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애써 봐도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해 보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자신과의 과거를 잊고 싶은 건가?
걸음을 멈춰 선 헤이른은 벽을 주먹으로 쳤다. 천박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행동은 자제해 왔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기억하게 해 주지.’
과거에 아델이 어땠는지 말이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헤이른은 곧바로 알버트를 불렀다.
“알버트!”
“네, 헤이른 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버트는 빠르게 달려왔다.
“저번에 정보를 알아낸 마을 기억하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나? 아델의 얼굴을 아는 자로, 최대한 빠르게.”
헤이른의 말을 들은 알버트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몰라 증인으로 마을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현재 마을에 머무르게 하고 있으니 명하시면 당장이라도 데려오겠습니다.”
알버트는 제법 유능한 부하였다.
“좋다. 당장 데려와라.”
헤이른의 명에 알버트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마을까지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알고 있건만 기다림이 길게만 느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여니, 알버트가 아닌 로잘린이 서 있었다.
“아버지, 저번에 가르쳐 주신 기술에 성공했어요.”
로잘린은 수줍은 표정으로 공부 결과를 알렸지만, 헤이른은 가볍게 넘겼다. 지금은 덜떨어진 딸의 공부를 봐 줄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로잘린을 내보내고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초조함을 억눌렀다.
똑똑. 그때 재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이번에는 직접 문을 열지 않았다.
“헤이른.”
“루카스.”
기분도 좋지 않은데, 심지어 찾아온 이는 못마땅한 루카스였다.
“무슨 일이지?”
“왜 이러는지 알 텐데.”
“난 모르겠는데?”
신경질적인 말투로 대꾸하니 루카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내 저택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지 않나. 그러니 더는 여기서 머물게 해 줄 수 없어. 시간을 줄 테니 내일까지 저택을 떠나 주게.”
“떠나라고?”
헤이른은 그 말을 다시 곱씹어 보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 여자가 그렇게 부추기던가? 날 쫓아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아델, 그 여자 말이야.”
“아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하지 않았다고!”
헤이른은 조롱하듯 루카스의 말을 따라 했다.
“할 수가 없는 거겠지!”
“헤이른!”
다른 이가 아닌 아델이 직접 이야기해 주길 원했다. 그렇기에 헤이른이 더 말하려는 걸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만해!”
“뭘 그만하란 소리지?”
루카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
“아델의 이야기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가 직접 이야기할 일이지, 남이 떠들어 댈 문제가 아니야.”
“기가 막히는군. 지금 그 여자를 옹호하는 건가?”
헤이른은 루카스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과거에 뭐 하고 살았는지는 아나?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는? 지나치게 감춰진 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저택의 사람들은 아델이 괜찮은 집안 아가씨인 줄로만 알고 있다. 몸가짐이 예의 바르고,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건 루카스도 느끼고 있었다. 아델은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데 능숙하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워 본 사람의 느낌이 난다.
그렇기에 과거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파헤치는 건 월권이다.
둘은 그저 사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일 뿐이니까. 좀 더 상세히 들어가면 론슈카의 어머니와 스승이기도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보다 아이 아버지라니.’
말하는 걸로 봐서는 헤이른은 론슈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대체 누굴까. 그런 여인과 아이를 버린 아버지란 작자는.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루카스, 너도 인간이긴 했군. 궁금한 모양이지?”
“그만둬, 헤이른.”
“알려 줄까?”
“그만두라고 했다.”
헤이른은 분주히 팔걸이를 두드려 대던 손가락을 멈췄다.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똑똑.
둘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돌아왔습니다, 헤이른 님.”
“그래.”
문이 열리며 들어선 자는 알버트와 정체를 모를 한 중년이었다. 낡은 옷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그는 연신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무척이나 초조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중년은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깊게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저, 저는 알리라고 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헤이른은 그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저 알버트를 보며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이 사람이 맞는 거겠지?”
“네, 맞습니다.”
“좋아.”
“헤이른, 저자는 대체 누구지?”
루카스의 물음에 헤이른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누구냐고?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그보다 아델은 어디 있나?”
“그녀는 왜 찾는 거지?”
“필요한 일이니까.”
“그래도 알려 줄 수는 없어.”
“그럼 전해 주기만 해. 내가 할 말이 있어 불렀으니 나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헤이른의 말투는 오만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아니면 아델이 더 곤란해질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 말만 전해 주면 되는 거지? 그녀가 거부한다면 더는 접근하지 말도록 해.”
“노력해 보지.”
그걸로 둘의 대화는 끝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아델은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저 잠시 대화를 했을 뿐인데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보 아델.”
과거의 아델을 탓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일은 벌어졌고, 과거보단 앞날을 생각해야 했다.
‘이제 그가 어떻게 나올까.’
헤이른이라면 모든 사실을 밝히려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델에게서 론슈카를 데려가려 들겠지.
“그건 안 돼.”
그 차갑고 삭막한 곳에 론슈카를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최선은 아예 보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자신이 따라가야 했다.
‘여기가 좋은데.’
사람들은 친절하고, 일도 나쁘지 않다. 이대로 차츰 돈을 모으다 보면 론슈카가 크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 작은 집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카스는 좋은 사람이었고, 레온도 귀여운 아이였지만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이들이었다. 그들과 엮여서 론슈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떠나가는 게 맞았다.
‘그냥은 못 떠나겠지만.’
믿든 안 믿든 가벼운 경고는 남기고 떠날 생각이었다. 여러 번 생각해보아도 루카스는 너무 좋은 사람이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왜 하필 지금 헤이른을 만나게 되었을까.
아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이시여.’
신이 존재한다면 이럴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론슈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꾹 참고 있는데, 머리 위로 작고 빨간 새가 어른거렸다.
‘론슈카!’
아델은 혹시 젖었을지도 모르는 눈가를 닦아 내곤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엄마!”
새가 작은 부리를 열어 아델을 불렀다.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차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론슈카.”
“지금 뭐 해요?”
“잠시 쉬고 있었어.”
“일할 시간 아니에요?”
작은 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늘은 쉬라고 일찍 끝내 주셨어.”
“어디 아파요?”
“아니, 아픈 데는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새는 스르르 사라졌다. 그래도 저번보다 오래 유지되는 걸 보니, 열심히 연습했나 보다.
불꽃 새가 사라졌으니, 이제 론슈카가 이리로 달려올 터였다. 엄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이니, 모처럼 방에서 쉬고 있는 걸 보면 같이 놀자고 할 것이다.
‘뭐 하면서 놀아 주면 되려나.’
그사이 손의 떨림도 멎었다. 아델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바라보면 론슈카가 달려오는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론슈카는 저 멀리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레온이 찰싹 붙어 있었다.
같이 오려는 모양이다.
아델은 창문을 열고 그 사이로 상체를 내밀었다. 손이라도 흔들어 줄 생각이었으나, 그 전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이 시간에 방을 찾아올 만한 사람은 아이들밖에 없었기에 살짝 의아했다. 아델은 아쉬운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문으로 다가섰다.
“아델.”
문밖에 서 있는 이는 루카스였다.
“무슨 일이세요?”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전할 말이요?”
불안감에 꽉 잡은 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