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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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놀이가 몇 번 반복되자 로잘린은 규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러자 등 부분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내 뒤에 수건이 떨어지면 어쩌지?

로잘린은 잔뜩 긴장했다. 그것은 레온도 다르지 않았다. 파티 주인공인 론슈카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노래에 맞춰 박수를 칠 뿐이었다.

“론슈카는 이거 해 봤어?”

“아니, 처음.”

너무 담담해 보여 물어보니 론슈카도 처음이라고 하였다.

그때였다. 로잘린의 등 뒤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당황하며 뒤돌아보니 뒤에 수건이 놓여 있었다.

“로잘린, 달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로잘린은 수건을 드는 것도 까먹은 채 열심히 달렸다. 어린애가 쫓아온다고 천천히 달리던 정원사 베인이 금방 잡혔다.

“허허, 다시 술래구먼.”

숨이 차서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렇게 달려 본 적은 훈련 외엔 처음이었다.

로잘린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활짝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다들 흐뭇하게 웃으며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마법같은 시간이었다.

신나게 논 아이들은 금방 지쳤다. 레온은 졸린 눈을 깜박이며 방으로 돌아갔고, 로잘린도 시녀의 안내를 받아 사라졌다.

예쁘게 차려입은 옷이 엉망이 되었건만 기분이 좋은지, 로잘린은 자리를 뜨면서도 내내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아델은 깊은 한숨을 삼키며 잠투정을 하는 론슈카를 업었다. 여기 오면서부터 잘 먹고 잘 지내서 그런지 이제 많이 묵직하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잘 보낸 것 같았다.

비록 과거의 그 사람을 만났지만, 감정을 제법 잘 숨겼다. 아이들은 즐겁게 놀았고, 론슈카의 생일을 망치지 않았다. 적어도 아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론슈카는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특히 엄마에 대한 부분에서는.

“엄마.”

“응.”

“그 사람 싫어?”

그 말에 아델은 잠시 발을 멈췄다.

“누구?”

“빨간 머리 정령사.”

응, 싫어. 증오해. 그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걸 론슈카에게 그대로 말할 순 없었다.

“아니,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싫어해?”

“정말?”

“정말.”

괴로워하는 건 아델 혼자만으로도 족했다. 론슈카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델은 모든 걸 감추기로 했다. 자신만, 자신의 마음만 죽이면 모두 해결된다.

증오도, 미움도 다 덮어 두고 잊자. 이 풍랑이 치는 거친 마음을 감추자.

론슈카의 아빠는 죽었다고 생각하자. 그는 론슈카를 불행하게 할 사람이다.

아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누르고, 또 내리눌렀다.

“거짓말.”

“진짜야.”

다행히 론슈카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아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작게 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하긴 또래 아이랑 제대로 놀아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을 테니까.

아델은 아이들을 위해 아는 모든 놀이를 아낌없이 털어 냈다. 고맙게도 생일 파티에 참가해 준 사람들도 그에 협조해 주었다.

‘부디 론슈카에게 즐거운 생일이 되었기를.’

아델은 간절히 바랐다.

* * *

방으로 돌아온 헤이른은 차근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기억을 세세하게 더듬은 결과,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지만 당시 보았던 여자와 지금 아델은 닮은 듯 닮지 않았다. 그래서 헷갈렸다.

‘고민할 필요 있나.’

헤이른은 위대한 웨더필드 가문의 가주였다. 그 영향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었다. 알고자 하면 뭐든 알 수 있단 소리였다.

그는 전서구를 이용해서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전에 내가 들렸던 마을들을 조사해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젊은 시절, 수련이라는 명목 아래 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짧게 만남을 가졌던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문득 론슈카의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가 생각났다. 얼굴에 화상을 입긴 했지만, 만약에 화상 자국이 없다면 어떤 얼굴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상상 끝에서 헤이른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어쩌면 좀 더 쉽게 데려갈 수 있겠군.’

정보만 들어오면 그다음은 아델을 떠보면 된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던 게 사실로 밝혀지면, 론슈카는 헤이른, 그의 것이 된다.

앞으로도 웨더필드 가문의 부흥이 약속되는 것이다.

* * *

론슈카가 잠든 뒤, 아델은 키슈가 건네준 서류를 다시 살펴보았다.

서류만 봐도 알겠지만, 헤이른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제국에서 세력이 강한 후작가의 가주. 위대한 정령사. 그가 가진 것은 아델이 가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

‘들키면 안 돼.’

들키면 속절없이 론슈카를 빼앗길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아델은 평민이고, 그는 귀족이었다. 평민이 귀족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론슈카가 그의 아들인 게 밝혀지지만 않는다면 루카스가 막아 주겠지만, 만약에 밝혀진다면 그로서도 막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보내면 안 돼.’

론슈카는 더, 더 행복해져야 한다. 제 자식을 도구로 여기는 헤이른 같은 자에게 보낼 수 없었다.

설사 론슈카가 웨더필드가에 가더라도, 그건 아이가 좀 더 자란 후여야 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러니 지금은 안 된다.

‘시기상으로는… 론슈카가 로잘린의 동생이 되는 건가.’

배다른 동생이지만 말이다. 아델은 서류를 덮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묻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평소의 아델로 돌아와 있었다.

* * *

몇 날, 며칠이 지나갔다.

루카스는 차가운 얼굴로 헤이른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용건을 꺼낼 때도 되지 않았나?”

사실 이미 용건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용건을 전해 주기로 한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답답했다. 아직 론슈카를 보내는 게 옳은지 고민 중이었기에 더 그랬다.

“아냐,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그때는 언제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루카스의 목소리가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머지않았으니 걱정 말게.”

헤이른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회색빛 하늘에는 어두운 색의 먹구름이 가득 차 있었고,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빗방울은 곧 폭우가 되었다.

내내 밖에서 놀던 아이들도 오늘은 실내에 있었다. 레온은 실내 연무장에서 검술을 수련하였으며, 론슈카는 그 옆에서 명상에 잠겼다.

신경전을 벌이는 어른들을 뒤로한 채 로잘린은 비가 떨어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직 주지 않은 론슈카의 선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가고, 늦은 오후.

저택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똑똑- 하는 나직한 울림에 마중 나간 시종이 마주친 건 풀을 먹인 검은색 우비를 뒤집어쓴 남자였다.

“누구십니까?”

“웨더필드가의 가신입니다. 가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짧은 확인 절차를 거친 뒤에 그는 저택 안으로 들여졌다. 우비를 벗고 물기를 닦아 낸 그는 곧바로 헤이른에게로 향했다.

“가주님.”

헤이른을 보자마자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 알버트. 알아오라는 건?”

“전부 알아 왔습니다.”

남자, 알버트는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헤이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을이 깊은 숲속에 있어 다소 시일은 걸렸지만, 독특했던 모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다.

‘아, 아델 말입니까? 기억하지요. 어렸을 때는 참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 아빠가 누군지 모를 아이를 낳고 이상해져 갔지요.’

‘기억해요. 끔찍한 아이였어요. 그 아이가 있는 곳에선 종종 불이 났거든요. 틀림없이 악마의 아이였을 거예요.’

무지한 사람들은 돈 몇 푼에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악마 들린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낳고 미쳐 간 엄마.

아이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학대받았다. 그 대상 중에는 엄마도 있었다. 이야기를 총합해 보면 그러했다.

‘아이의 아빠요? 몰라요. 그러고 보니 마을에 잠시 머물렀던 잘생긴 청년과 잘 지내는 것 같던데. 그 청년이 아닐까요?’

그러다 주변에 관심이 많은 수다쟁이를 통해 그런 정보를 얻게 되었다.

‘맞는 것 같아요! 그 남자가 사라지고 얼마 뒤에 아델이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리고 아델이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알버트는 자신이 들은 모든 것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헤이른은 그동안 묻어 두었던 기억의 일부를 떠올렸다.

‘사랑해요.’

풍성한 갈색 머리를 가진 여자가 눈을 접으며 말했다. 언제나 다람쥐같이 동그랗던 눈동자가 초승달같이 휘어지는 모습은 제법 보기 좋았다.

‘사랑해요.’

사랑에 눈먼 여자는 마을을 지나던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어리석은 여자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 어리석음 덕분에 헤이른 자신은 이득이 생겼으니 말이다.

‘론슈카는 내 아이다!’

젊은 날의 불장난. 그 결과로 태어난 불쌍한 아이 론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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