…그렇군.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네?”
“아무것도. 그저 내가 그대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루카스가 아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앞으로는 좀 더 자신을 생각하면서 움직이도록 해. 미래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 약혼녀는 그대다. 그러니 그 권한을 적절하게 사용해.”
“그래도 되나요?”
“안 될 건 뭐람.”
루카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이제 문제를 일으킨 사용인들을 처리하러 가지.”
“보통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나요?”
“그 부분은 마들렌에게 들을 수 있을 것 같군.”
그는 곧장 마들렌을 불러들였다. 궁금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아델을 향해 마들렌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보통 귀족가에서 이런 일을 일으키면 채찍질을 하고, 돈을 주지 않은 채 쫒아냅니다. 추천장에 나쁜 평가를 적는 건 물론이고요.”
“채찍질까지요?”
“물론 좀 더 온건한 방법도 있습니다. 채찍질이 싫으시면 그냥 쫓아내셔도 됩니다.”
평소 루카스를 보며 귀족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제법 가깝게 지냈는데, 그건 그가 아델이 그동안 배워 온 귀족과는 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채찍질에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는 걸 보면 놀랍다.
“그냥 내쫓는 걸로 하죠. 어차피 추천장의 평가가 나쁘면 다른 귀족가에는 취직이 어렵잖아요.”
“네, 비슷한 가문으로 옮겨 가기엔 힘들죠. 하지만 가끔 고위 귀족 가문에서 일했던 시녀를 원하는 곳도 있긴 합니다.”
물론 그런 곳은 대우가 더 열악하다. 그렇다 해도 일할 수 있는 게 어디란 말인가.
지금 마들렌은 그들이 다시 귀족가에서 일하게 되어도 괜찮은지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아직 채찍질을 명령하는 건 무리였다. 무엇보다 이 자리는 임시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라이아의 경우엔 사람을, 그것도 아델 님을 해하려 했으니 좀 더 엄중한 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가까운 도시의 경비대에 넘기기로 하죠.”
경비대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아들여 벌하기도 하니 적절할 것 같았다.
“네, 귀족가의 사람을 건드리려고 했다는 걸 확실히 알리고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마들렌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전 아직 평민인데요?”
“곧 루카스 님과 약혼하실 거잖아요? 그러니 귀족가의 사람이신 셈이죠.”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라이아는 더 불쌍한 처지가 되었지만, 동정은 가지 않았다. 아직 그녀로 인해 다친 멍이 남아 있는데, 용서해 주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남은 사용인들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일손이 부족할 것 같아서요.”
“이미 사람을 구하는 중이랍니다. 최대한 빨리 새로운 사용인으로 저택을 채울 생각이에요.”
그러더니 슬쩍 아델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덧붙였다.
“새로운 사용인은 아델 님이 골라 주세요.”
“제가요?”
“네, 그리고 앞으로는 아랫사람에게 말을 높이지 마세요.”
그 말에 아델은 어색하게 웃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살아왔던 전생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연장자에게 말을 편히 하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내 이렇게 지낼 수도 없는 건 사실이었다.
“노력해 볼게요.”
당장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사용인의 정보를 확인하고 면접 날짜를 잡는 건 마들렌이 해 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아델이 해야 했다.
아무래도 마들렌은 아델이 저택의 시녀들을 휘어잡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는 가짜인데.’
그래도 여기 머무는 동안은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거겠지. 아델은 최선을 다해 새로운 시녀의 선별 작업에 들어갔다.
결정권자가 되어 사람을 뽑는 일은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그도 금방 익숙해졌다.
그렇게 비어 버린 자리는 서서히 채워져 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델은 말을 편히 하는 법도 배워 나갔다.
“아델 님! 오늘은 화동 의상이 도착했어요.”
식장에서 꽃을 뿌려 줄 화동은 레온과 론슈카가 맡기로 하였다.
약혼식 드레스를 맞춘 곳에서 같이 제작한 화동의 의상은 얼핏 보기엔 성가대 의상을 연상시켰다.
깔끔한 하얀 셔츠에 베스트. 살짝 풍성하게 제작된 바지는 무릎까지 왔다. 거기에 양말과 구두까지 신기고 나니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케이프까지 착용하면?”
아델은 복장을 전부 갖춰 입은 론슈카와 레온을 보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론슈카, 귀여워!”
그러자 론슈카가 뽐내듯 가슴을 내밀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델은 정신없이 박수를 치며 칭찬을 퍼부었다.
“저는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온이 수줍은 표정으로 물어 왔다.
“레온도 잘 어울려! 멋져!”
아델이 그리 말하자 레온도 슬그머니 한 바퀴 돌아 보인다.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아델은 결국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론슈카와 레온을 와락 끌어안았다. 부끄러운지 꼼지락거리면서도 그녀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론슈카도 레온도 모두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내자!’
아델은 굳게 다짐했다.
* * *
귀족가의 귀부인들은 주기적으로 모여 티타임을 가진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가진 차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기도 하고, 새로운 유행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교계의 뒷이야기가 은밀하게 나도는 곳도 이곳이다.
“그 이야기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요?”
“그 프레데릭가의.”
“프레데릭가의?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이참, 아직도 그 소식을 모르시는군요.”
처음 이야기를 꺼낸 귀부인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때로는 정보가 권력이 되기도 한다.
“무슨 소식인데요? 말해 보세요.”
귀부인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인데요.”
아니다. 이미 다른 곳에도 이리저리 이야기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