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루카스가 물었다.
“누가 나를 곤란하게 한다는 거지?”
“그야,”
수많은 사람이 비난할 것이다. 루카스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고 말할 것이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관심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내 울타리 안의 사람뿐이야.”
“저도 그 울타리 안인가요?”
아델의 물음에 루카스가 눈을 둥그렇게 휘며 웃었다. 그가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보았다.
“그래. 아델, 그대도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야.”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다. 루카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가라앉은 것이다.
이후에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렇게 남을 배려해주는 착한 사람에게 자신은 어떻게 하려고 했던가.
그가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곁을 떠나려 했다. 아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루카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으니 안심하고 나를 따라와 줘.”
하마터면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래도 약혼은 아니지!’
아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루카스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약혼은 정말 아니었다.
“뜻은 감사해요. 하지만 그래도 약혼은 아니에요.”
“왜?”
“아시잖아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설명해야 할 모양이었다. 아델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저는 평민에 아이가 있어요. 루카스 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남들 눈에는 나쁘게 보일 테죠. 평판이 떨어지실 거예요.”
“그리고?”
“그러고요?”
이렇게 말해도 통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델은 머리를 굴렸다. 좀 더 자극적인 말을 뱉으면 루카스를 설득할 수 있을까.
“루카스 님의 가족이 싫어하실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을 못했나.’
아델은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씁쓸한 차를 한 모금 머금고 나니 조금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레온. 레온도 생각하셔야죠.”
“레온이 신분으로 누군가를 차별할 아이가 아닌 걸 알잖아.”
맞다. 레온, 그 착한 아이라면 진심으로 웃으며 축복해 줄 게 분명하다.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다급하면 여러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 그보다 또 다른 이유는 더 없나?”
신분이 천하고 아이가 있다. 그것만으로는 루카스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좋아. 더 생각나는 이유는 없는 것 같으니 다음 단계를 생각해 보자고.”
“네?”
“약혼식은 언제가 좋겠어?”
이 남자, 한번 하고자 하니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다. 어떻게든 그걸 말리고자 근본적인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나중에 사랑하는 분이 생기면요? 그때는 어쩌시려고요.”
사랑은 지나치게 변덕스럽다. 고작 하루의 시간으로도 상대에게 빠져들게 될 수 있다. 아델 또한 그러했다.
“지금까지 생기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길까?”
“생겨요!”
품성 좋지, 잘생겼지, 돈도 많지, 능력도 좋지.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그러고 보니 이제 죽을 위험은 없지 않나?’
루카스를 죽이는 건 론슈카다. 하지만 아델은 론슈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루카스 또한 죽지 않을 터였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론슈카만 제대로 키우면 돼.’
그러면 만사형통이다.
“단호하군. 하지만 나는 생기지 않는다는 쪽에 걸겠어.”
“왜요?”
“사랑은 끔찍한 것이니까.”
그가 어째서 사랑을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책에서는 그런 이야기까진 나오지 않았으니까.
루카스는 주인공의 스승이자, 그를 각성시킬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만 받아들여.”
“…그렇다면 한 가지 약속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는 꼭 제게 직접 말해 주세요.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
“생기지 않을 거라니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니까요. 이야기만 해 주시면 그때는 알아서 떠날게요.”
“좋아. 그러기로 하지.”
루카스는 아델이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럼 이제 우리의 약혼에 대해 같이 의논할 수 있겠군.”
“네.”
아델은 힘차게 대답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이 위기를 제대로 넘길 생각이었다.
* * *
“약혼? 약혼이라고?”
헤이른은 이를 으득 갈았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 불쾌한 감정을 어딘가 뱉어 내고 싶은데, 그러자면 품위를 망친다.
그렇기에 애써 분노를 삼키고 있는데, 로잘린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버지. 정말, 정말로 론슈카가 저랑 남매인가요?”
가슴 앞에서 꼭 모은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로잘린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받고자 했다. 그러지 않으면 몸을 잠식하는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잘못 들은 걸지도 몰라.’
모든 게 오해일지도 몰라.
“그게 궁금한가?”
“네? …네.”
“그래, 그렇다면 알려 줘야겠지. 론슈카는 너와 똑같다. 내 핏줄을 이었지.”
“그, 그럼.”
손처럼 목소리도 떨려 왔다.
“로잘린, 왜 그러느냐. 너로서는 기뻐해야 할 일 아니던가? 무능력한 네 대신 뛰어난 론슈카가 들어온다면 더는 지금처럼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이제는 입술마저 떨려 왔다. 지금까지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정령술을 배우는 건 즐거웠다.
“그래, 그냥 얌전히 인형처럼 꾸미고 파티에 다니면 된단다. 친구를 가지고 싶다고 했었지? 거기서 친구도 사귀면 되겠구나.”
짐짓 상냥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이 모든 건 헤이른의 화풀이에 불과했다.
“저, 저는 정령술을 공부하는 게 싫지 않아요. 저는 정령술을 좋아해요, 아버지.”
용기 내서 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답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없잖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로잘린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여행을 떠나올 때, 아버지가 같이 가자고 해 줘서 기뻤다. 훈련의 일환이라는 걸 알아도 좋아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는데.’
그 모든 것이 부서져 내렸다.
로잘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그녀를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헤이른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다음 날, 헤이른은 예정대로 루카스의 저택을 떠났다. 새벽같이 떠난 탓에 로잘린과는 헤어짐의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 탓에 레온이 시무룩해하긴 했지만, 그도 잠시였다. 왜냐하면 더 굉장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아델 님과 스승님이요?”
“그래, 약혼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나온 충격적인 소식에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들렌은 주스를 따르다 흘렸으며, 키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레온은 파란 눈을 크게 뜨고, 입에 넣은 음식을 채 씹지도 못한 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나름 충격을 표현해 냈지만, 그 누구도 론슈카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거짓말!”
론슈카는 식탁을 치며 일어나 외쳤다.
“진짜다.”
“거짓말, 거짓말!”
“론슈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렴.”
미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아델은 뒤늦게 후회했다. 루카스와 정신없이 이야기하다가 돌아오니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이후에는 말할 틈이 없어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 전에 루카스가 먼저 터트렸다.
“거, 거짓말을 하니까!”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다시 더듬는다. 게다가 어느새 튀어나온 불덩어리가 론슈카의 주변을 빙빙 돌아다녔다. 이러다 식당을 태우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아델은 당황한 표정으로 론슈카에게 다가갔다.
“엄마!”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던 론슈카가 달려와 아델에게 안겼다.
“스승님이 거짓말해! 거짓말은 나쁜 건데!”
어쩜 울먹이는 모습도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일단은 지금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론슈카, 일단 이야기를 더 들어 보겠니?”
아델이 그렇게 말하자 론슈카의 눈이 레온처럼 동그래졌다.
“어, 엄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음, 그러니까 론슈카?”
“거짓말이지?”
“론슈카, 그러니까.”
론슈카 못지 않게 아델도 긴장했다. 그 탓에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내뱉었다. 하지만 어차피 결국엔 약혼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렇기에 아델은 눈을 질끈 감고 이어 말했다.
“루카스 님이 말하시는 건 사실이란다.”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연극이라는 건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이들의 입은 한없이 무겁다가도 어떨 땐 구름같이 가벼워지기도 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