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빨리 나아서 일을 해야 할 텐데.’
아델은 끙끙대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이 몰려오는 얼굴의 미간이 구겨졌다.
곰 발바닥, 불꽃도마뱀 꼬리, 와이번의 발톱을 달인 것 등등 마들렌에게 물어본 건강식의 정체를 최근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걸 먹었다니! 심지어 잠들어 있을 때도 조금씩 먹였다고 했다.
전생에는 징그러운 건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한숨을 폭 쉬어 보았지만, 앞으로도 당분간은 보양식을 계속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보양식 재료는 많이 남아 있어요. 안심하세요!”
마들렌은 그렇게 말하며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보양식 재료면 비쌀 텐데.’
과분한 호의였다. 그러니 얼른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어 줘야 하는데.
아델은 하품을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약기운 때문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 * *
루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사과를 하러 갔는데, 목에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련님.”
마침 론슈카를 데리고 돌아온 마들렌이 멈춰서 루카스를 불렀다.
이제 모든 사정을 알게 된 시녀장은 그를 천하의 불한당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른 사과하기를 재촉했으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루카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사이, 마들렌의 곁에 있던 론슈카는 잽싸게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말은 붙여 보셨어요?”
“아니.”
붙이긴 했지만, 마들렌이 원하던 말은 아니기에 아니라고 답했다. 마들렌의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다음에는 꼭 말을 붙여 보세요. 알았죠?”
“노력해 보지.”
“그럼 그것도 모르시겠네요.”
“모르겠지.”
“제가 슬쩍 말해 볼까요?”
마들렌이 은근한 표정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아델이 쓰러지고 나서 루카스는 종종 저택을 비웠다. 몸에 좋다는 약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으나, 나중에는 제법 적극적으로 나서서 구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레온의 수업도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아니, 그건 절대 말하지 마.”
루카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나오자 마들렌도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 * *
그렇게 아델이 깨어난 지 삼 일 후, 드디어 론슈카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론슈카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연무장에 나와 루카스를 노려보았다.
“오늘부터 론슈카 너도 레온과 같이 수업을 받을 거다.”
“무, 무, 무슨 수업?”
“일단…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령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하지.”
“이, 이거?”
론슈카는 언제나 그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작은 불꽃을 가리켰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루카스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 그거. 그걸 정령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령을 다루는 자를 정령사라고 하지. 귀한 대접을 받는 이들이다.”
외진 곳의 시골 마을에서 학대받을 능력이 아니었다.
“귀, 귀한 대접?”
“그래.”
“그, 그, 그게 뭔데?”
“언제나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좋은 침대에서 자고, 원하는 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지.”
“어, 엄마랑?”
론슈카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래, 네 엄마와.”
“그, 그, 그럼 할래.”
“그래, 그 의지는 좋다. 하지만 말투는 교정할 필요가 있겠군. 키슈에게 화술… 그러니까, 말 선생님을 구해 두라고 이르겠다.”
“마, 마, 말이, 이상해?”
“조금.”
“배, 배울게!”
그래야 귀한 사람이 되어 엄마랑 같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 론슈카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들지.”
루카스는 먼저 론슈카에게 연무장을 뛰어서 세 바퀴 돌라고 했다.
“레온, 너는 열 바퀴.”
“네!”
둘은 나란히 서서 똑같이 출발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던 레온과 론슈카의 속도가 같을 리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론슈카는 뒤로 처졌다.
“허, 허억.”
론슈카는 무거운 발을 끌며 어떻게든 레온의 뒤를 따라가려고 했다.
‘엄마랑 함께.’
그 말만을 되새기며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렇게 세 바퀴를 뛰고 나니 녹초가 되었다.
멈춰서 레온을 바라보니 그는 아직도 멀쩡하게 뛰고 있었다.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어쩐지 조금 심술이 났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쟤는 왜 멀쩡한 걸까?
론슈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대뜸 다시 뛰기 시작했다.
“론슈카?”
루카스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그러다 결국은 힘이 빠져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론슈카?”
앞서가던 레온이 놀라서 달려와 론슈카를 살폈다.
“괜찮아?”
“괘, 괘, 괜찮아.”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 론슈카는 태연하게 옷을 털다가 뒤늦게야 손바닥이 까진 걸 발견했다.
‘다쳤네?’
상처를 의식하자 뒤늦게야 욱신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론슈카는 머뭇거리다가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바지에 닦으려고 했다. 그걸 레온이 기겁해서 잡아 말렸다.
“상처를 아무 데나 문지르면 안 돼!”
그러고는 그대로 론슈카의 손을 잡고 의원이 있을 방을 향해 걸어갔다. 루카스가 뭐라고 도움을 주기도 전의 일이었다.
“레온이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 또래라 그런가.”
일찍 철이 든 아이. 레온은 그런 아이였다.
그 때문에 사람을 잘 믿지도 않고, 언제나 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어떻게든 끌어내 보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저택에 사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레온에게 친절했지만, 아이는 언제나 말을 높이는 것으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 스승인 루카스 정도였다.
“그랬는데…….”
론슈카에게 하는 걸 보니 걱정을 한시름 덜어도 될 것 같았다.
* * *
뚜벅뚜벅.
레온은 론슈카의 손목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어찌나 말랐는지 한 손에 잡히는 손목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스승님의 말로는 이것도 그나마 살이 오른 거라던데. 레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뒤따르는 론슈카를 슬쩍 돌아보았다.
상처가 아플 텐데 울지 않는다. 참을성이 강한 아이인가? 레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원의 방문을 두드렸다.
“의원님.”
“오,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
“론슈카가 다쳤어요.”
“다쳤다고요? 어디 봅시다.”
의원은 둔탁한 모양새의 안경을 추켜세우며 론슈카의 상처를 살폈다.
“넘어졌습니다.”
“저런, 아팠겠군요. 이리 오세요. 치료해 드리지요.”
의원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론슈카의 손바닥 상처를 치료했다. 먼저 물로 깨끗이 닦은 다음에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른 뒤 거즈를 덧댄 후 붕대를 감았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론슈카는 치료받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움직여 보았다.
저택의 사람들은 이상했다.
그를 보며 비명을 지르지도, 손가락질하지도, 돌을 던지지도 않는다. 전부 보통의 아이를 대하듯이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어쩌면 엄마 말대로 나는 진짜 괴물이 아닌 걸까? 아니라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 줄 리 없잖아.
론슈카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창문 너머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을 보게 되었다.
“꼬, 꽃.”
“무슨 꽃?”
레온이 물었다.
“바, 바깥에 이, 있는 꽃.”
“아, 가까이서 보고 싶어? 그럼 가서 보자.”
레온은 론슈카를 끌고 정원으로 향했다. 아직 수업 시간인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 못지않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이 아이에게 상냥해지고 싶었다.
‘스승님께 나중에 한 번 혼나고 말지 뭐.’
날씨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 불었다. 잘 가꿔진 정원의 꽃밭은 여러 색으로 빛나며 어여쁨을 뽐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론슈카는 대뜸 꽃을 하나 부러트렸다.
“론슈카?”
당황한 레온이 이름을 불렀으나, 론슈카는 그를 무시하고 꽃을 하나하나 꺾어서 모으기 시작했다. 레온은 침착하려 애쓰며 옆에 앉아 물었다.
“뭐 해?”
“꼬, 꼬, 꽃다발.”
여긴 정원사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가꾼 곳인데. 레온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꽃을 꺾는 것보다 여기 두고 자주 보러 오면 되지 않을까?”
“어, 어, 엄마 줄 거야.”
“엄마?”
레온은 저택에 도착한 뒤로 내내 누워 있던 론슈카의 엄마를 떠올렸다.
어쩐지 다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스승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레온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아픈 엄마 줄 거라고 꽃을 꺾는 아이를 어찌 말릴 수 있을까. 결국 레온은 옆에서 론슈카를 거들었다.
“그거보단 저 꽃이 더 예쁜 것 같아.”
‘베인 할아버지, 죄송해요.’
아무래도 나중에 따로 찾아가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엉성하게 모아 둔 꽃이 레온의 도움을 받아 제법 모습을 갖췄다. 크기도 제법 컸다.
론슈카는 완성된 꽃다발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온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의 뒤를 따랐다.
론슈카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제 엄마가 머무르는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통통- 분주히 내딛던 그 발걸음도 방문 앞에서는 얌전해졌다.
‘엄마가 깨어 있을까?’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을 보니 아델이 상체를 세우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