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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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실망한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이 론슈카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물어 왔다.

“어디 있는데요?”

사실을 말해 주자, 결심했는데도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델은 한참을 노력한 끝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가까이에 있어.”

“혹시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

“헤이른.”

숨이 턱 막혀 왔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이 그랬으니까요.”

“뭐라고 그랬는데?”

“자기가 내 아빠래요.”

아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그를 외면한 이유를 몰랐던 걸까. 양심이 있다면 그가 그 단어를 직접 입에 올려서는 안 됐다.

‘나와 론슈카를 버렸으면서!’

산속에 존재하는 작은 마을, 편견에 가득 찬 마을에서 미혼모와 그 아이가 어떤 취급을 당할지 몰랐단 말인가.

내내 깊이 눌러두었던 증오가 치솟아 올랐다.

“엄마?”

“론슈카.”

아델은 론슈카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 맞아. 그가 네 아빠야. 하지만 론슈카, 낳았다고 해서 전부 부모는 아니란다. 낳은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부모인 거야.”

“엄마처럼?”

“아니, 엄마도 론슈카에게 많은 잘못을 했어.”

아무것도 모르던 과거의 아델이 론슈카를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 사랑하잖아요.”

론슈카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엄마를 좋아하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던 아이가 이제는 사랑을 입에 담는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보람이 느껴졌다.

“그래, 엄마는 론슈카를 사랑해.”

“그럼 좋아요. 아빠는 없어도 돼.”

론슈카는 작은 팔을 들어 아델을 마주 끌어안았다.

“아빠는 나쁜 사람이지?”

어린아이라고 해서 듣는 귀가 없을까. 론슈카가 그가 태어나 살았던 마을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상대적 약자인 아델을 존중하지 않았고 쉽게 입을 열었다. 그걸 론슈카도 전부 알고 있는 것이다.

아델은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론슈카에게 자신의 증오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헤이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한참 동안 서로 안고서 체온을 나누었다.

* * *

레온에게서 헤이른이 한 짓을 전해 들은 루카스는 일하던 것도 내버려 두고 별채로 향했다.

“헤이른!”

“또 무슨 일이지?”

“아이들을 불러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무슨 짓을 저질렀냐니. 그냥 진실을 알려 준 것뿐이다.”

“무슨 진실!”

“듣고 싶은가?”

헤이른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델이 너의 일을 돕고 있다 하였지? 대단하군. 아무것도 모르는 촌구석 여자에게 일을 맡기다니. 역시나 루카스라고 할까. 냉정하게 굴지만 결정적일 땐 그렇지 못하지.”

“아델은 유능한 사람이야.”

“뭐, 그렇다고 해 두지.”

어깨를 으쓱한 헤이른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카스의 앞에 섰다.

“그동안은 내가 너무 답답하게 굴었던 것 같다. 사실은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루카스, 아델과 론슈카는 내가 데려가겠다.”

“네가 무슨 권리로.”

내뱉는 말이 차갑다. 하지만 헤이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으니, 이 정도가 딱 맞았다.

“권리라.”

헤이른은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아이 아버지로서의 권리라면 어떤가.”

흘러내리는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이 론슈카와 똑 닮았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사실 그동안 론슈카를 볼 때마다 위화감을 느껴 왔다. 성인이 되기 전 헤이른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 론슈카는 헤이른과 닮았다.

‘헤이른이 론슈카의 아버지라면.’

아델과의 관계도 추측할 수 있었다.

“너에겐 부인이 있지 않았나.”

“그녀는 로잘린을 낳고 죽었지. 참 쓸모없는 여자였어. 몸이 약해서 집안을 간수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아이를 낳지도 못했지.”

신랄한 목소리에 루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람은 도구가 아니다.”

“그런 나약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친 거겠지.”

“헤이른!”

“사실이지 않은가. 알버트!”

그러자 구석에서 석상처럼 서 있던 알버트가 다가와 둘둘 말린 긴 원형 통을 내밀었다.

“폐하의 서신이지. 폐하께서는 도망친 기사가 무척 그리우신 모양이더군.”

“이게 원래 목적이었군.”

“그래, 답은 내일까지 주도록 해. 그때까지 저택을 떠나라 하였으니 괜찮겠지?”

“…그러도록 하지.”

루카스는 알버트가 내놓은 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델을 만나고 싶은데.”

“그건 안 된다.”

“이야기를 다 듣고도 안 된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이건 월권 아닌가?”

그건 맞았다. 아델이 헤이른을 꺼리긴 했지만, 둘 사이의 일을 루카스가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아델은 널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언제까지 도망다니면 해결될 줄 아는지.”

헤이른이 혀를 찼다.

“다시 물어봐.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을걸.”

“헤이른.”

속이 들끓었지만, 루카스로서는 헤이른의 말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루카스는 거친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중간에 누군가 부른 것 같았지만, 멈춰 서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답답했다. 과거의 자신이 생각나서 론슈카를 거두었다. 그러면서 아델도 같이 거두게 되었고.

처음에는 아델을 못마땅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서서히 관계는 나아져 갔다. 이제는 일하면서 가끔 대화도 나누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이들과 만든 과자를 들고 찾아와 나눠 주기도 하였다. 바구니 가득 채운 과자를 들고 저택을 돌아다닐 때면, 모두들 웃으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마치 햇살 같은 사람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루카스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단언컨대 루카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타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제국의 수도에 머무를 때 귀족 영애들을 만날 일이 많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사람은 없었다.

외려 지겹기까지 했다. 그녀들이 바라보는 것이 순수하게 자신 하나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맙소사.”

루카스는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감정을 부정했다. 이건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일 뿐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아델과 론슈카를 보낼 수 없었다. 헤이른은 뱀 같은 작자라 같이한 시간이 길었음에도 도무지 친해질 수 없었다. 아이인 로잘린에게 대하는 것만 봐도 자신과는 맞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웨더필드가는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돌아가는 가문이다. 론슈카의 실력이라면 걱정 없겠지만, 과연 그곳에 가서도 여기서처럼 웃으며 지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니 보낼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헤이른은 가장 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핏줄이라는 무기.

아버지인 그가 자식을 데려가겠다고 하면 루카스로는 도저히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명분, 명분이 문제였다.

그런 게 싫어서 제국 수도를 떠나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인데.

아델과 론슈카의 방 앞에 선 루카스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답이 없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델이었다.

“루카스 님? 무슨 일이세요?”

아델이 눈을 깜박이며 물어 왔다. 초록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고, 눈가가 붉다. 마치 울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울었나?”

너무 대놓고 물었나 싶어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요. 울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카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문 사이로 작은 머리통 하나가 삐죽 솟았다. 론슈카였다.

“무슨 일이세요?”

“아델에게 볼일이 있어서.”

“엄마한테요?”

“그래.”

그 말을 들은 아델이 작게 웃었다.

“역시 일이 많았던 거지요? 그러게 쉬지 않는다니까요. 지금이라도 다시 집무실로 갈까요?”

“그럼 팬케이크는?”

아델이 론슈카에게 팬케이크를 만들어 주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그건 다음에도 또 할 수 있잖아. 엄마가 열심히 일해야 론슈카가 가지고 싶은 걸 사 주지.”

“가지고 싶은 거 없는데.”

“정말? 저번에 엄마랑 똑같은 손수건을 가지고 싶다 하지 않았니?”

“가지고 싶어요!”

대답하는 모습이 제법 씩씩하다. 보기에도 흐뭇한 광경이었다.

“그래, 그럼 엄마 다녀올게.”

아델이 먼저 문을 나섰다. 론슈카는 그런 아델의 뒤를 아기 오리처럼 졸졸 따랐다.

“집무실 전까지만 같이 갈래.”

물론 아델은 그를 허락했다. 루카스는 엉겁결에 모자에게 이끌려 집무실로 향했다.

창문으로 스민 햇살에 초록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신록을 연상케 하는 눈동자는 론슈카에게로 향할 때면 더욱더 깊어졌다. 그 모습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는 아델이 론슈카를 아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더 이 모자를 헤이른에게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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