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59)

“큭.”

이안의 커다란 손이 불룩해진 바스티안의 앞섶에 닿자, 바스티안의 고고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반응에 속으로 피식 웃은 이안은 더욱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키스…… 읏!”

지익, 지퍼를 내리며 바스티안의 바지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자 굵직한 무언가가 손끝에 닿는다.

이안은 한 손으로는 바스티안의 머리 뒤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길쭉하고 단단한 그것을 덥석 잡으며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안의 주저 없는 행위에 당황했는지 바스티안은 평소와 달리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은 내가 리드할 때도 있어야지.

내기에서 진 것은 두말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안겨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자신이 주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안은 실소를 터트리며 바스티안의 아래위를 공략해 나갔다.

118화 - 외전 3

“하아, 하아―”

처음에는 고르던 바스티안의 숨결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거칠어졌다.

제 손안에 잡혀 더욱더 단단해지는 페니스의 느낌 역시 선명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칠수록 열렬하게 반응하는 바스티안의 페니스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이왕 서비스하기로 했으니까.’

내기로 시작되기는 했지만, 승리를 위해 바스티안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안은 흔쾌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기로 했다.

바스티안의 입술 끝을 살짝 깨문 후,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곧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는 바스티안이 말릴 틈도 없이 부풀어 오른 그의 페니스를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키, 키스트 씨! 뭐 하는…… 크읍!”

제 페니스를 잡고 아래위로 거침없이 피스톤질을 이어 가던 이안의 손이 멀어지자 잠시 숨을 고른 바스티안은 붉고 따뜻한 이안의 혀끝이 제 것에 닿자 뜨거운 탄성을 터트렸다.

파르르.

굵직한 바스티안의 페니스는 이안의 볼이 튀어나오게 할 만큼 거칠게 반응했다.

이안이 슬쩍 시선을 위로 옮겨 보니, 바스티안이 몸을 떨며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에 찌릿, 전율이 일었다.

언제나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던 바스티안이 당혹에 물든 모습은 이안의 신경을 자극했다.

돌겠군.

상대가 당황하면 할수록 희열을 느끼는 제 모습이 아이러니하기는 했지만,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안은 더욱더 강하게 바스티안의 페니스를 빨아 당기며 펠라티오를 이어 갔다.

“하아, 하아.”

바스티안 랄프가 흘리는 것인지, 아니면 이안 키스트가 흘리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신음이 한낮의 스위트룸을 가득 메웠다.

기다란 페니스 기둥을 핥을수록 그 기둥의 핏줄이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안은 계속해서 그것을 머금고 빨기를 반복했다. 상대가 움찔거릴수록 제게 반응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점점 더 크게 부푸는 바스티안의 페니스가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혀를 놀리던 이안은 ‘잠깐만요, 키스트 씨!’ 하고 급하게 저를 부르는 바스티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웁!”

그 탓에 몇 초 뒤, 이안의 입 안은 뜨끈하고도 미끈거리는 애액으로 가득 찼다.

“후우우.”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이안 키스트가 제 입 안에서 사정한 바스티안을 올려다보다 몸을 일으킨 것은 몇 초 뒤의 일이었다.

이안은 천천히 몸을 돌려 갑 티슈로 손을 뻗더니, 입 안에 든 것을 티슈 위로 뱉어 냈다.

아무렇지 않게 티슈를 휴지통에 내던진 그는 빙긋 웃으며 바스티안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말없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바스티안을 향해 말했다.

“비록 내기지만 이긴 건 이긴 거니까.”

“…….”

“어쨌든 약속은 지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잇던 이안의 음성은 제 손목을 덥석 잡고 끌어당기는 바스티안에 의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 *

[두 분은…… 무슨 사입니까?]

바스티안 랄프와 이안 키스트 사이를 둘러싼 묘한 기류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다름 아닌 런던 FC의 요한 백이었다.

레온하르트와 교류가 잦은 데다 또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한이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제일 처음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은 결코 둘러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므로 언젠가 이안을 향해 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글쎄.’ 하고 웃으며 넘어가기는 했지만 이안 역시 또렷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나도 궁금하다 이거지.’

아래에 깔린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확실히 이안 키스트는 바스티안 랄프와의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한번 정도면 ‘스치는 인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일이 몇 주 동안 반복되고 있다 보니 이제는 적응이 될 지경이었다.

상대를 안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이제 안겨도 된다는 안락함마저 들었다.

이대로라면 이 포지션이 확고해질 것 같아 슬슬 위험하다는 생각도 든다.

‘단순한…… 섹스 파트너일 뿐인가?’

다시 본질로 돌아가, 당사자인 자신 역시 이 관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전화가 걸려오면 간단히 식사를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침대로 직행하는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더더욱.

“키스트 씨.”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해가 져 있었다.

컴컴해진 창밖을 응시하며 멍하니 소파에 걸터앉아 있던 이안은 샤워를 마치고 제게 다가온 바스티안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달콤한 체취가 느껴져 움찔하던 이안은 대뜸 ‘손 좀 내밀어 보십시오.’ 하고 말하는 바스티안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달라고요?”

“손 말입니다. 정확히는 손목이면 좋겠습니다.”

뭐?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수갑이라도…… 채울 생각이야?”

아무리 나라도, 하드한 플레이는 아직 해 보지 못했는데.

손목을 요구하는 바스티안의 말에 주르륵, 등 뒤로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보아 온 바스티안 랄프와 SM 플레이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그럴까.

이안의 발언을 들은 바스티안은 순간 멈칫하더니 곧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은 그 태도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렇죠?”

“아니면 키스트 씨가 그런 플레이를 원하는 겁니까?”

“네?”

“뭐, 취향은 아니지만 키스트 씨가 원한다면 어울려 줄 용의는…….”

“나도 그런 취향은 없습니다!”

“그래요?”

“당연한 소리를!”

“……그렇군요.”

바스티안은 휘휘 고개를 가로젓는 이안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왜 아쉬워하는 건데?

이안 키스트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든 줘 보십시오.”

“…….”

“키스트 씨.”

“젠장. 여기! 여기요! 됐습니……!”

철컥!

괜히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손목에 집착하는 바스티안을 향해 슥 손을 내민 이안은 갑자기 묵직한 기운이 들어 꺼내려던 말을 멈추었다.

이윽고 이안 키스트의 푸른 눈동자 안으로 낯익은 시계 하나가 들어왔다.

‘이건……?’

[……스트 씨, 뭘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

[아.]

[시계?]

얼마 전, 잡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데 옆으로 다가온 바스티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미소를 흘렸던 자신이건만.

이안은 어느새 제 왼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일종의 뇌물에 가깝군요.”

그런 이안을 보며 바스티안은 옅은 눈웃음과 함께 속삭였다.

“뇌물요?”

“예. 얼마 전 키스트 씨가 그 시계를 유심히 봤잖습니까.”

“그건…….”

확실히 그랬다.

바스티안은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이안에게 말을 이어 갔다.

“키스트 씨가 보고 있던 시계가 하필 전 세계에 열 개밖에 없는 물품이라, 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비쌌을…… 텐데.”

“당연히 비쌌죠.”

“윽.”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럽군요.”

뭐?

바스티안은 그 말에 놀라는 이안에게 말했다.

“키스트 씨에게 뭔가를 선물하고 싶었는데, 뭘 줘도 싫다고 해서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아.

“겨우 좋아하는 걸 찾아 선물하니 이제야 미소를 짓는군요. 기뻐하는 키스트 씨의 얼굴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

쿵.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바스티안의 모습에 심장이 벌렁거린다.

이안은 ‘잘 어울리네요.’ 하고 한 번 더 속삭이는 바스티안의 목소리에, 그리고 그의 눈빛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럼 나한테 선물을 하려고…….’

기어코 결승 골을 넣은 거라고?

[반드시 넣고 싶었던 골인데 성공해서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기 직후, 카메라 세례를 받았던 바스티안 랄프는 인터뷰에서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씩씩거렸던 게 불과 어제 일이거늘.

‘빌어……먹을.’

두근두근.

계속해서 뛰는 심장 박동이 신경을 자극한다. 그저 시계가 마음에 들어서 가슴이 뛰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어 봐도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젠장!’ 하고 끝내 욕설을 터트렸다.

“키스트 씨?”

갑작스러운 이안의 행동에 바스티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안은 무언가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들더니 바스티안 랄프를 향해 말했다.

“사귑시다.”

바스티안의 눈동자가 눈에 띌 정도로 커졌다.

이안은 마침내 백기를 들어 올렸다.

“내게 새 ‘파트너’가 생기면 깨지는 이런 애매한 관계 말고, 정식으로 만나 보죠. 내가 깔리든, 당신이 깔리든…… 어떻게든 되겠지.”

절대 시계 하나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아무리 희소성 있는 시계라 할지라도, 그 역시 이안 키스트가 구매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

‘정성이 이토록 갸륵한데 어떻게 안 넘어가냐고!’

각오를 다진 이안의 말에 바스티안이 미소와 함께 물었다.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후회?”

이안은 코웃음을 쳤다.

할 거면 진작 했어, 이 양반아.

이안 키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죠?”

어리둥절해하며 묻는 바스티안에게 이안 키스트가 대답했다.

“씻으러 갑니다.”

“씻으러?”

“정식으로 만나게 된 기념 섹스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오늘은 안겨 주지만, 다음엔 내가 안을 겁니다.”

“줄곧 안았던 것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자꾸 구시렁대면 없던 일로 할 겁니다!”

바스티안 랄프는 버럭 외치는 이안을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럼 이번에는, 욕조에서 즐기는 걸로 하죠.”

119화 - 외전 4

2.

“같이…… 못 가게 됐다고?”

레온하르트 악셀이 요한의 고국인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2주를 보낸 후의 일이다.

짐을 챙기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요한이 ‘레온, 아무래도 함께 출국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어렵게 건네자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한이 당연히 자신과 같은 날짜에 런던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라 여겼던 레온하르트는 곧이어 무슨 일 있는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잠시 주저하던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구단에서 특별 일정을 잡은 모양입니다.”

“런던 FC에서?”

“예. 북중미 팬들을 위한 서프라이즈 팬미팅이라고…… 하더군요.”

난처한 표정으로 ‘그런 중요한 자리에 제가 참석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비행기 시간을 조정해야 했어요.’라는 말을 중얼대는 요한의 모습에 레온하르트가 하하 웃으며 그를 끌어당겼다.

“요한.”

레온하르트의 손길에 그의 몸 쪽으로 다가온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

“겸손한 건 좋지만, 너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네?”

레온하르트 악셀의 기다란 손가락이 살짝 흐트러진 요한의 앞머리에 닿았다.

눈웃음을 띤 레온하르트는 어리둥절해하는 요한의 눈두덩 위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그리고 작게 탄성을 터트리는 요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스타야. 한국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라 프리미어리그를 보는, 그리고 챔피언스리그를 보는 축구 팬들에게 완벽하게 각인된 축구 스타. 올 시즌 런던 FC가 배출해 낸 가장 특별한 축구 선수에게 북중미 팬들이 무관심할 리 없잖아?”

“……아.”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와. 이 레온하르트 악셀이 장담하는데, 그 팬미팅에서 내 연인을 무시하는 축구 팬들은 아마 없을 거야!”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외치는 레온하르트의 말이 불안에 휩싸여 있던 요한의 눈빛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레온하르트는 ‘고맙습니다. 그 말이 꽤 힘이 되는군요.’ 하고 속삭이는 연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 ‘용기를 불어넣어 줬으니 키스 한 번 어때?’라는 짓궂은 멘트로 제 마음을 대신 표현했다.

<……이로 인해 정부가 보여 줄 앞으로의 대책이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이어, 다음 세계 주요 스포츠 소식입니다.>

한국에서의 나날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만큼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요한이 북중미 대륙에서 열리는 런던 FC의 프리시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영국 런던이 아닌 미국 땅을 밟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가족이 있는 독일에 들러 안부를 전하고 여러 볼일을 보기로 했다.

첫 행선지는 프랑크푸르트. 임신 중인 엘레나를 위해 요한이 마련한 식품들을 건네기도 하고, 또 막시밀리언과 엘레나를 만나 저녁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이틀간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일정을 소화한 후, 레온하르트는 그의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이 잡은 독일 뮤지컬 관계자와의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 다시 베를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계획이었다. 때문에 이번 주 주말이 되어서야 런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응?’

요한이 바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일부러 연락도 자제하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공항 내의 커다란 화면에 떠오른 낯익은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에 참여하고 있던 런던 FC의 메인 공격수, 요한 백 필립 선수가 미국 LA의 팬미팅 현장에서 몰려드는 팬들로 인해 큰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요한의 얼굴과 함께 뉴스의 진행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쿵쿵. 레온하르트의 가슴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도움 말씀에, 해밀튼 축구 전문 기자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당시 사건을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예.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런던 FC의 주전 공격수, 요한 백 필립 선수가 북중미 투어에 참석하여 그곳의 팬들을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축구 팬들 중 모르시는 분들이 없을 겁니다. 혜성처럼 나타나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신예 스타를 보기 위해 LA 레드썬 스타디움에 8만 명의 관중이 몰렸는데요, 경기 시작 전에 진행된 팬미팅 과정에서 주최측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실수라면……?>

<팬미팅에 참석한 선수들을 안내하는 요원들과 보호하는 요원들 사이의 무전기가 고장 나 버리는 바람에, 몰려드는 팬들을 통제하지도 못하고, 선수들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한 거죠. 그 과정에서 팬들과 가장 근접해 있던 백 선수가 넘어져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겁니다. 하마터면 압사 사고로까지 이어질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큰 부상인가요?>

<런던 FC 측에서는 정밀 검사를 해 봐야 안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백 선수가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가벼운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가 직접 알아본 바로는 재활까지 포함하여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정도의 부상이라고 합니다.>

<한 달요? 그렇다면 8월 중순에 있을 개막전 경기를 치르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그건 아무래도 런던 FC 감독의 성향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백 선수가 빠르게 회복한다면 그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고요.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백 선수와 같은 포지션인 마이크 비츠 선수의 컴백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런던 FC의 전력 손실은 생각보다 적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거 듣던 중 다행이군요. 백 선수의 쾌유를 빕니다. 이어 다음 소식은…….>

* * *

“요한, 정말 괜찮겠어?”

요한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미국 로스엔젤레스까지 날아온 에이전트, 앨리슨 디어와 함께 요한이 런던으로 돌아온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히 이틀 뒤였다.

자신의 부상으로 인해 뒤숭숭해진 구단 분위기가 걱정되어 안색이 어두워 있던 요한은 차 문을 열어 주며 손을 내미는 앨리슨을 향해 옅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네. 걱정 마세요, 앨리. 전 괜찮습니다.”

근래 들어 앨리슨이 새로운 선수들과 계약을 하고, 그들을 대신해 구단과 협상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요한은 자신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겉으로는 비즈니스적인 관계이나, 실상 앨리슨은 부재중인 요한의 부모님을 대신하는 존재나 다름없었기에 그녀가 더욱 걱정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앨리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요한을 가만히 응시하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기는! 그나마 인대 부상이라 다행이지, 뼈에 금이라도 갔어 봐. 하마터면 선수 인생을 망칠 뻔했다고. 젠장. 아무래도 클락 단장한테 조금 더 화를 낼 걸 그랬어!”

“하하, 앨리.”

“안 되겠어. 며칠만이라도 내가 남아서 네 상태를…….”

“앨리.”

“응?”

“전 진짜 괜찮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 혼자도 아니고요.”

“무슨 소리야. 진과 라이언이 없는 이상 당연히 너는 혼……. 아아, 미스터 악셀이 있었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 요한에게 얼굴을 찌푸리며 반박하려던 앨리슨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악셀’이라는 단어를 뱉어 내는 앨리슨에게서 약간 이질적인 감정이 스치기는 했으나 요한은 말없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요한을 보며 앨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미스터 악셀이라면…… 마음이 조금 놓이기는 해. 네게 ‘특별한’ 사람이니까.”

요한이 레온하르트의 동거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려야 했던 사람은 앨리슨 디어였다. 물론 두 사람 사이를 미리 알고 있던 안나마리아와 가족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앨리슨에게 레온하르트에 대해 알리고, 또 정식으로 소개하던 날 얼마나 떨렸던지. 부모님에게 얘기할 때보다 훨씬 더 뛰었던 그날의 심장 박동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요한,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안 되겠어. 미스터 악셀이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커밍아웃을 했고, 만일 두 사람 사이가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네가 곤란해질 건 불을 보듯 뻔해. 그래서…….]

레온하르트와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다음 날, 저를 조용히 불러낸 앨리슨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아는 요한은 빙긋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걱정이 한가득인 그녀를 달래기 위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아요, 앨리.]

[응?]

[가능하면 들키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악셀 씨…… 아니, 레온과의 관계를 숨길 생각은 없으니까요.]

[……!]

[여차하면 예전 스캔들 덕분에 눈을 떴다고 하죠, 뭐.]

저와 어울리지 않는 농담까지 내뱉으며 미소 짓는 요한을 보고 앨리슨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레온하르트 역시 그런 그녀의 걱정에 동의하며 두 사람 사이가 공개되지 않길 바랐다.

결국 그들의 동거는, 각자 이사를 하여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각 저택의 지하에 연결된 통로를 이용해 서로의 집을 오가는 것으로 두 지붕 한 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자기 주장만 강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너를 위하더라고.”

요한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배려해 주는 레온하르트가 싫진 않은지, 흐뭇한 미소로 중얼거리는 앨리슨에게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내일 자세한 검진을 받으러 가야 하니 오늘 하루는 푹 쉬라는 앨리슨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요한은 휑할 정도로 고요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연락조차 못 했군.’

LA에서 사건이 일어난 이후 워낙 정신이 없었다. 쉬지 않고 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나타나는 구단 관계자들부터 여러 기자들, 그리고 사과를 하기 위해 찾아온 팬들까지. 런던으로 돌아오는 과정마저 쉽지 않았던 탓에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그 탓에 현재 독일에 있을 레온하르트에게 예상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요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비틀려 버린 왼쪽 발목이 욱신거린다.

급하게 들렀던 병원에서 다시 경기에 나가려면 대략 3, 4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걱정하겠지.

미국에서부터 워낙 화제가 되었던 터라 아마 지금쯤 제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요한은 한숨을 푹 내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120화 - 외전 5

뚝.

성큼성큼 앞으로 뻗어 나가던 요한의 발걸음이 멈춘 이유는 현재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시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목발로 몸을 지탱한 채 절뚝거리던 요한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악셀…… 씨?”

처음에는 헛것을 본 줄 알았지만 곧이어 시야로 들어온 사람은 틀림없는 레온하르트 악셀이었다.

그가 대체 어떻게 여기에?

요한이 알고 있기로 레온하르트는 지금쯤 독일에 있어야 했다. 요한이 귀국하는 날보다 이틀 늦은 일요일에 런던으로 돌아와야 할 사람이 어째서 집 안에 있는 걸까.

요한은 자신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제게로 다가오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거기야?”

“네?”

“다쳤다는 곳, 거기지?”

다짜고짜 왼쪽 발목을 가리키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들어 버렸군.’

이왕이면 레온하르트가 제 부상 소식을 듣지 못했으면 했다.

물론 목발을 짚고 있는 모습을 보였으니 이미 끝난 이야기였지만, 레온하르트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요한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레온.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기는!”

“……!”

“빌어먹을! 대체 그 경기장은 안전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선수가 다치는 거야? 어디 봐!”

아.

“얼마나…… 이러고 있어야 하지?”

요한의 발목을 보기 위해 무릎을 굽힌 레온하르트가 얼굴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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