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헤이른이 할 말이 있다는군.”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저는 들을 말이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굳이 만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그는 내일 저택을 나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마주치지 않으면 될 거야.”
희소식이었다. 아델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다시 쉬도록.”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일은 하지 않았어.”
“아니요, 많이 하셨어요.”
아델은 생긋 웃어 보였다. 헤이른이 저택을 나가기까지 불안은 남아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주의하면 될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좀 천천히 가!”
빠르게 내달리는 론슈카의 모습에 레온이 걱정 어린 말을 내뱉었다.
“괜찮아.”
“괜찮긴! 넌 아직 잘 못 달리잖아!”
“자, 잘 달리거든?”
이제는 제법 레온과 티격태격하며 싸울 줄도 안다. 가만히 선 상태에서라면 말도 거의 더듬지 않게 되었다. 정령술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 루카스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운동과 질 좋은 식사를 병행하여 제법 살이 붙은 몸은 예전보다 더 보기 좋았다.
“그러다 넘어지면 아델 님이 속상해할걸!”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론슈카는 속도를 줄였다. 그러고는 저택에서 엄마의 방이 있는 방향을 힐끔 바라보았다.
혹시 엄마가 손을 흔들어 주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섭섭해졌지만 괜찮다. 방에 가면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넌 왜 같이 가?”
“나도 아델 님이 보고 싶으니까.”
“네가 왜?”
론슈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아도 레온은 꿋꿋하게 버텼다.
“같이 놀면 재밌으니까.”
“난 엄마랑 둘이 노는 게 좋은데.”
불만을 토해 내도 끄덕도 하지 않는다. 론슈카가 변한 만큼 레온도 변해 왔다.
“어? 로잘린이다.”
그런 둘의 앞에 로잘린이 나타났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꼬고 있었다.
“로잘린!”
둘을 발견한 로잘린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론슈카!”
론슈카는 왜 부르냐는 표정으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나랑 잠시 어디 가 줄 수 있을까?”
“싫은데.”
로잘린과도 제법 안면을 텄지만, 그래도 론슈카의 최우선은 엄마였다.
“론슈카!”
레온이 그런 론슈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왜.”
“다급해 보이니까 같이 가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왜?”
“로잘린이랑 친구잖아.”
친구. 론슈카는 레온을 힐끔 바라보고, 이어 로잘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같이 훈련받고, 놀기도 하고, 밥도 먹는다. 이런 게 친구인 걸까.
엄마는 친구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하였다. 아직 론슈카는 친구보다 엄마가 더 좋았지만 말이다.
“오래 걸려?”
“아니, 잠시면 돼.”
“그럼 갈게.”
론슈카는 처음으로 친구의 의견을 우선시했다. 잠시니까. 어차피 금방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에서였다.
“고마워.”
로잘린은 그렇게 말하곤 앞장서 걸었다. 뒤에서 바라보는 등이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여기야.”
그렇게 로잘린이 론슈카와 레온을 데려간 곳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건물이었다.
“여긴 별관인데.”
레온이 그리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우리는 여기서 지내고 있어.”
로잘린은 별관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낮인데도 어두운 복도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어둡네.”
별생각 없이 내뱉은 레온의 말에 로잘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1층은 나무 때문에 그늘져서 좀 어둡더라고.”
“그럼 등을 켜면 되잖아?”
“정령술 연습 겸 그냥 놔뒀어.”
그러면서 손가락을 들어 작은 정령을 불러냈다. 작고 힘없어 보이는 불꽃이었다.
“작네.”
론슈카로서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로잘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레온은 재차 론슈카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런데 여기는 왜?”
“만날 사람이 있어.”
이쯤에서 레온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하지만 로잘린은 그들의 또래 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되돌아가지 않았다. 방심한 것이다.
커다란 문 앞에 선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이어 모습을 드러낸 이는 어두운 머리색을 가진 단단한 체구의 남자 한 명이었다.
“알버트.”
“로잘린 님. 손님들도 들어오십시오.”
그를 지나쳐 더 안쪽을 바라보자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하나는 낡은 옷을 입은 추레한 중년의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헤이른이었다.
그를 본 레온의 안색이 달라졌다. 스승님은 그가 론슈카랑 만나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런데 로잘린에 의해서 만남이 이루어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레온은 입술을 꾹 다물고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원치 않는 손님도 같이 오셨군?”
헤이른은 느른히 웃으며 손짓을 했다.
“뭐, 상관없지. 어서 와라, 론슈카.”
론슈카는 헤이른을 바라보다가 로잘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입고 있는 로브 자락을 손으로 꾹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갈래요.”
론슈카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앞을 알버트가 가로막아 섰다.
“저런, 아직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가면 안 되지.”
“엄마는 당신을 싫어해요.”
또박또박 말을 내뱉은 론슈카는 눈에 힘을 주고 알버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알버트는 비켜설 기색이 없었다. 그를 본 론슈카의 손에서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의 정령을 불러내는 속도가 로잘린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로 인해 나타난 정령의 크기도, 힘도 훨씬 더 크다.
“멋지군.”
헤이른의 얼굴에 흡족함이 떠올랐다. 반면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얼굴에는 공포가 떠올랐다.
“괴, 괴물!”
절로 터져 나온 소리에 론슈카의 시선이 돌아갔다. 얼핏 봐서 몰랐는데, 다시 보니 아는 얼굴이다.
저 깊은 산속 작은 마을에서 지낼 때, 이웃집에 살던 남자. 엄마한테 험한 말을 퍼붓고 몰래몰래 론슈카를 때리던 남자였다.
화가 난 나머지 그가 든 장작을 불태운 이후로는 멀리 피해 다녔지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론슈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와 동시에 중년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몸을 웅크렸다. 뜨거운 불꽃이 그의 옷을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악, 사, 살려 줘!”
미친 듯이 옷자락을 털어 보았지만, 불꽃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론슈카!”
당황한 레온이 론슈카의 이름을 불렀다.
“나 아냐.”
론슈카는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지금 중년을 불태우는 불꽃은 저 남자의 것이었다.
“히이익! 살려, 살려 줘!”
중년은 연신 비명을 지르며 몸을 털어 댔다. 그러나 불꽃은 점점 커지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았다.
“물!”
그나마 레온이 다급히 움직여 물병을 잡긴 했지만, 정령의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불을 꺼 주십시오!”
애타게 외쳐 보아도 헤이른은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았다.
“보아라, 론슈카. 저 천박하고 더러운 자의 모습을.”
옷을 태운 불꽃은 이제 살갗을 달구고 있었다. 비명은 점점 높아져만 갔지만, 헤이른에겐 그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론슈카는 헤이른의 말대로 중년 남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 당할 때는 무섭게만 느껴지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벌레처럼 바닥을 나뒹굴 뿐이었다.
“정령의 불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그런 불을 다루는 자가 괴물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자신이 모르는 걸 모두 괴물로 취급하는 저 옹졸함을 봐라.”
헤이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론슈카에게로 다가왔다.
“정령사는 위대하다.”
하얗고 유려한 손을 유혹하듯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라면 넌 더 위대해질 수 있다. 론슈카, 나와 함께 가자.”
무척이나 매혹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론슈카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싫어요.”
“왜?”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으니까.”
길게 말하면서도 단 한 번도 말을 더듬지 않았다. 엄마가 보면 좋아하겠지. 이런 상황에서도 엄마를 떠올리며 론슈카는 웃었다.
“어리석긴. 하지만 좋다.”
헤이른은 뜻밖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손을 거둘 뿐이었다.
“불을 꺼 주세요!”
그리고 중년인에게 붙인 불꽃을 거둬들였다. 그제야 고함치며 분주히 움직이던 레온도 멈춰 설 수 있었다.
다행이 중년인은 가벼운 화상만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흐으, 흐으.”
그는 공포에 떨며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