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아델은 론슈카를 보호해야 했고, 루카스 또한 그런 그녀를 돕고자 하고 있었다. 지금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건 사실인걸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아델은 필사적으로 루카스에게 매달렸다.
루카스는 팔에 지그시 실리는 무게감에 시선을 돌려 아델을 바라보았다. 깊이 있는 초록빛 눈동자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염려할 필요 없다. 그런 의미를 담아 자유로운 손으로 아델의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 그제야 움켜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그게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루카스.”
헤이른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여기까지 해.”
“무엇을 말이지?”
“이런 싸구려 연극 말이다. 더 해서는 그쪽도 득 볼 일은 없을 텐데? 장난은 그만하자고.”
“장난이 아니라면?”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지만, 루카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나올 생각인가? 되지도 않는 사랑을 들먹이면서?”
“되지도 않는 사랑이라니. 나는 진실만을 말했다.”
“진실, 진실이라!”
헤이른이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멋진 이야기로군. 아이가 딸린 보잘것없는 평민 여자에게 반한 공작가 가주라니! 통속 소설도 이 정도는 아니겠어.”
“헤이른!”
“자꾸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겠지.”
그 말에 아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델.”
루카스는 그런 아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아델이 대답하며 올려다보자 루카스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지그시 물고 있던 입술을 놓는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헤이른, 네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변하는 건 없을 거야.”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여기까지 하고 이만 내 저택에서 나가.”
“말하지 않아도 나갈 생각이야. 하지만 명심해라, 루카스. 다음에는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거야.”
헤이른은 생각보다 쉽게 물러섰다. 하지만 눈에 담긴 독기를 보니 이 모든 일이 이대로 끝날 리 없단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그때는 더 상대하기 어려워져 있을 것이다.
루카스는 아델을 에스코트하며 헤이른의 방을 나섰다.
그들은 나오는 길에 복도에 선 로잘린과 마주쳤다. 작은 아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로잘린.”
먼저 입을 연 건 아델이었다. 로잘린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몸을 굽혀 로잘린과 시선을 맞췄다.
“정말이에요?”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로잘린은 토해 내듯 질문을 던졌다.
“론슈카가 우리 아버지 아들이에요?”
거짓을 말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돌려 넘어가는 방법도 있었다. 진실을 말하는 건 최악의 선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델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
“거짓말.”
로잘린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져 내렸다. 옷을 꾹 잡고 있던 손이 떨려 왔다.
“로잘린.”
“싫어, 싫어요! 나는 론슈카와 남매가 되기 싫어요!”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늘어났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손을 뻗었지만, 로잘린은 뒤로 물러나 피했다. 그러더니 복도 저편으로 달려가 버렸다.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루카스가 그런 아델을 말렸다.
“로잘린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야.”
그래, 지금 당장 저에게 닥친 일도 버거운데 로잘린까지 돌보긴 무리일지도 모른다.
아델은 아쉬움을 묻어 둔 채 몸을 바로 세웠다. 갑자기 몸을 세워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워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고 말았다.
“괜찮은가?”
그런 아델을 루카스가 부축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일단 본채로 돌아가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네.”
루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게 진실이 아님을 안다. 아마도 위기에 처한 론슈카를 구하기 위해 맞지도 않는 거짓말을 한 거겠지.
덕분에 당장 위기는 벗어났으나, 이후가 문제였다.
헤이른이 한 말이 맞았다. 자신은 보잘것없는 평민 여자였고, 루카스는 공작가의 사람이다. 내뱉은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 수 없는 관계였다.
루카스는 본채로 가는 내내 아델을 신경 써 줬다.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배려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에게 기댈 생각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델과 헤이른 사이의 일이었다. 아무리 루카스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걸 전부 받아들여서는 안 됐다. 그에게는 민폐만 될 뿐이니까.
“집무실로 가지.”
집무실은 다른 방보다 방음도 잘되고, 외부인의 접근이 용의치 않았다. 지금 이야기를 나누기엔 제일 좋은 장소였다.
집무실에 도착한 루카스는 일단 아델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따뜻한 차를 우려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양손으로 따뜻한 찻잔을 잡고 있자니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서서히 풀려 나갔다. 한 모금 마셔 보니 속 안까지 따뜻해졌다.
‘이 사람은 대체 못하는 게 뭘까?’
잘생겼지, 능력 뛰어나지, 거기다 배려심도 뛰어나다.
그렇기에 더욱더 감사했다. 루카스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론슈카를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조금 통쾌하기도 했지.’
헤이른이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몸은 좀 괜찮나?”
“네, 배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그만하도록. 너무 많이 하는 것 같군.”
그래도 감사한 걸 어쩌란 말인가.
“그보다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야.”
그 말에 아델은 허리를 바짝 세웠다.
그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당장은 위기를 넘겼지만, 다음번에도 이럴 수는 없었다.
“저택을 떠나겠어요.”
“정식 약혼은 언제 할지 생각해 보지.”
둘의 입에서 동시에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아델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손을 들어 귀를 만져 보았다. 귀는 제대로 달려 있었다. 그럼 자신이 방금 들은 이야기가 진실이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대는 뭐라고 했지?”
“저는 저택을 떠나겠다고 했어요.”
“떠나면 갈 곳은 있고? 집을 살 만한 돈은?”
열심히 모으긴 했지만, 아직 집을 살 만큼의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일을 하면 된다.
이제는 글도 아니까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집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론슈카의 교육은?”
그리 묻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싸늘하다.
“열심히 일해서 어떻게든 공부 시킬 거예요.”
“아델, 세상일은 그리 쉽게 돌아가지 않아. 괜찮은 아카데미에 보내려면 돈이 많이 들어.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그 돈을 벌기란 쉽지 않고.”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속에서 울컥 무언가기 치솟아 올랐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지금 상황에서 열심히 하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이 있다고.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엇보다, 헤이른은 어떻게 피할 생각이지? 그는 집요한 남자다. 당신이 이 저택을 떠나는 순간을 노려 아이를 납치할 수도 있어.”
그것도 맞았다. 헤이른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눈앞이 새카매지는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델?”
“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저는,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루카스 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못 들었나?”
“네.”
정식 약혼을 하자니. 진짜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형편 좋은 환청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델은 다시 물었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정식 약혼은 언제 할지 물었다.”
“정식 약혼 말이군요.”
루카스가 한 말을 중얼거리듯 따라 말하다가 뒤늦게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정식 약혼이요?”
“그래.”
“그, 그건 임시방편이 아니었던가요? 당장 론슈카를 뺏기는 걸 막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셨던 거잖아요.”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나쁜 방법은 아닌 것 같더군.”
“나쁜 방법이에요!”
루카스는 황족 다음으로 높은 공작가의 사람이다. 그런 루카스와 약혼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가능해서도 안 되고 말이다.
“나중에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을 만나면 곤란해질 거예요.”
과분할 정도의 호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레온과 루카스의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더는 엮여선 안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 되는 이유는 더 많았다.
신분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그녀는 아이가 있는데다가 가진 것도 없다. 보잘 것 없다는 소리였다.
어떤 식으로든 루카스에게도 아델에게도 좋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아델은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곤란해질 거라고?”
“네, 그러니 안 돼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아델.”
루카스가 몸을 숙여 아델과 시선을 마주했다. 유독 깊은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