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리 두 사람의 동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눈을 큼지막하게 뜨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턱 끝을 매만지던 요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며칠 동안 레온하르트는 밤잠을 이루질 못했다.
‘혹시 반대하시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 어떤 역경이 있을지라도 둘이 함께 헤쳐 나갈 자신이 있지만, 가족들의 반대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로 인해 요한이 상처받는 것은 정말이지 싫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었기에 이번 만남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답지 않게 이토록 긴장하는 건지도.
“그렇……겠지?”
요한의 확고한 음성에 떨리던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안정을 되찾는다. 요한은 짙은 눈웃음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마도 저희 부모님은 레온을 좋아할 겁니다. 두 분께서는 항상 제 선택을 존중해 주시거든요.”
빌어먹을.
‘어떻게 이리도 사랑스러운 건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요한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난다. 레온하르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요한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안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직 문이 열리기 전이었으므로 자제할 수밖에 없다.
“레온.”
그때였다.
“제가…… 긴장을 없앨 수 있는 주문을 하나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주문?”
요한의 뜬금없는 발언에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슬쩍 고개를 꾸벅인 요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슬며시 발꿈치를 올려 레온하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레온하르트 악셀.”
쿵.
“제가 몹시 사랑하는 당신을…… 제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소개해 줄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거침없이 뛰던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다. 레온하르트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말을 내뱉는 요한을 보며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어떻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안 되겠군.’
레온하르트는 후우 숨을 크게 고른 후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열리기 직전의 대문을 힐긋 응시하더니, 요한의 귀에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두 분을 만나면, 너의 미래를 내게 달라고 말해야겠어.”
114화
2.
“예? 차출……요?”
길었던 한 시즌이 끝났다.
프리미어리그에 이어 챔피언스리그 일정까지 마무리가 되자 긴 여정을 달려온 선수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첫 1군 데뷔 시즌에 주전을 꿰차고, 시즌 MVP에 오른 것으로도 모자라 두 개의 우승 트로피까지 들어 올리게 된 요한은 커리어적인 면 외에 사적으로도 즐겁기 그지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얼마 전 해외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레온하르트가 6월에는 서유럽의 어느 작은 섬을 빌려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건넸던지라, 당연히 그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는 요한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6월에 한국에서 열리게 될 국가 대표 친선 경기에 자신이 차출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특히나 리그가 마무리될 시점에서 6월 A매치의 차출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상황이었으므로 더더욱 당혹스러웠다.
요한을 대신해 뽑혔던 선수가 큰 부상을 당하게 되면서 전술 시험 계획이 꼬였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실험이 아닌 풀 전력으로 상대 팀을 맞이하게 되었다며 제게 양해를 구하는 대표 팀 관계자의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휴식 이전에, 요한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 대표 선수였으니까.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큰일이군.’
국가 대표 팀 호출에 대한 거절은 생각지도 않았던 요한은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접하고 길길이 날뛸 누군가의 얼굴이 금세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대 많이 하고 있을 텐데.
요한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나 다를까, 어렵게 말을 꺼낸 요한의 음성을 들은 레온하르트 악셀의 녹색 눈동자가 큼직해졌다. 요한은 불쾌감이 가득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긴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안 갈 수는 없나?”
“……레온.”
“젠장! 분명히 이번엔 갈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섬을 통째로 빌렸단 말이야!”
……아.
요한은 답지 않게 씩씩거리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레온하르트는 부드득 이까지 갈았다.
“한국은 왜 매번 내 계획을 방해하는 거지? 국가적 차원에서 방해하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제기랄!”
“하하.”
“웃지 마! 나 지금 화났……!”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것이 레온하르트의 화를 삭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빙긋 웃기만 하던 요한은 침을 튀기며 흥분하던 레온하르트가 돌연 말을 멈추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아마도 며칠 동안은 단단히 화가 나 있을 테니, 그동안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풀어 줘야겠다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씩 웃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
“요한.”
“네.”
“나도 갈까?”
……뭐?
버럭 화를 낼 때는 언제고 돌변한 레온하르트의 태도에 집중하던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온하르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요한을 향해 밝은 미소를 흘리더니 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외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네가 간다면, 나도 가면 되는 거였어! 어차피 휴가 갈 생각이었으니 한국을 휴양지로 생각하면 되겠군. 하하하. 한국 방문은 처음인데, 뭐부터 준비해야 하나? 내가 뭘 챙기면 될까? 응?”
* * *
-레온, 한국에 오기로 했다며?
예정되어 있던 휴가지를 한국으로 변경하기로 한 레온하르트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요한의 삼촌인 승진이 전화를 걸어왔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승진의 전화를 받자 반가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네.’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 일, 누님께 허락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 네. 감사합…….”
-아니. 아직 기뻐하긴 일러.
“예?”
-요한은 누님만의 아들이 아니거든.
“네? 그게 무슨…….”
-하하. 한국에 오면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럼 한국에서 보자고!
얼마 전, 레온하르트 악셀은 요한의 부모인 라이언과 미진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이미 동거 허락까지 받았다. 때문에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던 승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아들이 분명한 요한이, 그들만의 아들이 아니라니.
말장난이 틀림없는 그 말뜻을 알아차린 것은 바로 오늘, 영국 런던을 떠난 한국행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하고 난 이후였다.
‘이, 이게 대체…….’
[한국이라……. 뭐, 이 기회에 확실히 깨닫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매일 봐서 무뎌졌을 테니 더욱 말이야.]
[무슨 소리야?]
[별말 아니야. 어쨌든 한국, 잘 다녀오라고! 그리고 네가 얼마나 대단한 별을 잡은 건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깨닫도록! 하하하!]
승진에 이어 레온하르트의 한국행 소식을 접한 이안 역시 승진과 비슷한 말을 하며 레온하르트를 혼란스럽게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밟고 입국 게이트를 통과하던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시선 끝에 너무도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처음으로 마주할 만한 게이트 앞 광고를 장식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레온하르트와 같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지내는 요한이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참, 요한. 이안한테 들었는데 얼마 전에 한국에서 광고를 찍었다고?]
[네. 뭐, 별거 아닙니다. 그냥 관광객들을 환영하는 작은 광고였어요.]
[광고까지 찍을 정도라니. 널 위해서 디어 씨가 맹활약하고 있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앨리 덕분이에요.]
별일 아니라는 듯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하던 요한의 모습이 불현듯 눈앞을 스친다.
‘단순히 작은 광고 정도가 아니잖아.’
요한의 나라에서, 그가 꽤 인기 있는 축구 스타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수줍게 웃으며 손까지 내젓던 연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편으로는 뿌듯함을 느끼던 그는 입꼬리가 멋대로 씰룩이는 것을 인지했다.
동거를 시작한 이후 매일같이 보는 요한의 얼굴이었으나 커다란 광고판으로 마주하는 것은 생각보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물론 런던 FC의 홈구장을 찾으면 요한과 그의 동료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광고벽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이곳은 한국이 아니던가.
‘이것도 기념인데…….’
광고 속 요한과 사진이라도 찍어 볼까?
며칠 뒤 열리는 A매치를 대비하여 저보다 먼저 한국으로 들어간 요한에게 자신의 입국 소식을 알리기 딱 좋은 장소였다.
특히나 자신의 광고가 걸린 곳에서 레온하르트가 셀프 카메라를 찍어 보내 준다면, 요한의 성격상 부끄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귀엽군.
어쩔 줄 몰라 하는 요한의 모습이 아른거려 피식 실소를 터트린 레온하르트는 재킷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광고 속의 요한과 사진을 찍으려 했다.
「풉!」
그때였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핸드폰을 들어 올려 요한의 모습을 배경으로 한 셀카를 찍으려던 순간, 어디선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저씨도 우리 요한이 팬인가 봐. 방금 사진 찍으려고 하는 거 봤어?」
「그러게. 하긴, 우리 요한이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실력이 출중하니까! 미모는 또 어떻고!」
이윽고 귀 익은 단어들이 레온하르트의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우리…… 요한?’
얼마 전부터 틈틈이 짬을 내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레온하르트는 개중 가장 먼저 배운 단어인 ‘우리’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친근함과 소속감, 그리고 애정을 표하는 단어인 우리라는 표현으로 요한을 수식한 소녀들은 자신이 있는 곳을 힐긋대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흠흠.”
뭔가를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던 레온하르트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흘린 것은, 자신의 귓불이 붉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소녀들은 머쓱해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더욱 깔깔거리더니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요한을 배경으로 각자 사진을 찍은 뒤 대화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아야, 너 소식 들었어? 요한이, 이번 A매치 끝나고도 한동안 한국에 있을 거래.」
「뭐? 바로 출국 안 한대?」
「듣기로는 CF도 몇 개 찍을 건가 봐. 요한이 요즘 광고계에서 엄청 핫하잖아! 이건 비밀인데, 우리 아빠가 광고 회사에서 일하시거든?」
「뭐? 정말?」
「응! 마침 요한이가 찍을 CF를 맡게 되셨나 봐! 그래서 아마…….」
「아마?」
「잘하면 나, 촬영장 방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지, 진짜? 유진아! 그럼 나도 같이 가!」
「당연하지! 요한미(美)들끼리는 뭉쳐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걱정…… 꺅!」
눈을 반짝이며 대화를 이어 가던 두 소녀는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녀들의 눈은 어느새 자신들 옆으로 다가와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 꽂혀 있었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두 소녀를 향해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서툰 한국어를 내뱉었다.
「‘요한미’…… 몹니카?」
115화 (완결)
3.
‘벌써 시간이…….’
어느새 어둑해진 창밖을 힐긋거리던 요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 숙소에서 나왔건만, 어떻게 된 셈인지 벌써 하루가 지나 버렸다.
근래 들어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걸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혹시 걸려 온 전화가 있을까 싶어 핸드폰을 힐긋거렸으나 전화 한 통 오지 않은 상태.
요한은 미묘한 표정으로 한동안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다 주머니 속으로 다시 넣어 버렸다.
‘화가…… 난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오늘도…… 스케줄이 있다고?]
특히나 머나먼 영국에서 이곳, 한국까지 자신과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온 레온하르트의 입장이라면 더더욱.
[한국까지 오면 같이 휴가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미안해요, 레온.]
[…….]
[레온.]
[아니야. 어쩔 수 없지.]
[예?]
[요한 넌 프로니까, 계약을 지키는 건 당연해.]
[아.]
[난 괜찮아. 정 뭣하면 혼자 관광이라도 하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다녀오도록.]
갑작스러운 A매치 소집도 충분히 미안한 일이거늘, A매치 기간이 끝난 후 함께 휴가를 즐기려던 계획마저 틀어졌다.
한국에 가기 쉽지 않으니 간 김에 모든 일을 처리하겠다는 앨리슨의 집념이 낳은 결과가 레온하르트의 실망감으로 이어져 난처해진 것이다.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레온하르트의 눈동자를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당황해하던 요한은 손을 휘휘 저으며 빙긋 웃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쿵쿵.
괜히 다급해졌다.
이제 2주 뒤면 요한은 다음 시즌을 대비할 프리시즌 일정에 맞추어 팀에 합류해야 했다. 특히 이번 프리시즌에는 북중미 투어까지 포함되어 있던 터라, 따지고 보면 레온하르트와 보낼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 예정이었다.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약속해. 오늘 일정이 정말 마지막이야. 남은 2주 동안은 한국에서 마음껏 즐기다 와. 너무 놀다 기자들한테 걸리지는 말고. 알았지?]
모든 일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인 오늘 아침, 그의 에이전트인 앨리슨 디어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각종 CF 촬영과 인터뷰, 그리고 화보 촬영까지 모두 끝마친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
오늘 밤부터 런던으로 다시 출국하는 그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레온하르트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 요한은 오후 9시쯤 겨우 도착한 숙소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다.
“레온, 미안해요. 제가 많이 늦…….”
어?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숙소로 들어서던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재 시각 9시 5분.
지금쯤이면 틀림없이 숙소에 있어야 할 남자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한국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를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 레온하르트의 부재는 꽤 충격적이었다.
[뭐 하고 있을 거냐고? 음, 글쎄. 그냥 여기서 영화나 보고 있지 뭐. 아니면 한국 쇼 프로그램이라도 볼까? 그러면 한국어를 조금 더 빨리 습득할 수 있겠지?]
자신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을 동안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생긋 웃으며 말하던 레온하르트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체…….’
[참. 그런데 요한아, 악셀 씨 한국 왔다며?]
[그걸 어떻게……?]
[경기장 관계자한테 들었지.]
[예?]
[너랑 친분이 있는 것 같아 다들 쉬쉬하고 있긴 한데, 얼마 전 트러블이 있었대.]
[트러……블이요?]
[응. 저번 경기 때 네 팬들이랑 실랑이가 있었다던데?]
[네?]
[뭐 별거 아닌 일이라 그냥 넘어간 모양인데…… 오늘도 그럴 뻔하다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
[소녀 팬들이랑 다툴 정도면, 악셀 씨도 어지간히 네 팬인가 봐. 안 그래?]
아직 자신과 레온하르트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준오가 두 번의 A매치 중 마지막 경기 직전 제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때는 그저 웃으며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왜 이리 생생한 건지.
요한은 굳은 얼굴로 거실 쪽으로 들어와 레온하르트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
그러다 거실의 테이블에서, 아마도 레온하르트의 것이라 짐작되는 글귀를 발견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이런.’
주르륵,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 까닭은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예정보다 늦었군.’
숙소를 나설 때는 요한이 오기 전에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각 이상으로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현재 시각 9시 30분.
근래 요한의 귀가 시간대로 보건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주의는 해야겠지.
레온하르트는 두 사람이 머무는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숙소가 있는 층에 멈추자마자 얼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요한에게 자신의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숙소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중요했다.
“후우.”
숙소의 문을 열기 직전, 귀를 쫑긋거리며 문 안의 소리를 들었지만 다행히 아무런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안 온 모양이네.
빙긋 웃으며 카드키를 대고 숙소 안으로 들어선 레온하르트는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지며 거실 쪽으로 향했다.
“헉!”
전등이 다 켜지기도 전에 움직였던 터라 당연히 숙소 안에 저 말고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레온하르트는, 소파에 떡하니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디 갔다 오세요?”
요즘 들어 밀린 스케줄을 소화한답시고 10시가 넘어서 귀가를 하던 요한이 빙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쿵.
잘 달려 있던 왼쪽 가슴의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요, 요한.’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그, 그래? 일찍 마쳤나 보네.”
“……마지막 스케줄이었으니까요.”
“그, 그렇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꼭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
젠장.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괜히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꾹 다물려 있던 요한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그런데 레온.”
“으응?”
“아직 제 질문에 답 안 하셨는데.”
……어?
“어디 갔다 오는 길이세요?”
레온하르트 악셀이 알고 있는 요한은 궁금증을 품고만 있지 않는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던 몸까지 일으키며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온 요한이 큰 눈을 그에게 들이밀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송골송골 맺혀 있던 이마의 땀방울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온하르트는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며 ‘그냥 요 앞에.’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요한의 말이 더 빨리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 레온의 행동이 조금, 수상하군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리는 요한의 말에 멈칫했다.
요한은 당황한 것이 분명한 레온하르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한국에 온 지 벌써 열흘짼데…… 같이 못 지내는 절 보고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
“근래 들어서는 일찍 오라는 이야기도 안 하셨죠?”
“아, 그, 그건…….”
“얼마 전부터는 걸려 오는 전화도 제 앞에서 안 받으시고……. 행동이, 조금 수상하긴 하네요.”
“요, 요한.”
“그리고 결정적으로, 레온.”
“으응?”
“이건 대체 뭡니까?”
의심의 기색을 숨기지 않던 요한이 대뜸 손에 쥔 무언가를 제게 내밀자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그걸 어떻게!”
분명히 자신이 가지고 있다 여겼거늘, 어째서 요한의 손에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자신의 부주의함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하얗게 질리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던 요한이 닫혀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레온, 설마…….”
두근두근.
말끝을 흐리는 요한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심상찮은 말이 흘러나올 것이 분명했다.
‘젠장할.’
들켜 버린다면 꽤 부끄럽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각오하며 눈을 질끈 감던 레온하르트의 귓가로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생긴 겁니까?”
……뭐?
‘이 번호, 낯이 익습니다.’라든가, 혹은 ‘이 이름, 아는 이름입니다.’라는 식의 말이 들려올 것이라 여겼던 레온하르트는 부드득 이를 갈며 말하는 요한을 보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요한은 놀란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올려다보더니 진지하기 그지없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 몇 주 동안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물론 제 잘못입니다. 오랜만의 귀국이라 앨리가 그렇게 많은 스케줄을 잡아 놨을지 몰랐어요. 하지만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었습니다. 오늘 밤부터는 당신과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고요. 그런데…… 제가 없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났던 겁니까?”
“요, 요한.”
“진아……라니. 남자의 이름이 진아일 리는 없을 테니, 여자겠군요. 뭡니까. 제가 없는 동안, 여기서 여자라도 만난 겁니까? 그런 거예요?”
“그, 그게…….”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인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인지라, 레온하르트는 꽤 놀랐다.
“안 줍니다.”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열려던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요한의 행동에 멈칫했다.
“아니, 못 보냅니다.”
“……!”
“절대로 못 보내요. 어떻게 당신과 함께하게 됐는데……. 다른 사람에게 못 줘.”
두근두근.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꽈악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요한의 가슴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거 아무래도 뭔가 오해한 것 같긴 한데.
레온하르트는 ‘못 보냅니다.’를 반복하고 있는 요한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다 풋, 웃음을 터트렸다.
“……?”
그러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요한이 레온하르트의 가슴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레온하르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어리둥절해하는 요한을 내려다봤다.
“물론 ‘진아’는 여자야. 하지만 요한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제가…… 모르는 거요?”
이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레온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진아’는 나보단 너랑 더 관련이 있지.”
“……네?”
“요한, 혹시 ‘요한미’라고 알아?”
레온하르트의 뜬금없는 질문에 요한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게 뭡니까?”
아니나 다를까, 제가 예상했던 반응이 흘러나오자 레온하르트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지.”
“악셀 씨?”
“요한미는 요한 네 이름에, 한자로 아름다울 미(美)를 붙인 말이라더군.”
“예?”
“한마디로, 네 팬클럽이라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