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레온이 다급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됐다. 그 정도로는 당장 죽진 않아.”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을 다치게 하고선 저렇게 냉정한 태도라니.
레온은 헤이른의 행동에 욕지거리가 올라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가 웨더필드가의 가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승인 루카스는 레온에게 정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외부에서 험난한 일을 겪기도 했던 레온은 때론 입을 다물기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 죽진 않더라도 의사는 필요합니다.”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럼 알버트, 대충 처치해 둬라.”
“네.”
“그리고 론슈카, 너에게 가장 소중한 건 무엇이지?”
“엄마.”
론슈카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왜?”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또한 엄마를 사랑했다. 이렇게 당연한 걸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 뭐지?
그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헤이른이 론슈카에게 물어 왔다.
“엄마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럼 아빠는?”
아빠? 론슈카는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빠?”
“그래, 아빠. 엄마가 있으면 어딘가 아빠도 있을 테지.”
아주 어렸을 적엔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아빠는 엄마를 버리고, 자신을 버렸다.
다른 집 아빠는 집을 지켜 주지만, 자신에겐 그런 존재가 없었다. 언제나 론슈카를 돌봐 주던 존재는 엄마뿐이다.
“없어요.”
“그럴 리가. 아빠 없는 아이는 없단다.”
“그래도 없어요.”
모습을 비춘 적도 없는 그런 존재다. 그러니 필요 없었다. 지금도 론슈카는 엄마와 함께 행복했다.
“하지만 만약 아빠가 있다면?”
그럴 일은 없다. 그렇기에 론슈카는 꿋꿋하게 고집했다.
“사정이 있어 잠시 너희를 떠나 있었던 거라면?”
그런 사정 따위 알 바 없다. 둘이면 충분했다. 거기에 겸사겸사 스승님인 루카스, 친구인 레온이 있다면 만족한다.
“론슈카.”
그러나 헤이른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속삭였다.
“너도 이제 진실을 알 나이가 되었지.”
무슨 진실?
“너의 붉은 머리, 누군가를 닮지 않았니?”
아델은 초록 눈에 흔한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론슈카와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
“너의 눈도 마찬가지다.”
헤이른이 눈가를 접으며 웃어 보였다. 창가에서 스며든 햇빛이 짙은 붉은 색인 그의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마치 불꽃이 연상되는 색이었다.
“너는 나와 닮았어.”
그 말에 구석에서 떨고 있던 로잘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저에겐 언제나 차갑게 말을 하던 아버지가 다정한 목소리로 론슈카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론슈카가 자신의 아이라고.
‘거짓말!’
로잘린은 숨을 몰아쉬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뒤는 벽이라 더는 물러날 수도 없었다.
“너는 나와 아델에게서 태어난 소중한 아이다. 내가 네 아빠란 소리지.”
‘거짓말!’
불꽃의 정령을 잘 다루지 못해도, 정령사로서의 재능이 낮아도 힘껏 노력해 왔다. 로잘린, 자신은 웨더필드가의 유일한 후계자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여기서 아버지가 론슈카를 자신의 아이라고 말했다. 자신과 다르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불의 정령사인 론슈카.
친구로서의 그를 좋아했지만, 정령사로서의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랬는데.
로잘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버지.”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헤이른을 불렀다.
“거짓말이지요?”
론슈카가 자신과 남매라니! 그럴 리 없었다.
“진실이다.”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론슈카!”
로잘린은 론슈카의 이름을 불렀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 모든 걸 믿어?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짧지만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론슈카가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요.”
내내 여유롭던 헤이른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론슈카,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웨더필드가의 가주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아빠는 필요 없어요.”
“네가 날 얼마나 원망했을지는 안다. 하지만 그건 앞으로 차차 갚아 나가면 될 일이야.”
“갚지 않아도 돼요.”
그 답에서 로잘린은 론슈카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로잘린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아버지를, 론슈카는 진심으로 필요치 않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열망도 없었다.
“하하.”
헤이른이 기가 찬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웨더필드가 어떤 가문인지, 나와 함께 감으로써 정령사로서의 네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 것인지 말이다. 그뿐이겠니? 네 엄마도 더 행복해질 거다.”
그 말에 처음으로 론슈카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행복해져요?”
“그럼. 무려 웨더필드가에 들어오는 건데. 당연히 행복해지겠지.”
“아니야! 듣지 마, 론슈카!”
옆에서 듣고만 있던 레온이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목숨을 경시한다. 그런 이가 아델을 행복하게 해 줄 리 없었다.
그렇게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을, 그런 곳에 보낼 수 없었다.
“아델 님을 생각해 봐!”
“엄마를?”
론슈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헤이른과 레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일단 아델 님에게 물어보고 생각하자.”
그사이에도 레온은 꾸준히 론슈카를 설득했다. 그리고 그 말은 론슈카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응.”
론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 갈래요.”
헤이른은 대화를 방해한 레온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그들이 밖으로 나가는 걸 막지는 않았다.
일단 씨앗을 심는 데는 성공했으니, 그를 피워 내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 * *
레온은 론슈카의 손을 꽉 쥐고서 밖으로 내달렸다. 그가 멈춰 선 것은 별관을 빠져나와 문밖에 선 뒤였다.
숨을 몰아쉰 레온은 뒤돌아 별관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론슈카, 괜찮아?”
“응.”
론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스승님께 가 보자.”
“아니, 난 엄마에게 갈래.”
“그래,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난 스승님께 가서 웨더필드 후작의 일을 얘기해야겠어.”
“그래. 근데 그건 이야기하지 마.”
레온은 론슈카가 말하는 그거가 뭐지 금방 깨달았다. 아마도 헤이른이 론슈카의 아빠라고 했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거 정말일까?”
머뭇거리며 물어 오는 레온에게 론슈카가 대답했다.
“몰라.”
론슈카도 그걸 엄마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
레온은 그길로 루카스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고, 론슈카는 곧바로 아델에게로 향했다.
“엄마.”
“론슈카.”
아델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론슈카를 맞이했다.
“오늘도 열심히 배웠니?”
“네.”
“수업 중간에 빠져나온 건 아니고?”
“허락받았어요.”
“착하네.”
아델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론슈카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 품은 상냥하고 따뜻했다.
“엄마.”
“응?”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
론슈카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빠 말인데요.”
“아빠?”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고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말하지 말까.’
하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헤이른, 그가 얌전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저도 아빠가 있어요?”
론슈카가 처음으로 아빠에 관해 물었다. 그동안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더니, 몸이 자란 만큼 마음도 자란 모양이었다.
아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뭐라고 말해 주어야 할까.’
아빠는 죽어 버렸다고,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사실을 털어놓을까.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이 흔들렸다. 거짓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행동일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엄마, 사실 전 아빠가 없어도 돼요.”
그런 아델에게 론슈카가 말했다.
“난 엄마만 있어도 행복해요.”
론슈카의 작은 세계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엄마인 아델뿐이었다. 그러니까 론슈카는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좀 더 일찍 전생을 떠올렸더라면. 그래서 그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갔다면 론슈카는 좀 더 바르고 곧게 자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론슈카.”
“응, 엄마.”
“너에게도 아빠는 있단다.”
그 말에 론슈카가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