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약혼. 결혼을 약속하고 미리 진행하는 행사.
전생에서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촌 언니의 결혼식에 가 본 적이 있었으니까!
약혼은 결혼식의 축소 버전이니까 좀 더 쉽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지.’
아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목을 바라보며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 그녀는 약혼식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보낼 초대장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가문에 따라서는 전문적으로 대필하는 사람을 두기도 한다지만, 여기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 탓에 아델과 루카스 둘이 반반 나눠서 초대장을 작성해야 했다.
고개를 젖히며 손목을 주물럭거리고 있자니, 루카스가 다가와 아델이 써 둔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글씨가 수려하고 아름답군.”
글씨를 칭찬하는 건데도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아델은 어색한 태도로 칭찬을 받아들였다.
“아직 루카스 님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는걸요.”
“이미 따라잡은 것 같다만.”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 치지. 남은 초대장은 몇 장이지?”
“열두 장이요.”
아델은 질린 표정으로 쌓여 있는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건 내가 마저 할 테니, 그대는 이만 가서 쉬도록 해.”
“감사합니다!”
냉큼 감사 인사를 하고 일어섰으나,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바로 마들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델 님!”
예전과는 다르게 높여 부르는 모습이 낯설다. 하지만 이도 익숙해져야 하는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얼른 움직이자고요. 아직 할 일이 많아요!”
마들렌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약혼식은 진짜, 정말로 할 일이 엄청 많았다.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는데, 그 사람이 본인이었다.
예절과 예식 절차는 따로 초빙해 온 선생님께 배웠고, 이후에는 예식장을 꾸미기 위해 마들렌과 머리를 맞댔다.
레이스는 어떤 모양이 좋은지, 리본은 어느 색으로 할지, 거기에 어울리는 꽃과 초는 어떤 게 좋을지. 끝없이 이어지는 선택지에 점점 지쳐 갔다.
‘그래도 힘든 게 나 혼자는 아니니까.’
루카스도 같이 갈리고 있으니 불평도 할 수 없었다.
“오늘은 재봉사가 들를 거예요. 사실 더 뛰어난 사람을 부르고 싶었는데, 여기서는 이 사람이 한계더라고요.”
마들렌은 무척 아쉬워하며 수도에서 유명한 재봉사의 이름을 몇몇 댔다. 물론 아델은 모르는 이름이었다.
“지금은 여기 없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외워 두시는 게 좋아요. 결혼식은 어쩌면 수도에서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끝없이 정보를 늘어놓았다.
‘결혼까지 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약혼만으로도 민폐인데, 결혼은 무리였다. 루카스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책에 그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가?’
현실에서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소설 속에서는 그저 스쳐 가듯 몇 줄로 표현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생각나는 게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아델은 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바쁜 일정에 몸을 내맡겼다.
* * *
섬세한 손가락이 활줄을 잡아당기고 활대에서 화살이 발사되었다. 활은 목표하고 있던 사슴의 목덜미에 박히고 나서야 멈췄다.
“수거!”
활을 든 장신의 남자가 물러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가 사냥감을 거둬들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이 정도면 되었다. 그리 생각한 남자는 철수를 명령했다. 그렇게 사냥감을 챙긴 채 저택에 돌아오니 입구에서 집사가 그를 맞이했다.
“아스펜 님, 오늘 사냥은 즐거우셨습니까?”
“평소랑 비슷하지.”
지루하단 소리였다.
“그러면 이번에 록텐 님이 주최하시는 교류회에 나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검을 제법 쓰는 사람들이 여럿 모인다고 합니다.”
“검을 제법 쓴다고?”
남자, 아스펜은 코웃음 치며 푸른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검을 쓰는 거라니, 조상님이 통탄하실 일이군.”
“아스펜 님.”
“알아,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거. 하지만 내 저택에서도 그러지 못하면 답답해서 살겠나.”
아스펜은 그리 말하며 외투를 벗어 세바스찬에게 건넸다.
“루카스가 수도에 있을 때가 재밌었는데.”
뛰어난 실력을 지닌 루카스는 훌륭한 대련 상대였다. 싸우면 백의 아흔아홉 번을 지긴 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존재였다.
언젠가는 뛰어넘을 거라고 필사적으로 훈련에 매진했건만. 그가 닿기 전, 상대가 먼저 무너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루카스 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오셨습니다.”
“어쩐 일로?”
제국 수도를 떠나 외국에 칩거한지도 벌써 수년째. 이쪽은 거들떠도 안 보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인가.
아스펜은 세바스찬이 내미는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잠깐, 이거?”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보내는 초대장이었다. 그 경사란 주로 약혼, 결혼, 아이의 탄생이었다.
아스펜은 다급히 초대장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친우가 약혼을 한단다.
아스펜은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인가 의심하며 몇 번이나 초대장을 뒤집어 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이거 루카스의 글씨도 아닌데.”
아무래도 약혼 상대인 여성의 글씨인 모양이었다. 제법 괜찮은 가문의 여성인지 필체가 상당히 어여쁘다.
“당장 일정을 비워야겠군!”
이제 와 약혼 소식을 전하는 야속한 녀석이라도, 친구는 친구다.
아스펜은 친구의 약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일정을 조절했다.
* * *
약혼식 준비로 바쁘게 지나가는 와중에도, 그날은 왔다. 론슈카와 루카스의 결투 날 말이다.
론슈카는 아침부터 의욕적으로 굴었다. 음식도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가벼운 체조를 하였다.
“이기고 올게요!”
“그래, 그런데 정말 엄마랑 가지 않아도 되겠니?”
아델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론슈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둘이서만 결투하기로 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론슈카는 씩씩하게 방을 나섰다. 미리 론슈카를 기다리며 장갑을 조이던 루카스가 아델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 모습이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여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괜찮겠지?’
이제야 정령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는데, 폭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델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초조하게 보냈다.
“괜찮을 거예요.”
옆에서 차를 마시던 레온이 그런 아델을 위로해 주었다.
“스승님은 실력이 뛰어나셔서 상대가 다치지 않게 싸우는 법도 잘 아세요. 저도 몇 차례나 대련을 해 봤었는걸요.”
“그럼 다행이지만.”
아델은 나온 차를 마시지도 못한 채 론슈카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를 무렵, 론슈카와 루카스가 돌아왔다.
레온의 말대로 론슈카는 조금도 다친 곳이 없었다. 그저 입술만 삐죽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약속대로.”
허리를 숙여 시선을 낮춘 루카스가 론슈카에게 그리 말하자 론슈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그러더니 루카스랑 새끼손가락을 거는 게 아닌가. 이 세계에서도 새끼손가락을 거는 건 약속을 지키겠단 의미였다.
이후 론슈카는 아델에게 달려와 폭 안겼다. 둘 사이에 모종의 말이 오간 모양인데 론슈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물어보면 답해 줄 것 같긴 했지만, 아델은 묻지 않기로 했다. 모처럼 다른 사람과 한 약속이니까, 잘 지켜 주길 바랐다.
“약혼해도 엄마는 내 엄마인걸.”
“그래, 맞아.”
아델은 그런 론슈카가 기특해서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리고 레몬을 넣은 파운드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제법 크게 만들었는데, 론슈카는 절반을 혼자 먹어 치웠다.
* * *
미친 듯이 바쁜 나날이 지나갔다. 약혼식이 가까워질수록 열심히 노력했던 결과물 또한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어떠십니까?”
아델은 생전 처음 입어 보는 드레스에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전부 세 종류 준비했습니다. 식전 드레스, 본식 때 입을 드레스, 식후 입을 드레스.”
첫 번째 드레스는 산뜻한 연노란색의 드레스로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길이였다. 드레스 중간중간에 드레이프를 잡고 진주로 장식한 모양새가 마치 봄의 꽃 같았다.
첫 번째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마들렌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려요!”
“그런가요?”
“그럼요. 마치 요정 같아요!”
작은 마을에서 아델은 제일 예쁜 소녀였다. 그랬기에 그 마을을 지나가던 헤이른이 그녀를 택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어떨까? 당장 근처 도시로만 가도 아델보다 어여쁜 여성이 여럿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정이라니.’
칭찬이 너무 과한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들어가도 되나?”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의 목소리였다.
“그럼요! 얼른 들어와서 보세요, 루카스 님.”
마들렌이 호들갑을 떨며 문을 열었다.
“왜 불렀나 했더니.”
그리 말하며 루카스가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