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짐의 충실한 신하인 루카스 경을 다시 여기로 데리고 오라.”
처음 황제가 그렇게 명을 내렸을 땐, 헤이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릴 뻔했다.
있던 권력도 뿌리치고 제국을 떠난 어리석은 자를 황제는 진정으로 그리워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돌아오는 것은 거절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엔 헤이른 경에게 부탁하지. 그래도 둘은 친우였지 않은가.”
아무 관계 아닌 사람이 가는 것보단 낫겠지. 황제는 그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는 친구가 되지도 못했고,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말이지.
헤이른은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어떤 거절의 말도 황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고집불통.’
헤이른은 고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황제의 서신을 받았다.
‘그래, 여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며 긴 여행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딸인 로잘린이 헤이른을 찾아왔다.
엄마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
부인과는 어차피 정략 결혼했던 사이였다. 딱히 나쁜 사이는 아니었지만, 좋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아이를 남기고 죽었을 때도 슬프진 않았다. 그저 태어난 아이를 보며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이 아이는 재능이 없다.’
그 귀하다는 정령석을 구해서 사용하고, 온갖 좋은 건 다 먹였는데도 다룰 수 있는 건 하급 물의 정령인 운디네 하나.
심지어 헤이른이 다루는 정령과는 상극이라 불의 정령에게 최적화된 저택에서는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다.
그래도 엄마를 닮아 제법 예쁘게 태어나 나중에 다른 가문과의 혼약에 쓸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로잘린이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헤이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가 필요하다.’
웨더필드 가문을 더 번성시키고,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로잘린이 아닌 다른 아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령사의 능력을 가진 아이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다.
하지만 뛰어나다는 아이들을 데려와 봐도, 찾아가 봐도 하나같이 그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랬는데 말이지.’
지금 여기서 그런 아이를 찾았다. 얼굴에 있는 화상 자국이 다소 거슬리긴 하지만, 그 정도야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치료해 줄 수도 있었다.
루카스가 필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었지만, 걱정되진 않았다.
“그 여자가 아이 엄마라 했지?”
보아하니 론슈카는 엄마를 잘 따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엄마만 설득하면 되지 않는가.
세상에 홀리지 못할 사람은 없다. 황금, 권력, 그도 안 되면 외모를 이용하면 된다.
헤이른,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쥐여 줄 수 있었다. 그 모든 걸 거부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일이 더 쉬워졌군.”
헤이른은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그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무수히 많았으므로. 론슈카의 엄마를 설득하지 못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자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시녀가 깨끗이 씻기고, 치료까지 해 준 모양이었다. 훨씬 봐 줄 만한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그래, 로잘린.”
로잘린도 그 카드 중 하나였다.
웨더필드 후작가. 그런 유서 깊은 가문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차기 가주가 된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다.
물론 처음엔 좀 더 작은 것부터 제시하겠지만.
“쯧, 얼굴에도 상처를 입었었구나.”
헤이른의 말에 로잘린이 거즈를 붙인 뺨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아니. 아니지, 로잘린. 내가 그랬잖니. 얼굴은 다치지 말라고. 귀족 영애 꼴이 이게 뭐더냐.”
“죄송합니다.”
로잘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으나 헤이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로잘린은 얌전하게 말을 잘 듣는 아이니까.
겨우 그 이유 하나만으로.
* * *
이번에 아델은 좀 더 일찍 눈을 떴다. 흑마법사에게 주먹으로 맞긴 했으나, 그의 마법은 루카스가 몸으로 막아 주어 내상을 입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곰 때문에 다쳤을 때와는 달리, 아델은 더 건강한 상태였다. 저택에서 제대로 먹고 자면서 살았으니까.
아델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론슈카를 보았다.
론슈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지만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미안해.”
아델이 말했다.
론슈카에게는 살라고 말하며 자신을 희생을 하려 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론슈카가 입었던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자꾸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아델은 마음을 담아 재차 말했다.
“정말 미안해, 론슈카.”
“다음엔 그러지 마.”
뭔가에 걸린 것처럼 거친 목소리가 론슈카의 입에서 나왔다.
“절대 그러지 마.”
“노력해 볼게.”
“노력이 아니라 약속해 줘.”
“미안해, 론슈카.”
“왜 사과해?”
세상엔 절대적이란 건 없으니까.
아델은 다음에도 론슈카가 위험에 처하고, 자신이 몸을 던져서 구할 수 있다면 똑같이 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을 구한다고 론슈카가 다치거나 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마.”
론슈카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아델에게 조심스럽게 안겼다.
* * *
루카스는 별생각 없이 열린 문 안을 들여다봤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석상처럼 굳어서 그 모든 걸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아델이 론슈카를 괴롭힌 것은 맞다. 그녀 역시 인정한 바였다.
하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달라지고자 하고 있다.’
아델이 지은 죄를 용서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죄를 용서하는 건 론슈카가 되어야 맞다.
자신은 그저 아델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투영했을 뿐이었다.
언제나 바뀌지 않는 어머니.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도구로 생각했던 어머니.
죽어도 사랑 한 조각 주지 않을 것 같던 어머니 말이다.
하지만 아델은 그의 어머니와 달랐다. 이제는 조금쯤 그녀를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 안에 들린 작은 선물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대충 상처만 수습하고 곧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를 조사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흑마법사는 딱히 목적을 가지고 아이들을 납치한 게 아니었다. 그저 실험체가 필요했을 뿐이고, 하필이면 재수 없게 거기 있던 아이들이 걸렸을 뿐이다.
그렇게 정보를 취합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게 하나 있었다. 아델이 외출한 이유. 그건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보나마나 론슈카겠지.’
그 답은 맞았다. 이어 곧 론슈카의 생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델은 론슈카의 생일 선물을 사려고 굳이 외출을 나간 것이었다.
다행히 가게 주인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 주워서 보관해 두어 다시 가져왔다. 이제 이걸 론슈카 몰래 다시 아델에게 전해 줘야 했다.
일단 선물은 전해 준다 치지만, 헤이른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냥 안 된다고 말리기엔 헤이른의 조건이 너무 좋았다. 자신의 말을 믿으며 따르라고 하기에는 둘 사이의 신뢰가 깊지 않았다.
루카스는 깊게 숨을 내쉬며 문을 두드렸다.
“당분간 더 쉬라고요?”
난데없는 말에 아델이 눈만 깜박였다. 확실히 아픈 건 맞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서서 걸어 다닐 수 있었다. 하던 일도 마저 할 수 있었고. 그냥 서류를 정리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델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왜요?”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루카스는 이야기를 정리했다.
“제국에는 웨더필드라고 하는 정령사 가문이 있다. 그 가문의 현 가주가 헤이른이라는 자인데, 론슈카를 탐내고 있어.”
“정령사 가문이면 좋은 것 아닌가요?”
“보통은 그렇겠지. 하지만 헤이른, 그자는 뱀 같은 작자야. 물론 내 말을 전부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많다. 하지만 그 모든 미움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타인을 미워하는 것이 가능한 게 사람이었다.
그러니 루카스는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못 박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차분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웨더필드 가문이나 헤이른에 대한 자료는 내가 가져다주지.”
아델은 그렇게 말하는 루카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론슈카와 자신을 구해 주고, 살게 해 주는 사람. 게다가 루카스는 론슈카를 언제나 진심으로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