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론슈카는 여기까지.”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아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론슈카에게 말했다.
“네.”
론슈카는 아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아델의 말을 착실하게 따랐다.
그렇게 론슈카가 멀어지고, 아델은 루카스와 함께 집무실에 들어갔다.
“요즘 정말 일이 많네요.”
아델은 희미하게 웃으며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아델.”
“네?”
루카스는 잠시의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웨더필드 후작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익숙한 이름에 아델은 잠시 멈칫했다. 답은 한참의 침묵 뒤에야 나왔다.
“거절해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그랬지. 하지만 이번에는 만나야 할 것 같아.”
루카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서류를 잡고 있던 아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옅은 꽃분홍의 입술이 몇 번인가 벌어졌다 다물렸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헤이른은 이대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피를 이은 론슈카를 집요하게 노릴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시 한번 만나서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그는 내일 저택을 떠날 예정이니 그 전에 잠시 만나면 되겠군.”
“네.”
아델은 서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카스가 불쑥 물었다.
“그리고 괜찮다면 그 자리에 나도 같이 가도 괜찮을까?”
“네.”
멍하니 대답했던 아델은 뒤늦게야 그 의미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네?”
“아무래도 둘만 만나게 하긴 불안해서.”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다소 과한 배려였지만, 나쁘진 않았다. 루카스가 곁에 있다면 헤이른도 일정선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헤이른이 론슈카의 아빠라는 걸 루카스가 알게 되겠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싫다면 거절해도 된다.”
“아니요, 배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루카스의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간을 알려 주면 나도 그에 맞추지.”
“그럼 저녁 식사 전이 어떨까요?”
“미리 사람을 보내서 시간을 말해 두도록 하지.”
“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델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 섰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들어오십시오.”
묵직하게 생긴 남자, 알버트가 아델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루카스를 보며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루카스를 막아설 힘이 없었기에 둘 다 들여보내야 했다.
“아델. 그리고 이건 또 누구야, 루카스 아닌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모습에 헤이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델과만 만나고 싶었는데. 굳이 따라온 이유가 뭔가?”
“그건 스스로가 더 잘 알 것 같군.”
“이런 건 쓸모없는 배려심이야.”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헤이른과 루카스 사이에 날이 선 말이 오갔다. 그러나 루카스는 어떻게 해도 나가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먼저 포기한 이는 헤이른이었다. 그는 화살을 아델에게로 돌렸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이런다고 뭔가 달라질 것 같았나?”
“저야말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아델은 등을 꿋꿋하게 펴고 헤이른의 말을 받았다.
“모르겠다니.”
헤이른은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모르는 대로 있도록. 나는 내 권리를 행사할 테니.”
“무슨 권리요.”
“아버지로서의 권리!”
그 말에 아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루카스도 이제 모든 걸 알게 되었구나.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아델은 그를 몰랐다. 그렇기에 각오를 하고 있었음에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져서는 안 된다. 아델은 손톱으로 손등을 꾹 눌렀다.
‘버텨!’
그리고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 내라.
“론슈카의 아버지는 여기 없어요. 그 사람은 죽었다고요.”
“또 그 소리인가. 하지만 상관없다. 핏줄 검사를 해 보면 될 일이니까. 그렇다면 더는 부정하지 못하겠지.”
웨더필드가에는 이때를 위해 만들어진 마도구가 존재했다. 귀족가에서 흔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이들의 혈연 여부를 검사할 때 종종 쓰곤 했다.
아델도 뒤늦게야 그런 게 있다는 걸 떠올렸다.
‘안 돼!’
검사를 하면 더 이상 론슈카가 헤이른의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마음이 초조해져 왔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러지 마세요.”
아델은 이를 악물고는 이야기했다.
“저랑 론슈카를 버렸잖아요. 버렸으면 잊어요. 더는 미련을 가지지 마세요.”
“잊었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저 사정상 잠시 내버려 둔 것뿐이다.”
“무슨 사정이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내 묻어 두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서 미혼모의 위치는 턱없이 낮다. 거기에 아이까지 특이했으니 남들의 몇 배는 고생했다.
그 과정에서 아델도, 론슈카도 고통받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소리라니. 지나치게 뻔뻔하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야. 그러니 이제는 과거의 잘못을 갚도록 하지.”
헤이른이 아델에게 다가왔다.
“너에게 첩의 자리를 주겠다. 그리고 론슈카는 정식으로 입적하도록 하지. 후계자 후보에 올리고 교육도 제대로 시켜 주겠다. 지금과는 다르게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을 것이다.”
헤이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함 없이 자라는 것만으로 충분한 걸까? 아델은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면, 소설 속 론슈카는 행복하게 살았겠지.
“거절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러도록 해. 아이에게 굳이 엄마가 필요하진 않을 테니까.”
헤이른은 단정 짓듯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아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헤이른이 증오스러웠다. 타오르는 증오의 불길에 심장이 조여 왔다.
필사적으로 둘러보는 아델의 시선에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헤이른.”
루카스가 헤이른을 불렀다.
“왜?”
“론슈카는 못 보내.”
“루카스, 너도 같은 소리인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배운 게 없는 평민과 같은 소리를 하는 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델은 현명한 사람이야. 그녀는 영리하고 일도 잘해. 무엇보다…….”
루카스가 조금은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사랑스럽기도 하지.”
아델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혹시나 싶어 다른 이들을 돌아보니 전부 다 표정이 이상하다. 아무래도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자네 미쳤나?”
“아니, 미치지 않았어.”
루카스는 아델에게 가까이 다가와 곁에 섰다. 그러자 자연 헤이른과 맞선 모습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쪽은 기사이다 보니 체격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아니, 아무래도 자네가 미친 모양이야. 그도 아니면 내 귀가 잘못되었든가.”
“어느 쪽도 아니야.”
“어느 쪽도 아니라고?”
“그래.”
루카스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아델과 나는 교제 중이야.”
우리가 언제 교제를 하였나요?
아델은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루카스는 그런 아델을 다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진지하게 만나 보기로 한지 얼마 안 됐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녀와의 약혼도 생각하는 중이고.”
“평민과 약혼이라고?”
헤이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그렇게 되면 론슈카는 자연히 내 자식이 되겠지.”
루카스의 말에 헤이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봐도 자기 제자를 지키고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일단 옆에 선 아델의 태도가 어색하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그런 소리를 처음 들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아델은 손을 들어 올려 어색하게 루카스의 팔에 휘감았다.
“마, 맞아요.”
목소리가 떨려 온다.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엄마의 마음이 루카스의 거짓말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헛소리는 그만해, 아델. 루카스의 가문을 알긴 하나? 그는 프레데릭가의 장남이야. 지금은 여기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공작가의 가주가 될 수 있단 소리다.”
공작가의 가주. 아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의 입에서 듣는 건 또 기분이 달랐다.
“그런 사람이 루카스다. 너와 약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지.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어. 지금 이 순간만 넘기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헤이른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