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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도망쳐! 도망쳐!]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있어 온 불들이 외쳤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곰을 붙잡아 두려고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불은 곰을 미쳐 날뛰게 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모든 걸 아델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신히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귀 또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행복해.’

론슈카는 처음으로 행복을 떠올렸다. 아직 어린 그는 앞으로 남아 있을 긴 삶보다, 엄마와 함께하는 짧은 삶을 택했다.

곰이 불 속을 빠져나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프겠지만 괜찮다. 아픔은 언제나 론슈카와 가까이 있었으니까.

대신 그는 엄마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절대로 엄마가 자신보다 먼저 떠나지 않게.

[도망쳐! 도망쳐!]

불의 정령이 간절하게 외쳤다.

크헝!

분노한 곰이 그들을 향해 다시 앞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에도 론슈카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퍽!

두꺼운 가죽을 뚫고 금속이 삐죽 튀어나왔다. 곰이 거칠게 포효하며 몸부림쳤지만 그도 잠시였다. 번개같이 움직인 금속, 검이 몸통을 가르자 곰도 더는 움직일 수 없어졌다. 죽어 버린 것이다.

공포를 안겨 준 것치고 허무하게 죽어 버린 곰의 사체 뒤로 은발의 남자 하나가 보였다.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는 곰의 피를 털어 내고 검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쉬며 쓰러져 있는 모자에게 다가왔다.

“여긴 위험하다.”

남자는 론슈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론슈카는 아델을 끌어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경계하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남자는 론슈카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델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시체?”

“아, 아, 아니야!”

그는 매섭게 소리치는 아이를 무시하며 여인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미약하게나마 가슴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살리려면 빨리 움직여야 해.”

그 말에 론슈카는 아델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 주었던 엄마. 그러나 다시 눈을 떠도 똑같이 사랑을 말해 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이렇게 둘이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더 늦으면 죽는다.”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론슈카는 마음을 굳혔다.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어. 엄마가 웃어 주는 걸 보고 싶어.

다시 깨어나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척 괴로울 것 같았지만, 미약한 희망의 끈이 그를 움직였다.

“사, 살려 주세요. 어, 엄마를 살려 주세요.”

“엄마였군. 좋아, 살려 주지.”

남자는 곧바로 아델의 상태를 살피더니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등에 뿌린 뒤, 그녀를 안아 들었다.

“손이 모자라 너까지 보살필 순 없다. 최대한 빨리 따라와라.”

그리고 남자는 험한 숲길을 그대로 내달렸다. 론슈카는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맨발로 걷기에는 길이 너무 험해 발이 떨어질 것처럼 아파 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버텨 냈다.

그 결과, 셋은 숲과 가까운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 * *

다행히 작은 마을에도 의원은 있었다. 밤중에 반강제로 끌려 나온 그는 등이 피로 흠뻑 젖은 여인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곰에 당했습니다.”

“세상에, 용케도 살았군요.”

의원이 약초와 붕대를 꺼내고 물을 데우는 사이, 남자는 시선을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상태도 심각했지만, 아이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지저분한 발에는 피가 맺혀 있었고, 돌에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발톱이 반쯤 들린 부분도 있었다.

소리 없이 따라오기에 괜찮은 줄 알았건만. 그는 내심 혀를 찼다.

“너도 치료받자. 기본적인 건 나도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이에게 손을 뻗었으나 돌아온 건 거부였다.

“나, 난 괜찮아요.”

아플 텐데 괜찮단다. 어린아이치고는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인내심의 근원이 정상적이지 않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이는 의원에게 치료받는 엄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집요하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상처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애정을 갈구하는 그 시선이 어쩐지 낯익었다.

‘피곤하군.’

우연히 마주치게 된 바람에 구해 주긴 했지만, 그도 시간이 남아돌아 이들을 도와준 건 아니었다. 그래서 좀 더 강압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남자는 아이를 낚아채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아이가 미친 듯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시, 시, 싫어! 싫어!”

“상처는 치료해야지.”

“괘, 괜찮다고 해, 했는데!”

“보는 내가 괜찮지 않다.”

구석에 자리 잡은 남자는 아이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엉망이었다.

아니, 사실 엉망인 건 발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다른 곳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마치 학대받는 아이처럼.

그 사실이 마음을 움직였다.

“어, 엄마 봐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는 엄마를 찾았다.

“그러니 더 치료해야지. 엄마가 깨어나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어, 엄마 속상해?”

“그래.”

“그, 그럼 치료 안 할래.”

론슈카는 조금이라도 엄마에게 관심을 더 받고 싶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이 정도 상처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엄마가 걱정해 준다고 생각하니 외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어디서 다쳐 와도 신경 써 준 적이 없기에 그 점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론슈카는 발을 가린 채 히죽거렸다.

반면 남자는 더 답답해졌다.

“이름이 뭐지?”

“로, 론슈카. 어, 엄마가 그랬어.”

론슈카는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 나는 루카스. 루카스라고 불러라.”

“루, 루카스.”

“그래. 이제 우리는 아는 사이지?”

그런가? 론슈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이라면 여러 가지를 알려 줄 수 있지, 론슈카.”

“으응.”

“너 이 상처들은 어디서 입은 거지?”

론슈카의 시선이 발로 향하자 루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발 말고.”

“너, 넘어졌어.”

이렇게나 많이 넘어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고작 넘어진 것 정도로 생길 만한 상처가 아니다.

게다가 옷도 지나치게 낡고 더러우며 해졌다. 어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같이 있던 어른은 엄마뿐이었으니까. 제일 의심 가는 사람도 엄마였다.

“지금까지는 누구랑 살았어?”

“어, 엄마.”

“엄마가 때렸나?”

“아냐. 아, 안 때렸어.”

그걸 끝으로 론슈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구해 주면 끝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이의 거처도 생각해 봐야 할 모양이다.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기도 찝찝했다. 루카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엄마가 지켜 줬어.”

눈치를 살피던 론슈카가 말했다.

“무엇으로부터.”

“고, 곰. 도, 도망치라고 했어.”

론슈카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마터면 다시는 엄마를 보지 못할 뻔했다. 도망치지 않기를 잘했다. 그러니 이렇게 같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의 판단을 칭찬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카스는 더 판단이 어려워졌다.

“일단, 네 엄마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

그러니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 *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악몽을 꾼 것도 같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론슈카를 잃는 꿈이었다. 필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쯤에서 아델은 잠에서 깨어났다.

퉁퉁 부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가가 뜨거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정신없이 울다가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갑자기 밀려오는 통증에 신음했다.

‘여긴 어디지?’

처음 보는 장소였다. 하지만 적어도 천국이나 지옥 같아 보이진 않았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여 보니 확실하게 감각이 느껴졌다. 자신은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아델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리려 했으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단 하나뿐이었다.

“론슈카.”

거칠거칠하고 작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론슈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조금 떨어진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머리만 빼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다행히 론슈카도 무사했구나. 아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고만 있지?

의아함을 느껴 이름을 불러 보았다.

“론슈카.”

그러자 아이는 천천히 기둥 뒤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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