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나?’
헤이른은 혀를 차며 닫혀 가는 문 사이를 바라보았다.
뭐, 그래도 로잘린은 남았으니까. 아주 눈치 없는 아이는 아니니 제 역할을 똑바로 해낼 것이다.
그러다 문득, 꼿꼿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색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참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처음 보는 것일 텐데 묘하게 낯이 익었다. 게다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나름 감춘다고 감춘 것 같은데 헤이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마굴 같은 사교계에서 지낸 세월이 몇이던가. 이 정도쯤이야.
‘어디서 봤더라?’
문제는 그게 기억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응을 봐선 딱히 좋았던 기억은 아닌 듯한데, 어디 그런 작자가 한둘이던가.
헤이른은 이제는 완전히 닫혀 버린 문을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깐깐하군. 같은 정령사로서 축하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능글맞게 말하는 모습에 루카스가 헤이른을 노려보았다.
“축하는 됐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건 론슈카 본인이 정할 일이지.”
“사용인들끼리 모여서 하는 파티다. 우리 같은 사람은 참여하지 않는 게 나아.”
“자네가 스승인데도?”
“그래.”
거짓말. 원래는 참여하려고 했던 게 뻔히 보였다. 그러다 자신이 온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겠지.
아니면 여기까지 선물을 들고 찾아올 리가 있나. 헤이른은 피식 웃었다.
“제자와 스승의 사이가 멀군.”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가까울걸?”
“난 더 가까워질 자신이 있는데.”
“헤이른, 그만둬.”
“그만둬야 하는 건 그쪽이지.”
헤이른은 원하는 건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걸 방해하는 루카스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원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작자니.
“나중에.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그때 설득하도록 해.”
아델이 자료를 건네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제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때문에 루카스는 최대한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걸 내가 굳이 허락받아야 하나?”
“싫으면 나도 전력으로 방해하도록 할 거다. 이곳이 내 저택이라는 걸 기억하도록 해.”
루카스가 하는 말에 헤이른은 손을 들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러고는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남은 루카스는 식당 문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나중에 다시 한번 론슈카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 * *
“엄마?”
론슈카는 재차 엄마를 불렀다. 엄마의 상태가 이상하다. 아까 붉은 머리 정령사를 보았을 때부터.
“론슈카?”
“엄마, 아파?”
“아니,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 로잘린이라고 했지? 이왕 생일 파티에 왔으니 같이 놀자.”
아델은 애써 상냥하게 웃으며 로잘린에게 말했다.
너무나도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었지만, 론슈카의 첫 생일 파티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 내려고 애썼다.
“이리 오렴.”
아델의 말에 로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안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생일 선물이에요.”
“생일 선물?”
아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것을 받아 론슈카에게 넘겨주었다. 이를 잠시 묘한 표정으로 보던 론슈카가 상자를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그 안에 있던 돌이 영롱한 빛을 내며 존재감을 뽐냈다. 가공된 보석이라기보다는 원석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너무 비싼 게 아닐까? 이런 건 거절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그 남자가 준비한 것일 텐데. 그에게서는 동전 한 푼이라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론슈카의 생일이야.’
머리가 아파 왔다. 날카로운 것이 뇌를 쿡쿡 쑤시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이상하다.
론슈카는 그걸 깨달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왜 그러냐고, 엄마도 저 사람이 싫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왜냐하면, 오늘을 위해 엄마가 내내 준비해 온 것을 아니까.
론슈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를 아니까. 꾹 참았다. 대신 웃으려고 애썼다. 최대한 밝게 말이다.
* * *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로잘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당부한 일을 잘해 내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예쁜 옷을 입고 웃으려 애썼다.
자신이 할 일은 단 하나, 최대한 예쁘게 웃고 생일의 주인공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호감을 사면 더 좋고.
그뿐이었다. 그뿐이었는데 이건 뭘까?
로잘린은 상냥하게 웃는 여성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마치 한낮의 햇살 같은 부드러운 미소였다.
이어 가까이 다가오는 손을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미소같이 따뜻한 손이었다.
손은 로잘린을 뿌리치지 않았다. 외려 맞잡아 오며 식탁으로 안내해 주었다.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음식은 로잘린의 생일에 보던 것에 비하면 초라했다. 딱히 꾸미지도 않은 음식이 접시 위에 그득히 올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웃으면서 그걸 덜어 먹었다.
시끌벅적한 공간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뭐 먹고 싶은 것 있니?”
그 말에 아무거나 가리키니 접시 위에 그걸 듬뿍 얹어 주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먹어 보니 무척 맛있었다. 웨더필드가의 요리사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더, 더 주세요.”
조심스럽게 내민 접시에 음식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걸 얌전히 먹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니 론슈카와 레온이 보였다.
둘은 로잘린과 다르게 얌전히 먹고 있지 않았다. 입 주변은 묻은 음식으로 더러웠고, 포크를 삽처럼 썼다.
그런데 그게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저렇게 먹으면 더 맛있나?’
로잘린은 망설이다가 따라 해 보았다. 입 안에 가득 찬 음식에 목이 말라 와 주스잔을 들어 단숨에 삼켰다.
다 마신 잔을 내려놓자 금방 다시 주스가 따라졌다.
“맛있니?”
다정하게 물어 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을 빌리면 시끌벅적하고 지저분하고 어수선하다.
그런데 어째서 음식은 이렇게나 맛있고, 기분은 들뜨는 걸까?
“너 이름이 뭐였지?”
레온이 로잘린에게 다시 이름을 물었다.
“로잘린!”
내뱉은 목소리가 품위 없이 통 튀었다.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으나, 그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난 레온. 레온이야.”
“으응. 만나서 반가워, 레온.”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미리 알려 줬으니까. 하지만 로잘린은 처음 듣는 사람처럼 웃었다.
“생일 축하해, 론슈카!”
“축하해!”
중간중간 쏟아지는 축하의 말이, 어디선가 팔랑이며 떨어지는 종이꽃이. 화사하게 눈앞을 메우고 귀를 채웠다.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잘린은 자신의 생일을 떠올려 보았다.
넓은 파티장의 가장 높은 의자. 그곳에 앉아 수많은 사람의 축하와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로잘린은 알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선물을 주면서도 그 시선은 아버지를 향해 있었다. 이건 로잘린을 향한 선물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걸 받아도 기쁘지 않았다. 그보다는 론슈카가 받는 작은 선물이 더 값져 보였다. 작은 화분, 노트 한 권. 용도를 알 수 없는 귀여운 주머니, 과자가 든 바구니 등등.
로잘린은 부끄러워졌다. 자신도 선물을 들고 오긴 했지만, 그건 아버지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론슈카.”
그래서 옆에서 볼을 부풀리며 음식을 먹는 론슈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붉은 눈동자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뭐가? 이번에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 선물을 가지고 오지 못했어.”
“저게 선물 아냐?”
레온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저건 아버지 거.”
“아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레온이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내 건 나중에 줄게.”
“안 줘도 되는데.”
음식을 꿀떡 삼킨 론슈카가 말했지만, 로잘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줄 거야.”
“뭐 줄 건데?”
“뭐든.”
로잘린은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선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뭘 주면 좋아할까?
분명 남에게 무언가를 줘야 하는 것인데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자 어마어마한 크기의 푸딩이 나타났다. 흔히 보는 브레드 푸딩이 아닌 노란색의 탱글탱글한 푸딩이었다. 갈색의 시럽을 얹은 푸딩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맛있어서 잔뜩 먹었다.
“자, 다 먹었으면 놀아 볼까?”
논다고? 뭐 하고?
로잘린은 엉겁결에 일어나 사람들을 따라갔다. 중간에 헤매니까 아델이 손을 잡아 주었다. 반대편 손은 론슈카가 단단히 잡고 있었다.
“수건 돌리기 좋아해?”
수건 돌리기? 로잘린은 그런 건 알지 못했다.
“먼저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술래를 뽑는 거야. 그리고 술래가 누군가의 등 뒤에 수건을 내려놓아. 그럼 그 사람은 잽싸게 일어나서 술래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쫓아가야 해.”
설명만으로는 조금 아리송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다 같이 동그랗게 둘러앉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옆에는 레온과 론슈카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