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을 1년 앞두고 아직 재계약을 하지 않고 있는 ‘킹’의 이적 여부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Noname 1. 이 정도면 팔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듣기로는 스페인의 두 미친 클럽이 300M유로랑 330M유로를 오퍼했다던데.
┗Noname 2. 이봐, 너는 고작 330M유로를 받고 킹을 팔 생각이야? 나 같으면 500M을 줘도 안 팔아! 우리는 셀링 클럽이 아니라고!
┗Noname 3. 2번의 의견에 동의해. 우리는 셀링 클럽이 아닐뿐더러 그 두 클럽보다 못한 게 없어. 지난 4년 동안 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챔스 우승까지 몇 번을 했는데? 명색이 우리가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고!
┗┗Noname 4. 나는 좀 생각이 달라. 킹이 재계약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게 힘들다면 차라리 빨리 팔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거든. 바꾸고 스쿼드를 재정비하는 건 어때?
┗┗┗Noname 5. 하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군. 킹을 팔면 누구로 그 자리를 대체할 건데? 비츠로는 한계가 있어. 게다가 스쿼드 재정비라니.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킹을 판 돈으로 아무 선수나 살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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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ame 21. 가장 최선은 요한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 건데, 사실 조금 걱정이긴 해. 스페인 클럽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은 요한이 발롱도르를 타기 위해 스페인으로 간다고 주장하더라고. 요한이 재계약을 거부하고 스페인으로 간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스페인……이라.
묵묵히 핸드폰의 액정을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 악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근래 재계약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요한을 두고 그가 이적을 할 것이다, 아니면 잔류를 할 것이다 등등 의견이 갈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줄이야.
가끔 반응을 보기 위해 찾아갔던 팬포럼에서 생각지도 못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 레온하르트는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온, 오늘 점심 같이 하는 거지?”
문이 열리며 그의 오래된 파트너, 이안 키스트가 보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레온하르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품으로 집어넣은 후 대기실을 나서다 툭 말을 던졌다.
“이안.”
“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하하, 레온. 대체 뭐길래 그렇게 목소리를 깔아?”
저녁 공연을 앞두고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생각이었던 이안은 퀸 레베카 시어터를 벗어나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레온하르트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잠시 주저하던 레온하르트가 후우, 심호흡을 짧게 내뱉더니 입 안에 맴돌던 말을 던졌다.
“요한 말이지.”
“백 선수?”
“……혹시, 다른 팀으로 떠날 수도 있는 건가?”
“뭐?”
요한 백을 만나기 전까지 축구라는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던 레온하르트는 요 몇 년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며 기본적인 지식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이적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현재 요한을 둘러싼 숱한 소문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안은 심각한 표정을 짓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흐응, 묘한 코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리는 소문 때문이지?”
레온하르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안이 스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뭐, 소문의 이적료가 사실이라면…… 런던 FC가 백 선수를 팔 수도 있겠군.”
“……!”
“물론 백 선수가 동의를 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
“클럽 이상의 클럽, 모든 클럽의 왕이 그를 노리고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현 세계 최고 클럽은 확실히 런던 FC이긴 하지만, 그를 노리는 스페인 클럽들이 모든 선수들이 꿈꾸는 드림 클럽이라는 것도 무시 못 할 이유지.”
“……그렇군.”
쉽게 와닿지 않던 기사 속의 얘기들이 이안의 설명을 들으니 조금 실감이 났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굳혔다. 그런 레온하르트를 힐긋거리던 이안이 하하,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치더니 속삭였다.
“하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 이적을 하는 건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고, 또 만일 스페인으로 가게 된다면 백 선수가 너랑 상의하지 않겠어?”
아.
“그러니 미리 설레발치지 말자고!”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저기군, 오늘의 식사를 해결할 식당이!’라고 외치며 한 발 앞서 나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상의……라.’
레온하르트 악셀과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그의 연인은 확실히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과 의견을 주고받는 성격이긴 하지만, 축구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독립적이었다.
장담은 못 하겠군.
만일 요한이 정말 스페인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 * *
“이봐, 미스터 라이벌! 오늘도 수고 많았어. 아까 넣은 슛은 야신도 못 막을 것 같던데?”
1군 선수단을 둘로 나눠 치렀던 연습 경기에서 상대 팀 공격수로 활약한 마이크 비츠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와 같은 포지션을 두고 다투던 ‘라이벌’에서 ‘공존’을 하는 동료로 세 시즌을 보낸 요한은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쪽이군. 내가 없는 동안 내 자리를 꿰찼다는 유스가.]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다.
프리미어리그 두 번째 시즌의 개막을 앞둔 어느 날, 바스티안 랄프가 묘한 눈웃음을 그리며 누군가 소개해 주겠다고 했을 때 설마 마이크 비츠를 만날 거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복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요한이 1군으로 콜 업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그 남자가 바로 제 앞에 서 있을 때의 느낌이란.
[이 몸이 돌아왔으니 앞으로는 선의의 경쟁을 펼쳐 보자고, 미스터 라이벌!]
같은 포지션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이기는 하지만, 바스티안과 함께 요한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마이크 비츠가 청하는 악수는 색달랐다. 자신이 그와 경쟁을 하는 자리에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요한은 곁에서 ‘뭐 해, 요한? 미키 손이 머쓱하겠는데?’ 하고, 마이크 비츠의 애칭을 부르며 속삭이는 바스티안의 말에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후로 1개월 동안 마이크 비츠와 한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던 요한은 원톱이 아닌 투톱으로 바꾸어 그와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웰비 감독의 전술 전환 덕분에 세 시즌 동안 그와 완벽한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과찬입니다, 미키.”
“하하, 과찬은. 가끔 보면 넌 너무 겸손하다니까.”
요한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마이크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참!”
“……?”
“그러고 보니 요즘 언론에 난리가 났던데?”
“예?”
“정말 떠날 건가?”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요한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떠난……다?’
근래 저를 두고 많은 말들이 오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요한! 미, 믿어져? 마드리드랑 바르셀로나가 얼마를 오퍼했는지 들었어? 맙소사! 그 이적료가 사실이라면, 기록에 오를 만한 금액이라고!]
[처음에는 네 의사를 떠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꽤 진지하게 물어보더라고. 어떻게든 너와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사정사정하던데. 어때, 한번 만나 보겠니?]
[런던의 의사는 아직 모르겠어. 너를 잡고 싶은 건지, 아니면 보내고 싶은 건지. 슬슬 이야기가 나올 때도 됐는데 말이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승리로 끝낸 뒤 휴가를 보내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프리시즌에 임하는 그를 흔드는 것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에이전트인 앨리슨 디어의 주장에 의하면, 세계 축구 클럽의 왕으로 군림하는 두 클럽의 관심이 단순한 관심을 뛰어넘은 것만은 확실했다.
처음에는 요한이 이적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No’를 주장하던 앨리슨 역시 은근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물론 선택은 전적으로 네게 달려 있어. 난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거야.]
“백! 백, 여길 봐줘요!”
이적설에 관한 마이크 비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퇴근하기 위해 런던 FC의 라이트닝 트레이닝 센터를 나서던 요한은 자신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는 다수의 팬들을 발견했다.
“여기예요, 킹!”
“미키! 사인 좀 해 주세요!”
“꺄악, 랄프 선수! 저 왔어요!”
어린아이부터 성인 남성까지, 선수들과의 만남을 위해 길고 긴 시간을 기다렸을 팬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지라 요한은 함께 퇴근하던 마이크에게 양해를 구한 뒤 조수석의 창문을 내리려 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드르륵, 살짝 내려간 창문이 더 이상 내려가지 않자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린 요한에게 핸들을 잡고 있던 마이크 비츠가 말했다.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묻자, ‘미스터 라이벌, 넌 지금 이적설이 도니까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 있잖아.’ 하고, 마이크가 쓰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요한은 수많은 팬들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
저보다 한참 선배인 마이크 비츠의 말대로, 이적설에 얽힌 선수들은 가급적 말을 삼가는 것이 좋다. 이적과 관련된 문제는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닌, 구단과 구단 사이, 그리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더더욱.
하지만…….
“미키.”
“응?”
“잠깐 내려도 되겠습니까?”
“뭐? 어? 자, 잠깐만! 요한!”
지금은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놀라는 마이크 비츠에게 양해를 구하자마자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린 요한은 자신의 등장에 환호성을 지르는 팬들에게 인사를 한 뒤 시선 끝에 서 있는 소년을 향해 걸어갔다.
123화 - 특별외전 2 (완결)
‘요한, 제발 떠나지 마!’라는 글자가 새겨진 피켓을 들고 있는 소년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요한이 처음 1군에 등장했을 때 ‘환영해, 요한!’이라는 피켓을 들고 자신을 응원해 준 소년이었다. 요한도 기억하고 있는 에디라는 이름을 지닌 소년은 매주까지는 아니어도 매달 요한을 찾아와 사인을 받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오랜만이네, 에디.”
다른 팬들에게 간단히 사인을 해 준 뒤 빨간 머리 소년 에디에게 다가간 요한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를 보자마자 피켓을 내린 에디의 초록색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불안하게 움직였다. 요한은 ‘유니폼은 어디 있어?’ 하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에디에게 물었다. 그러자 우물쭈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대던 에디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요한…….”
“응?”
“정말…… 떠날 거예요?”
염려를 가득 담은 에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펜을 쥐고 있던 요한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에디뿐 아니라 주변의 팬들 역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시끄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휩싸인 것을 보면.
요한은 흔들리는 에디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에디는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 만일 앨리슨 디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제발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간절히 애원했을지도 모른다.
‘후우.’
요한은 그녀가 했을 법한 말을 떠올리면서도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호흡을 골랐다.
“요……한?”
“걱정 마, 에디. 떠날 일은, 없을 거야.”
스윽,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요한의 대답에 에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하고 한 번 더 묻는 에디의 떨리는 녹안을 응시하며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언론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대고 있긴 하지만 난…… 떠나지 않아, 에디.”
이적 제안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앨리슨의 말대로 지금 이 순간이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떠날 수 없는 건 그를 붙들고 있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에디의 모습도 그런 이유 중 하나에 속했다.
요한은 놀라는 에디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런던 FC는 나를 거두어 주고 키워 준 클럽이야. 난 이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뛰는 게 즐거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게 내 꿈이지. 그뿐 아니라, 날 지지하고 응원해 준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싶어. 내가 받은 만큼 그들에게 돌려줄 거야.”
“요한!”
“물론 요즘엔…… ‘원클럽맨’이라는 로맨티스트가 되기 쉽지 않다는 거 알아. 그렇지만 내 꿈은, 런던의 원클럽맨이 되는 거야.”
요한의 말에 에디뿐 아니라 주변의 팬들 역시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요한은 눈물을 글썽이는 에디의 머리 위로 손을 뻗더니 슥슥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리고 네게만 살짝 말하는 건데, 내가 스페인으로 간다고 하면 몹시 실망할 사람이 한 명 있어서 쉽게 못 가.”
“……예?”
“아주 질투가 많고 나와 떨어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스페인에서 활동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 * *
[언론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대고 있긴 하지만 난…… 떠나지 않아.]
[내 꿈은, 런던의 원클럽맨이 되는 거야.]
‘레온, 이거 봤어?’ 하고, 호들갑을 떠는 이안의 외침에 의아해하며 동영상을 본 레온하르트 악셀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오늘 날짜로 업로드된 동영상은 조금 전에 막 올라온 것인 듯했다. 근래 있었던 루머를 모두 종식시키는 요한과 한 팬의 대화는 그와 링크가 났던 스페인 클럽의 팬들에게는 아쉬움을, 그리고 런던 FC의 팬들에게는 기쁨을 선사했다. 그리고 요한과 가장 가까운 인물인 레온하르트 악셀 역시 마찬가지.
“뭘 그렇게 보고 계십…… 아.”
레온하르트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트레이닝을 마치고 돌아온 요한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마사지를 받으러 간 건지 집에 없었다. 그를 기다리며 예의 동영상을 틀어 놓고 반복해서 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뒤늦게 돌아온 요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요한은 핸드폰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 묻다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언제 올라온 겁니까?”
“한 시간쯤 전에.”
“……이런.”
요한은 레온하르트의 옆에 털썩 앉더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레온하르트는 ‘찍히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요한을 빤히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
“레온?”
“요한.”
“예.”
“정말 스페인에는 가지 않을 거지?”
사실 이적설이 도는 와중 요한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요한의 미래를 위해, 그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로 일부러 거론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다. 만일 요한이 스페인으로 이적을 한다 해도, 자신이 그를 보러 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동영상을 보며 안심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요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느긋하게 미소 짓던 레온하르트가 움찔거렸다.
“서, 설마, 갈 거야?”
그런 동영상이 찍혔는데?
“글쎄요…….”
“요한!”
“조금…… 고민했던 건 사실입니다.”
어?
“하지만…… 그래요. 지금은, 가지 않기로 했어요.”
지금……은?
그럼 나중엔 갈 수 있다는 소린가-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멈칫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요한은 설명을 덧붙였다.
“스페인처럼 휴가를 보내기 좋은 곳도 없으니, 아예 가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아!”
짓궂게 웃는 요한의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하하,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의 어깨에 머리를 대더니 중얼거렸다.
“레온.”
“응.”
“지킬 수 없는 약속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한테 클럽은 하나뿐입니다. 내게 연인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요.”
두근.
“물론 언론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 제안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앨리슨도 떠난다면 지금이 최적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곳에 가서 뛰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팬들을 만나며 새롭게 시작할 제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완벽하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상상에 그칠 뿐이었죠.”
요한은 낮게 웃었다.
두근두근, 연인의 말을 듣는 레온하르트의 가슴은 더욱 일렁였다.
“저는 이곳에서, 팬들이 있는 곳에서, 의지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요. 과한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런던 팬들의 뇌리에 각인될 만큼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는 ‘원클럽맨’이 되고 싶기도 하고요. 거기다가…….”
거기……다가?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말을 끊고서 저를 올려다보는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의 파란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쳤다. 요한은 빙긋 웃었다.
“이곳에는, 당신이 있으니까.”
요한이 말했다.
“당신이 제 곁에 있는 한, 쉽게 런던을 떠나지는 못할 것 같아요.”
“…….”
“레온?”
“…….”
“레온,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하십시오. 부끄러워지려고……!”
대답 없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쑥스러워하던 요한은 갑자기 저를 눕혀 버리는 연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쿵쿵. 그의 것인지, 아니면 레온하르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 소리가 넓은 거실을 가득 울렸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흐트러진 요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며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하고 싶어.”
“그렇습니까?”
“응. 그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죠?”
“요한.”
“예, 레온.”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디로 가든, 어느 팀에서 뛰든…… 항상 너를 지지하는 가장 첫 번째 팬이 될 거야. 그러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한은 다짐하듯 말하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레온.”
그래서 걱정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거니까.
* * *
찰칵찰칵!
요란한 플래시 세례가 가득한 이곳은, 프리미어리그를 평정하고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반열에 오른 ‘요한 백’의 은퇴 기자회견이 열리는 그레이트 팬텀 호텔 연회장.
비록 35살이라는 노장의 선수이나, 이곳 연회장은 9개의 발롱도르, 월드컵 우승 1회, 그리고 10회 프리미어리그 우승, 5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검은 머리 스트라이커의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기자들로 가득했다.
20살, 런던 FC의 1군으로 프로 무대를 밟은 그는 무려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클럽에 종사한 동양인 레전드이기도 했다.
특히 요즘 축구계에는 마흔이 넘도록 현역 생활을 유지하는 이들도 많았기에, 여전히 최정상의 기량을 가지고 있는 요한의 은퇴가 빠른 것은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오갔다. 그러나 시즌이 끝나자마자 은퇴를 선언한 요한이 그 결심을 번복하지 않자 혹시 은퇴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도 감돌았다.
그리고 이번 기자회견은 그 해답을 찾는 자리와도 같았다. 그의 조국인 대한민국뿐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인 영국,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의 축구 기자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 요한을 향해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백 선수!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은퇴를 선언한 것은 단순히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느낌이 들어서라는 이유를 밝힌 요한의 회견은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슬슬 일어날 시간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 한 기자의 외침에 요한의 눈동자가 그쪽으로 향했다.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흠흠, 호흡을 고른 기자는 여유롭게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요한에게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계획……요?”
“예, 계획! 은퇴 후 계획 말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든가, 아니면 해설자의 길을 걷는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후배 양성을 한다든가 하는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한동안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자신을 찍고 있는 기자들을 바라봤다.
찰칵찰칵. 끊이지 않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귀를 가득 채운다.
두근.
이제야 할 수 있는 말. 프로 무대를 뛰는 16년 동안 꼭 하고 싶었던 말.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했던 말.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한은 잠깐 동안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그게 뭐죠?”
기다렸다는 듯 외치는 기자에게 요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연인과 당당하게 휴가를 보내고 싶습니다.”
“연인……요?”
그간 요한 백은 데뷔 초반을 제외하고는 그 흔한 스캔들조차 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자 없이 홀로 지내는 요한의 모습에 우려를 표하는 팬들도 있었을 만큼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별해 왔다.
그런 요한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기자들이 벌떡 일어나 ‘백한테 애인이 있었다고?’를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자중시키는 관계자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요한은 정면을 응시하며 마지막 말을 꺼냈다.
“묵묵히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레온.”
“레온?”
“여자 이름은 아닌데?”
“애인 이름입니까!”
“풀 네임이 뭡니까, 백 선수!”
눈까지 크게 뜨며 묻는 기자들에게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보내며 기자회견을 마친 요한은 연회장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자 ‘왔어?’ 하고, 그의 의지가 되어 준 동반자가 보였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네요.”
“그러게.”
시원섭섭한 감정이 밀려온다.
레온하르트의 손을 맞잡은 요한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레온, 뭐가 제일 하고 싶습니까?”
“지금?”
“예.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죠?”
“……흐음, 글쎄.”
20대를 시작한 순간에 만나 지금까지 제 곁을 지켜 준 연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제야 긴 휴가를 얻었다는 것이 못내 미안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제가 받았던 만큼 돌려줄 거니까.
눈웃음을 그리는 요한을 응시하며 심각하게 고민하던 금발 미남은 요한을 제 품으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무엇이든 좋지만, 일단은 이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고 싶군.”
그것도 뭐, 나쁘지는 않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