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자신의 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태어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통받아 왔다.
하지만 보라! 지금은 이렇게 어엿하게 자라 제대로 정령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하, 하하하!”
헤이른은 웃었다. 론슈카가 자신의 핏줄이라면 이야기는 더 쉬워진다.
굳이 로잘린과 이어 줄 필요도 없었다. 로잘린은 원래대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 되었다. 가문들끼리의 결속을 굳건히 하는 일 말이다.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의 웃음에 알버트는 의문을 가진 듯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주군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일 뿐이었다.
“참, 희한한 인연이야.”
그토록 싫어하던 루카스가 자신의 아이와 아이 엄마를 구해 주었다. 이후 저택에서 머물게 하다 헤이른과 만나게 해 주었다. 이게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자, 그럼 이 사실을 언제 밝혀 볼까?’
될 수 있으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밝히는 게 편하겠지.
아니, 그 전에 아델과는 다시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분명 저를 알아보았을 텐데 모르는 척하다니.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모든 걸 알았으니까.
“그럼 먼저 만나 볼까?”
헤이른은 아델을 찾아보기로 했다.
* * *
하늘이 흐렸다. 아델은 흐린 하늘을 보며 서류를 넘기다가 따끔한 느낌에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실수로 종이에 베였다. 예리한 아픔이 손가락에서 느껴졌다.
론슈카를 훈련에 보내고 시간이 남아서 서류 정리를 했는데, 잡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후우.”
아델은 한숨을 쉬며 보던 서류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의원에게 들러서 가볍게 약을 바르고 론슈카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루카스의 서재를 나섰다.
예전에는 자신 없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던 루카스였지만, 이제는 신뢰가 생겨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서재에 혼자서 드나들어도 괜찮다 한 거겠지. 아델은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아델은 계속 불안하게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달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복도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헤이른, 그 사람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뛰었다. 그렇지만 모르는 척 지나갈 수는 없었다.
아델은 헤이른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담담하고도 정중하게 스쳐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아델을 헤이른은 가만두지 않았다.
“아델.”
헤이른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아델을 불러 왔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렇게 부르지 마. 당신은 이미 나를 잊었잖아. 그렇다면 계속 잊은 것처럼 지내 줘.
아델은 울컥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삼키며 뒤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무슨 일이냐니.”
헤이른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한때는 저 미소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무섭기만 했다.
그런 아델에게 헤이른이 물었다.
“나를 기억 못 하나?”
기억한다. 그랬기에 더욱더 괴로웠다.
차라리 자신도 모든 것을 잊었으면 좋으련만. 전생의 기억이 깨어나도 후생의 기억이 남아 아델을 괴롭혔다.
과거 헤이른이 자신에게 어떻게 웃어 주었는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되새기고 되새겨 남은 기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울면서 소리치고 싶었다.
어째서 자신을 버렸냐고. 왜 그렇게 했어야만 했느냐고.
그래도 아델은 참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론슈카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그 말에 헤이른이 천천히 다가와 아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잘 잊히는 얼굴은 아닌데.”
그야 그렇겠지. 그러니 철없는 아델도 헤이른의 얼굴에 반해 론슈카를 가지고 평생 그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에게는 하룻밤의 유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말이다.
“진짜 모르는 건가.”
느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다면 유혹한다고 해도 좋을 목소리였다.
“모르는 척하는 건가?”
몸에 가벼운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다.
하긴 론슈카는 아델보다 아빠인 헤이른을 더 닮았다. 비록 화상 자국이 선명히 자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보면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을 들켰다고 생각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모릅니다.”
아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헤이른은 눈웃음을 살살 치며 아델을 달래려고 들었다. 사실대로 말해 보라고, 지금이 기회라고. 거짓으로 아델을 농락하려 들었다.
“론슈카, 내 아이지?”
그렇지만 그 말에 넘어가기엔 이미 많은 고통을 겪었다. 모든 것이 늦었다.
차라리 전생을 기억하기 전에 나타났으면 모를까. 지금의 아델에겐 그 어떠한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아니요, 론슈카의 아빠는 죽었어요.”
당신은 이미 내 마음속에서 죽었다. 죽은 지 오래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자는 얼굴 한번 마주친 로잘린의 아빠,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두근거리던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죽었다고?”
“네.”
내내 웃는 낯이던 헤이른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고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무언가가 들끓는 것 같았다.
과거에는 그렇게 매달렸으면서 지금 이 반응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있자니, 아델이 그대로 그를 스치고 지나가려 하였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엉겁결에 팔목을 잡았다.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팔목은 지나치게 가느다랬다.
‘예전에도 이랬던가.’
잘 모르겠다. 오래된 기억은 파편만이 남아 떠오르는 것은 많지 않았다.
“놓아주세요.”
생각에 잠긴 헤이른의 귀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하십니다.”
무례하다고. 예전에는 그렇게 매달리던 주제에. 헤이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아는 걸 모르는 척하면 마음은 편한가?”
헤이른의 말에 아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여자가 남자의 힘을 이겨 내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제법 절박해 보이는 그 모습에 흥미가 돋아났다.
‘예전에는 그리 쉬웠는데.’
그리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짓이지?”
복도 저편에서 나타난 루카스가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헤이른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자라면서 육체적 훈련을 게을리해 본 적이 없는 헤이른이었으나, 상대는 손꼽히는 기사다.
밀려오는 통증에 손에서 힘이 빠지자마자 아델이 잽싸게 손을 빼내었다. 그런 아델을 루카스가 자신의 뒤로 감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적어도 저택에서는 얌전히 지내길 바란 게 내 실수였나?”
헤이른은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손목을 털어 냈다.
“난 충분히 얌전히 있어 줬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루카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내 저택에 머무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게 얌전히 지내는 거라고?”
“함부로?”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건 저 여자겠지.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며, 모르는 척하는 저 모습을 보라.
뒤로 물러난 아델에 그를 보호하는 루카스까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연 것은.
“아델,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거지? 그날을 기억하는 건 나뿐인가?”
헤이른의 말에 굳어 있던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만해.”
루카스가 더 입을 열려는 헤이른을 만류했다.
“왜? 내 입으로 내가 말도 못 하나?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닌데?”
빈정거림에도 루카스는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 섰다. 헤이른이 뭐라 해도 비켜설 기색이 아니다.
여기서 더 대치해 봤자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헤이른은 이번엔 그냥 물러나기로 했다. 저택에 머무르는 한, 시간은 더 있었으니 말이다.
“좋아. 그럼 나는 이만 물러나지. 하지만 아델,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거야.”
그 말을 끝으로 헤이른은 돌아섰다.
헤이른이 사라지고 나자 적막한 복도에는 아델과 루카스만이 남았다.
“안색이 좋지 않군. 좀 쉬는 게 낫겠어.”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헤이른이 하는 걸로 보아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무슨 관계인가. 왜 이리 하얗게 질려서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 외에도 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입 안에 맴도는 질문을 뱉어 내지 못했다. 루카스 본인과 아델은 아직 그런 질문을 할 사이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쉬어도 좋다.”
“일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아무리 봐도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방으로 들어가서 쉬어.”
“일할 수 있다니까요.”
“고집부리지 마.”
루카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아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 왔다. 이어 아델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러면서 뒤돌아서는데, 그 어깨가 유독 여려 보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저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결국 아델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아니까.
루카스는 멀어지는 아델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둘의 사이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대체 그녀와 헤이른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