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이제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상황도 엿볼 수 있다. 불꽃에 눈이 생겼단 이야기였다.
또렷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복도가 보였다.
“레온, 론슈카는 어땠니?”
“화가 난 모양이에요. 이야기는 해 봤는데 풀린 것 같지 않아요.”
그 말에 아델이 작게 한숨지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 마친 것 같은데.”
“제가 먹을 걸 가져다줄까요?”
“그래?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아니에요.”
레온이 웃으며 답했다.
“정말 고마워. 그런데 레온은 괜찮아?”
“뭐가요?”
“나랑 루카스 님이 약혼하는 거 말이야.”
“저는 좋아요! 두 분 다 좋아하는걸요. 좋아하는 두 사람이 약혼하는데 왜 싫어해요.”
“레온은 어른스럽구나.”
아델은 그런 레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론슈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절로 질투가 일었다.
‘내 엄마인데!’
평소라면 득달같이 달려가 떼어 놓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론슈카는 불꽃을 거둬들이고는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 네 번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레온이 음식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거절해 주마, 그리 생각한 론슈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들어오지 마!”
“론슈카?”
“안 먹어! 문 열지 마!”
마구 신경질을 내니 레온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중간중간 계속 노크 소리와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론슈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끼를 굶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예전에 이 마을 저 마을을 옮겨 다니며 살 때는 제대로 먹질 못했다. 너무 배고파서 풀을 뜯어 먹고 배가 아파 뒹굴기도 했다.
아델은 그래도 최소한 론슈카를 굶기지는 않으려 했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두 모자는 굶은 적이 많았다.
그에 비해 지금은 훨씬 나았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준 사람은 루카스였다.
안다. 알지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굴토끼처럼 버티고 있자, 결국엔 아델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론슈카, 식사는 해야지.”
아델은 수프가 담긴 접시를 들고 론슈카를 설득하려 들었다.
“이거만 먹자, 응?”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풍기자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배가 고팠다. 먹고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안 들리는 척하며 엄마의 말을 무시했다.
“론슈카.”
아델의 손이 론슈카에게 닿아 왔다.
“싫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뿌리쳤다. 그 때문에 균형을 잃은 아델의 손에서 수프 접시가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아델이 접시를 잡아채려 했지만, 놓쳐 버렸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수프 접시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실수했다.’
론슈카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엄마가 화를 내면 어쩌지? 나를 미워하면? 사랑해 주지 않으면?
이불을 붙잡고 있는 손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엄마가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쩌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아델은 바닥에 떨어진 수프 접시를 한 번, 론슈카를 한 번 바라보았다.
번데기처럼 이불을 둘둘 감싸고 있는 모습이 아이다워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안다. 론슈카의 세계는 이제 막 넓어지는 중이고, 아이에게 제일 소중한 존재는 엄마인 자신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론슈카.”
손을 뻗어 돌돌 뭉쳐진 이불 번데기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이불 속에 있는 론슈카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괜찮아, 엄마 화 안 났어.”
그렇게 말하자 론슈카가 되묻는다.
“정말?”
“그래, 실수잖아. 그보다 론슈카, 귀여운 얼굴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얼굴을 보여 주지 않겠니?”
그제야 꾸물거리며 이불을 벗어 낸다. 이불 속에서 버티느라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얼굴은 새빨갛다.
그 모습이 빨간 성게 같아서, 아델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대신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를 쓱쓱 빗어 내렸다.
론슈카는 그 손길에 얌전히 머리를 내맡겼다.
“론슈카는 엄마가 약혼하는 게 싫어?”
“응.”
“왜 싫을까?”
“…뺏기는 기분이 들어.”
아이다운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렇구나.”
“엄마는 내가 제일 좋아, 아니면 스승님이 좋아?”
“그야 론슈카지.”
“그럼 약혼 안 하면 안 돼?”
“음, 그건 조금 힘들어.”
애초에 약혼하려는 이유를 생각하면, 론슈카의 말대로 해 주기는 어려웠다.
아델이 난감한 얼굴로 웃자 론슈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걸 손을 뻗어 못 하게 하자, 이번에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싫어!”
어리광 부리고, 떼를 쓰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웠다. 그러지 못했던 론슈카의 과거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어쩌지.’
기꺼운 것과 별개로 론슈카를 설득해 내야 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열린 문 사이로 새로운 사람이 난입해 왔다.
루카스였다.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어린양처럼 훌쩍이던 론슈카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사납게 눈을 치떴다.
“수프를 엎었군.”
“실수였어요. 그렇지, 론슈카?”
론슈카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감싸 주는 건 좋지 않아.”
그리 말한 루카스는 시녀를 불러 깨진 접시를 치우라 일렀다. 그러고는 론슈카를 불렀다.
“론슈카.”
이번에도 론슈카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카스도 이런 상황은 겪어 본 적이 없는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완벽해 보이는 이 사람에게도 약한 부분이 있구나.’
아델은 그런 루카스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러나 루카스가 입을 열긴 전, 론슈카가 선수를 쳤다. 아이가 분에 가득 찬 얼굴로 제 스승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투하자!”
“론슈카?”
갑자기 웬 결투? 아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니, 결투는 둘째 치고 스승님한테는 존댓말을 써야지.”
“지금은 스승님 아니야!”
“그럼?”
“내 적이야!”
어떻게 그리로 사고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짚이는 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론슈카는 글자를 배우면서 아델을 따라 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배워야 할 것이 담긴 동화책이었지만,
“요새 보는 책들이 죄다 모험담이더니. 왜, 마왕이랑 용사는 안 나오던?”
“론슈카, 루카스 님은 적이 아냐.”
아델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내리누르며 열심히 설득해 보았으나 론슈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루카스는 한술 더 떴다.
“좋아, 결투를 하도록 하지. 거기에는 뭘 걸 셈이지?”
“약혼!”
“종목은?”
그제야 론슈카는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거기까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투는 싸우는 거 아냐?”
“맞다. 하지만 머리로 싸우느냐, 몸으로 싸우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그럼 몸! 난 정령술로 싸울 거야.”
‘그거 아냐, 론슈카.’
아델은 론슈카를 말리려고 했다. 상대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사다. 꼬꼬마인 론슈카는 그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소리였다.
“론슈카, 엄마는 네 뜻을 존중하지만 이번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선의가 말이 되어 흘러나왔다. 하지만 론슈카는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차게 고개를 내젓는다.
“아냐, 어떻게든 이길 거야!”
“그래, 그렇다면 일단 뭐라도 먹는 게 좋지 않나. 설마 식사도 하지 않고 나를 이겨 낼 셈은 아니겠지?”
루카스가 론슈카를 도발했다!
“엄마, 배고파.”
론슈카는 활활 불타는 눈으로 식사를 요구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렇게 먹으라고 할 때는 안 먹다가 이제야 이러다니.
손이 근질근질했다. 손을 뻗어 저 귀여운 작은 코를 꼭 잡고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럼 새빨개진 코로 울상을 짓겠지.
‘참자.’
이제 와서 다시 론슈카의 기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게 바로 엄마의 심정인 걸까?
마침 시녀가 수프와 부드러운 흰 빵, 그리고 신선한 주스를 새로 가져다줬다. 론슈카는 그걸 무려 두 번이나 먹어 치웠다.
“스승님과 결투하기로 했다고?”
결투 소식을 들은 레온이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대체 왜?”
도대체 어쩌다가 결투까지 간 것인지 레온이 궁금해했지만, 론슈카는 더 이상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넓은 연무장을 열심히 뛰어다닐 뿐이었다.
“이기기 힘들 텐데.”
루카스는 론슈카 앞에서는 대놓고 실력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곰을 잡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론슈카도 정신이 없었고 이후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는 기초 체력을 쌓는 훈련만 줄곧 시켰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은 무척 강해.”
“알아, 어른이니까 강하겠지.”
“그런데 어떻게 이기려고?”
“어떻게든!”
론슈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다른 걸로 결투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레온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며 말했다. 하지만 론슈카는 이미 다음 바퀴를 뛰기 위해 출발한 상태였다.
“으음…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레온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열심히 달리고 있는 론슈카에게 건네줄 물병을 챙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