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론슈카와 레온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혹시 모르니 최대한 조심할 생각이었는데,
“사실?”
론슈카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눈을 깜박이다가 갑자기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론슈카? 론슈카!”
당황한 아델이 론슈카의 뒤를 따랐다.
“스승님?”
그사이 다시 입을 다물고, 음식을 다 먹어 치운 레온이 루카스에게 물었다.
“정말인가요?”
“내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더냐?”
“그건 아니지요. 그보다 아델 님을 도우러 가지 않아도 되나요?”
레온은 론슈카보다는 좀 더 빠르게 납득했다. 언제나 여자를 돌보듯 하던 스승님이 이상하게 아델 님한테는 관심을 보이더라니. 이렇게 될 일이었나 보다.
‘아니, 하지만 론슈카의 아빠는 다른 사람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스승님은 언제나 레온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원래 남자와 여자는 만났다가도 헤어진다고 했으니까.’
시녀들이 수다 떨던 걸 생각하며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그보다 키슈, 괜찮아요?”
“세, 세, 세상에!”
키슈가 허리를 부여잡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카스 님이 약혼이라고요?”
“저희가 맞게 들은 건가요?”
거기에 마들렌까지 합세했다. 그들에게 아델이 평민에 미혼모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루카스는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신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셨어요.”
“루카스 님이 여자와 교제를 하다니!”
키슈는 어디선가 꺼낸 손수건으로 찔끔찔끔 나오는 눈물을 찍어 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비슷한 태도로 눈가를 찍어 내고 있던 마들렌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약혼이라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도 빠듯해요. 그래서 언제쯤 하실 생각이신가요? 꽃피는 봄? 아니면 단풍 지는 가을? 여름과 겨울도 있지만 그때는 조금 아니죠.”
마들렌은 끝도 없이 떠들어 댔다.
“너무 덥고 추우니까요. 하지만 초록의 신부나, 눈의 신부도 멋질 것 같네요!”
약혼으로 시작해 어느새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다.
“일단은 최대한 빠르게 하고 싶은데.”
“어느 정도요?”
“한 달.”
“아아, 안 돼요! 무리예요!”
마들렌이 고개를 흔들며 손을 내저었다.
“당장 주문해야 하는 것도 한두 개가 아니고요. 약혼식 드레스랑 예복도 맞춰야 해요. 그뿐인가요? 프레데릭가에도 알려야죠!”
흥분해서 말을 내뱉는 마들렌의 옆구리를 키슈가 쿡 찔렀다.
실수했다. 마들렌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현재 루카스와 프레데릭가─루카스가 태어난 곳─의 관계는 가히 좋지 않았다.
혹시라도 소중한 도련님의 상처를 들쑤셨을까 봐,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거창하게 할 계획은 없어. 아는 사람만 몇 불러서 소소하게 할 생각이다.”
“그런 것도 나쁘진 않지요. 하지만 소수를 부르더라도 격식은 지켜야 합니다.”
소심해진 마들렌 대신 키슈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건 그렇겠지.”
아는 사람을 몇 부르는 정도라도 준비는 철저해야 했다. 사교계만큼 뒷이야기가 잘 도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초대 명단이 있습니까?”
상대에게도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초대장은 최대한 빠르게 돌리는 편이 나았다.
“있다.”
그리 말한 루카스는 몇몇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중에는 친하다 할 수 있는 지인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몽펠 백작 영식도 부르도록.”
“몽펠 백작가의 그분이요?”
풀 죽어 있던 마들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몽펠 백작가의 장남, 록텐.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해 호기심이 왕성하여 사건이 생기는 자리마다 찾아다니는 이였다.
그뿐이랴. 그 사건을 다른 곳에 퍼트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자였다.
만약에 백작가의 영식이 아니었으면 이미 큰일이 나도 여러 번 났을 것이다. 그런 록텐을 부르자니.
“그래, 필요에 의한 일이다.”
정말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구나. 마들렌은 허리를 똑바로 세우며 단단히 기합을 넣었다.
* * *
방으로 뛰어 들어간 론슈카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덮어쓰고 엎드렸다.
똑똑.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두드렸는지는 알지만, 지금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엄마만 있으면 되는데, 엄마는 아닌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약혼 이야기를 꺼냈을 리 없었다.
로잘린이 그랬다. 약혼은 결혼 전에 하는 거라고. 그리고 결혼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맺어지는 거라고 했었다.
‘난 엄마만 있으면 되는데.’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나왔다.
물론 그의 스승인 루카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나쁜 사람은 예전 마을 사람들이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구박하고,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
루카스는 단 한 번도 론슈카에게 그런 적이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나한테서 엄마를 뺏어 가려고 하잖아!’
그럼 나쁜 사람인 걸까?
똑똑, 하고 재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론슈카, 엄마랑 잠시 이야기할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해 보는 반항이었다.
“론슈카.”
계속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슴이 아팠다.
엄마는 론슈카를 사랑한다. 론슈카도 엄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론슈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다시 움츠러들게 되었다.
“언제든 괜찮아지면 그때는 문을 열어 줘. 엄마는 론슈카랑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밖은 조용해졌다. 엄마가 가 버린 걸까? 더욱더 서러워졌다.
그러고 얼마가 지났을까?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엄마가 아닌 레온이었다.
“론슈카, 괜찮으면 잠시 이야기할래?”
론슈카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어쩌면 레온도 자신처럼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론슈카에게 엄마가 전부이듯이 그에게는 스승인 루카스가 전부였으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돼? 답 없으면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문이 열렸다.
“론슈카.”
안으로 들어온 레온이 론슈카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론슈카는 이불을 걷어 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울었어?”
볼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본 레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 울었어!”
감정이 제어되질 않는다. 그래도 론슈카는 그걸 그대로 풀어놓았다. 오늘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예전에야 이러면 불꽃이 날뛰는 바람에 큰일이었지만, 이제 이 정도는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러니 괜찮다.
레온은 어색하게 웃으며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론슈카는 아델 님과 스승님이 약혼하는 게 싫어?”
“싫어!”
“왜?”
“엄마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아냐, 그게 아냐.”
뭐가 아니라는지 모르겠다. 론슈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레온을 쳐다보았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랑은 여러 형태가 있다고 했어.”
“여러 형태?”
“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연인 사이의 사랑, 그런 거 말이야. 아델 님은 여전히 론슈카를 가장 사랑하실 거야. 하지만 말이야.”
레온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델 님도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라.”
“내가 사랑해 주는데?”
“론슈카는 아델 님의 아이잖아. 내가 말하는 건 연인이야.”
“몰라,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그래, 복잡하지. 나도 어려워.”
그런데도 레온은 론슈카를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짜냈다.
“넌 화나지 않아?”
“왜 화가 나는데?”
“스승님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는 거잖아.”
“난 괜찮아. 스승님도 아델 님도 좋아하는걸. 두 분이서 결혼한다고 해도 여전히 날 사랑하고 존중해 주실 걸 아니까. 사랑은 나눈다고 줄어드는 게 아냐. 난 그렇게 배웠어.”
“줄어드는 게 아니라고?”
“그래, 오히려 더 늘어날지도 몰라!”
레온이 손으로 늘어나는 표현을 했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싫은 걸 어쩌란 말인가.
론슈카는 꾸물거리다 다시 이불을 덮어썼다.
“론슈카?”
“이제 됐어. 나가.”
레온의 설득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론슈카의 마음을 흔들긴 했으니,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레온은 론슈카에게 슬쩍 문밖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아델 님은 여전히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
그 말을 끝으로 레온은 방을 나갔다.
레온이 방을 나가자마자 론슈카는 다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문밖에 작은 불꽃을 불러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키지 않게 천장에 바짝 붙으라고 이야기했다. 불꽃은 론슈카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불꽃을 이용해 다른 곳의 이야기를 듣는 법은 헤이른이 가르쳐 주었다. 그가 가볍게 가르쳐 준 것을 론슈카는 열심히 갈고닦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