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바닥만 내려다보던 레온은 갑자기 들이밀어진 손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후회했다. 아직 아델의 얼굴을 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는데,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 너도 같이 가자.”
어디로요?
그러나 레온은 차마 질문을 하지도 못하고 엉겁결에 아델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닿아 오자 어쩐지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여기 부엌이 어디 있더라?”
“제가 알아요.”
레온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어딘가 삐걱거리는 몸놀림으로 부엌으로 안내했다. 마침 식사 준비 시간은 아닌지라 대부분의 사용인은 쉬고 있었다.
똑똑.
“잠시 부엌 좀 빌려도 될까요?”
요리사는 최근 저택에 소문이 자자한 아델을 금방 알아보았다. 저택의 주인이 처음으로 데려온 여자.
아이 엄마이긴 했지만, 모두의 호기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아직 식사 준비 시간이 남았으니 써도 됩니다.”
“재료도 조금 빌릴게요.”
“뭐가 필요하신가요?”
“빵 조금, 달걀 두 개, 우유, 설탕, 그리고 혹시 바나나나 사과가 있을까요?”
어느 정도 사는 집이 아니고서는 먹기 힘든 과일이다. 그래서 아델은 현생에서는 단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 집이 너무 가난했으니까.
“네, 있습니다. 바나나는 지금 없지만, 사과는 많습니다.”
하지만 태연하게 설탕과 우유, 과일을 요구하는 모습에 요리사는 착각을 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난 모양이라고.
최근 잘 먹어서 반들거리는 피부의 윤기, 차분한 말투, 부드러운 몸짓은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곧 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이 정도 가지고 뭘요.”
금방 재료가 준비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델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손을 씻고 올래? 손 씻는 법은 잘 알고 있지요, 도련님들?”
“자, 잘 알아!”
“저도 잘 압니다.”
둘은 경쟁적으로 손을 뽀득뽀득 씻고 왔다. 아델은 깨끗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 아이들에게 식빵과 커다란 볼을 내주었다.
“먼저 빵을 찢어 줄래?”
먼저 빵에 손을 댄 아이는 론슈카였다. 론슈카는 엄마가 말한 걸 반드시 해내겠다는 듯이 빵을 쭉쭉 찢었다. 질 좋은 하얀 빵이 닭 가슴살처럼 찢어졌다.
이어 레온이 남은 빵을 슬며시 집어 들더니 론슈카를 흉내 냈다.
“잘하네!”
사소한 칭찬이었는데도 론슈카는 씨익 웃었다. 레온도 어쩐지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신나게 찢은 빵은 오븐용 그릇에 들어갔다.
“빵을 바닥에 깔아 주자. 그래, 그렇게.”
그런 후 미리 준비한 우유, 설탕, 계란을 섞은 걸 부었다. 빵이 축축하게 젖어 들자 이번에는 미리 잘라 둔 사과를 위에 얹게 하였다.
두근두근하던 심장은 이제 차분하게 뛰고 있었다. 레온은 이게 꿈인지, 아닌지 조금 구분이 어려웠다.
분명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여기서 론슈카의 엄마랑 요리를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 재밌었다.
“사과 더 넣을까요?”
나중에는 슬쩍 아델에게 묻기도 했다.
“빵을 한 단 더 쌓고 넣어 보자.”
“네.”
내내 꾹 다물려 있던 레온의 입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푸른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론슈카도 무척 신나는 모양이었다. 레온과 싸운 걸 잊은 듯이 아델을 열심히 도왔다.
“자, 그럼 이제 이걸 오븐에 넣어 볼까?”
그릇을 오븐에 넣고, 부엌에 있는 작은 식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우유를 내주었다.
요리사에게 얻어 낸 꿀까지 조금 넣자, 달달한 우유가 지친 몸에 스며들었다.
레온은 따뜻한 컵을 손으로 감싸며 우유를 조금 맛보았다. 달고 맛있다.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스승님이 주던 우유의 맛이었다.
투둑.
레온의 눈에서 완두콩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흐윽, 흑.”
아이의 흐느낌에 요리사들이 힐끔 보긴 했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아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레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신 말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론슈카를 부러워했던 것이다.
부모님이 없어도 스승님이 있으니까. 훗날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는데.
“부러웠어요. 나, 난 엄마가 없는데.”
레온이 훌쩍이며 말을 했다. 그 와중에도 소리를 죽이려고 애쓰는데, 소리 없이 우는 법을 배운 아이는 애처로웠다.
“레온.”
아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레온.”
론슈카는 상냥한 엄마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들었다.
‘레온을 쓰다듬지 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론슈카는 곧바로 아델에게 다가가 치맛자락을 잡고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론슈카?”
“시, 시, 싫어! 마, 만지지 마!”
작은 몸이 가늘게 떨려 왔다.
지금까지 애정을 쏟아부으려고 애썼지만, 아직 론슈카는 모든 것을 불안해했다. 그걸 알기에 아델은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숙였다.
“론슈카, 왜 그러니?”
“어, 엄마가 레온을 만지는 게 시, 싫어!”
“그래, 그렇구나.”
론슈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요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
“엄마 말 좀 들어 보겠니?”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론슈카도 알에서 새가 부화하듯이 껍질을 깨고 나와 외부로 눈을 돌려야 했다.
“론슈카, 엄마는 론슈카가 다른 사람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왜, 왜?”
난 엄마만 있으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고스란히 읽혔다. 맹목적인 애정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지만, 그만큼 가슴도 아팠다.
“론슈카가 행복하길 바라니까. 엄마는 론슈카의 세계가 더 넓어졌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과도 소통하는 법을 배웠으면 해.”
“왜, 왜 그래야 해?”
“그러면 론슈카가 더 행복해질 수 있거든.”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에 론슈카의 표정이 풀려 갔다. 아직 모든 걸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만은 와 닿았다.
론슈카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 그럼 조금만.”
아이가 처음으로 양보를 배웠다. 그게 기특해서 아델은 론슈카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이어 몸을 돌려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은 눈이 녹아내릴 것처럼 울고 있었다.
“레온.”
아델은 레온에게 다가가 론슈카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안아 주었다.
“그만 울어. 이러다 눈이 녹아내리겠다.”
“하지만!”
“괜찮아. 원래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라는 거니까. 대신 싸우고 나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사과하기.”
그 말에 레온이 론슈카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미안해, 론슈카.”
론슈카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사과를 받아 주었다.
아델은 수건에 물을 묻혀 레온의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그 과정에서 론슈카가 어리광을 부렸지만, 그도 받아 주었다.
그사이, 오븐 속에 넣어 둔 브레드 푸딩이 노릇하게 익었다. 그걸 조심스럽게 꺼낸 아델은 커다란 숟가락으로 푹푹 떠서 작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푸딩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그걸 아이들 앞에 내려놓자 둘 다 눈이 반짝인다.
“자, 먹을까?”
“네.”
레온은 푸딩을 숟가락 가득 펐다. 말캉하고 따끈한 푸딩에서는 희미하게 사과 향이 났다. 론슈카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푸딩을 푹 퍼서 입에 넣었다.
“앗! 식혀 먹어야지, 론슈카.”
그러고는 놀라서 파닥거리다가 아델이 떠 준 물을 마시고 나서야 진정했다. 레온은 그걸 보고 막 입에 넣으려던 숟가락을 멈추고 호호 불었다.
‘빨리 입에 넣고 싶어.’
차분히 식혀서 입에 넣자 달콤한 푸딩의 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맛있니?”
“맛있어요.”
레온은 우물우물 열심히 먹었다.
론슈카는 그사이 한 그릇을 다 해치우고 더 달라고 그릇을 내밀고 있었다. 별거 아닌 요리인데도 이렇게 열심히 먹는 아이들을 보자 괜히 뿌듯해졌다.
“정말 맛있어요.”
레온은 먹는 내내 맛있다는 말을 멈추지 못했다.
이상하다. 스승님과 함께 비싸고 좋은 음식도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이게 더 맛있었다. 한동안 부엌에는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레온과 론슈카는 서로 사과를 했고, 좀 더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론슈카는 툴툴거리긴 했지만 레온을 멀리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엄마인 아델에게 접근하면 인정사정없긴 하지만 그나마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