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59)

‘살짝 이른 감이 있지만.’

급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

레온하르트는 시즌이 끝나고 나면 하려던 말을 지금 꺼내기로 했다.

요한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날파리 차단이 우선이지.

“요한.”

“……예.”

요한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레온하르트가 장난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동안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양보하려 해도 아까워서 안 되겠어.”

“아깝다니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요한의 눈동자가 의문에 휩싸였다. 그런 요한의 벽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는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아까워.”

“……!”

“너무 아까워서 미치겠어.”

“레……온.”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 그 시간을 어떻게 하면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고. 결론은 하나뿐이더라고.”

“…….”

“같이 살자, 우리.”

확신에 찬 레온하르트의 말에 요한의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당황한 요한을 으스러지게 안으며 말했다.

“헤어져 지낸 시간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너와 함께하고 싶어. 그러니까…… 나와 함께 살아 줘. 우리, 같이 살자.”

쿵쾅쿵쾅.

세상에, 이렇게 노골적인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제가 내뱉었지만 지극히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요한을 풀어 주며 그를 응시했다. 정신없이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요한에게 닿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제 말이 끝나고 5초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요한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대답이 없군.’

요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근래 들어 두 사람의 관심사가 같아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그의 성격이 같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요한에게는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편이 더 먹히는 경향이 있었던지라 정공법을 써 본 것인데.

너무 노골적이었나?

“……레온.”

떨리는 마음으로 요한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데 짧게 숨을 몰아쉰 요한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듣기 좋다고 생각하던 레온하르트는 상념에서 벗어나 요한을 바라봤다.

약간의 기대가 묻어 있는 레온하르트의 눈빛에 순간 말을 잇지 못하던 요한이 옅은 미소를 그리며 부탁했다.

“바로 답변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순간 멈칫했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요한이 씁쓸하게 웃더니 말했다.

“제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아.”

“오늘 제안에 대한 대답은…… 두 달 뒤에 하겠습니다.”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고요? 거의 프러포즈나 마찬가지였는데!”

깜짝 놀란 안나마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그 외침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흐응, 그러게. 왜 바로 대답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동안 봐 온 백 선수는 답변을 미룰 사람이 아닌데.”

안나마리아에게 동조한다는 듯 이안이 손끝으로 턱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응? 망설이고 있다니요?”

“악셀 씨가 못 미더운 거죠.”

뭐?

“같이 살기에?”

“같이 살기에.”

안나마리아와 이안에 이어 중얼거린 사람은 놀랍게도 흑발의 바스티안 랄프였다.

두 남녀의 말에도 눈썹만 꿈틀거리던 레온하르트는 바스티안의 일침에 얼굴을 구겼다.

만담을 나누듯 대화를 주고받는 바스티안과 이안을 노려보던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삐죽일 수밖에 없었다.

“디어 양은 제가 초대한 거지만…… 대체 랄프 선수는 여기 왜 있는 겁니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레온하르트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안나마리아와 이안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표출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하하, 호탕하게 웃은 바스티안은 제 옆자리의 이안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사람 데리러 왔습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감시이려나.”

“감시? 누구를 말입니까.”

“여기 이 사람이요.”

“……!”

바스티안 랄프는 대놓고 이안을 가리켰다. 그에 이안이 ‘헉!’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온몸을 파르르 떨어 댔다.

“이, 이봐요, 랄프 선수! 그런 식으로 말하면 레온이 오해하지 않습니까!”

바스티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오해는 무슨.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오해할 게 뭐 있습니까.”

“뭐, 뭐요?”

이안의 얼굴이 금세 홍당무가 되었다. 그런 이안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그를 한 번 본 바스티안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악셀 씨,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예. 앞으로 키스트 씨가 함께 어디 놀러 가자고 제안하거나, 혼자 놀러 가는 것 같으면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여기, 제 번호입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는 바스티안에게서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나마리아가 의문을 내뱉었다.

“저기 랄프 선수, 키스트 씨랑 무슨 관계시길래 그렇게까지 하세요?”

“아, 우리는…… 웁!”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젠장. 이봐요, 랄프 씨. 나랑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이안은 바스티안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레온하르트의 대기실 밖으로 그를 데리고 나갔다.

거구의 두 남자가 대기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수상한데…….’를 중얼거리는 안나마리아를 지켜보던 레온하르트는 손에 쥐고 있던 메모지를 갈무리한 후 얼굴을 굳혔다.

[악셀 씨가 못 미더운 거죠. 같이 살기에.]

얼마 전, 레온하르트가 요한에게 건넨 말은 일종의 프러포즈나 마찬가지였다. 충동적으로 말한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내내 생각하던 말이었다.

만일 저를 둘러싼 스캔들이 터지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했을 말이었을 거다.

‘두 달 뒤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요한?

* * *

와아아-

런던 FC의 홈구장, 미라클 스타디움은 총 57,289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평균 관중이 5만 명에 육박하는 MS의 관객석은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른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오늘은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치러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넣었어? 정말?”

“젠장할! 그럼 한 골이 뒤지는 셈이잖아!”

“마지막 라운드까지 우승 경쟁을 하게 될 줄이야…….”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승 후보는 총 두 팀. MS의 주인 런던 FC와 시즌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우승을 확실시하던 레드 가든이었다.

놀랍게도 런던 FC와 레드 가든은 37R까지 승점과 골득실이 같아, 각각 최종 라운드에서 우승의 행방을 결정지을 예정이었다.

특히 마지막 경기인 만큼 승부 조작이 불가능하도록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38R 경기는 이미 후반 7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0:0으로 상대 팀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있는 런던 FC와 달리 레드 가든은 한 발자국 더 우승컵에 다가간 상태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약 20분.

그동안 두 골을 넣어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이 런던 FC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레온.]

[응?]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본디 축구를 좋아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었지만 요한 백을 만나면서 그에 관심을 가지게 된 레온하르트는, 오늘 아침 자신의 연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 경기를 직접 보러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 두 달 전…… 레온이 제게 건넨 제안에 대한 답을, 할 예정입니다.]

제안에 대한 답이라…….

‘완전히 잊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 레온하르트 악셀은 요한 백에게 프러포즈를 가장한 동거 제안을 했다. 하지만 요한은 그런 그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했고, 그 말에 약간의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두 달가량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잊고 있었다.

‘너무 달콤해서 그랬나.’

비록 동거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 요한과 레온하르트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은밀한 밀회부터 시작해 우정을 가장한 노골적인 데이트도 즐겼다.

그 탓에 레온하르트의 연애 상대가 어쩌면 요한이 아닐까 언급하는 언론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런던 FC의 모델 활동을 하면서 친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진한 우정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와아아아!”

응?

“미, 미쳤어!”

오늘 오전, 요한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경기에서 눈을 뗀 사이, 갑자기 요란한 함성 소리가 들렸다.

“봤어? 봤냐고! 우리 바티가 골을 넣었어! 만세! 골을 넣었다고!”

고개를 돌려 보니 이안 키스트가 후반 87분쯤 터져 나온 바스티안 랄프의 선제골에 광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제 목을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을 기세인 이안을 가까스로 떨쳐 낸 후 쯧 혀를 찼다.

‘그렇게 숨기려 들더니.’

이젠 아예 우리 바티, 바티.

비밀 연애를 선언했던 이안 키스트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우승하면 진한 키스를 퍼부어 줄게!’ 하고 외쳐 대는 적발의 남자가 과연 제 친구가 맞는 걸까, 의심하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아예 자신의 연고 팀인 로젠버그보다 런던 FC의 팬이 된 것이 틀림없는 이안은 ‘제발, 제발!’ 하고 기도하듯 두 손을 합장하며 간절한 주문을 외고 있었다.

‘갈아탄 게 분명해.’

레온하르트는 그런 이안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경기는,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느덧 예정되어 있던 정식 경기 시간이 모두 끝나 버린 상황.

후반 90분을 넘긴 후 인저리 타임을 4분이나 부여받은 런던 FC는 마지막 총공세를 펼쳤다.

삐이익!

그때 마침 런던 FC의 38라운드 상대 팀이 반칙을 저질렀고, 추가 시간도 3분가량 지나 있던 터라 최후의 공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두근.

바스티안이 골을 터트렸을 때도 자리에 앉아만 있던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마치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필드 위를 누비고 있는 스물두 명의 선수들 사이에서 요한을 찾기 시작했다. 흑발의 요한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레온이 지켜봐 주신다면, 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지켜보고 있어.

지켜보고 있으니까…… 힘내, 요한.

아마도 들리지 않겠지만 제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레온하르트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요한에게 소리쳤다.

삐이익!

프리킥을 부여받은 런던 FC에서 키커로 나선 디에고 가르시아가 휘슬 소리에 공을 향해 달려갔다. 꽤 먼 거리였기에 바로 골망을 흔들기는 무리였으므로, 아마도 다른 선수들에게 공을 넘길 것이 틀림없었다.

두근두근.

레온하르트는 숨을 참으며 요한을 찾았다.

뻐엉!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전부 순식간에 벌어졌다.

디에고 가르시아의 프리킥은 정확히 바스티안 랄프의 머리에 맞았고, 바스티안은 망설이지 않고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요한에게 패스했다.

당시 시각은 93분 20초. 앞으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 40초가량이 남은 시간이었다.

만일 여기서 골을 넣지 못한다면 승점과 골득실이 같은 두 팀 중 다른 조건으로 인해 레드 가든이 우승컵을 들어 올릴 예정이었다.

두근두근!

요한이 볼을 받자마자 심장이 터질 듯 뜀박질했다.

레온하르트의 손이 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은 단 한 번의 주저도 없이 몸을 돌리며 발등으로 상대 팀의 골대를 향해 슛을 날렸다.

철렁!

지금껏 딱 한 번만 흔들렸던 상대 팀의 골망이 요한의 강슛에 의해 출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몇 초 정도였을까.

레온하르트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이 적막에 휩싸인 것처럼 고요에 잠식됐다고 생각했다.

“와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정확히 3초 뒤.

삐이익!

하늘이 무너질 듯한 함성과 함께 요한이 찬 슛이 골라인을 넘어갔다.

경기장 전광판에 ‘GOAL!’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가득 채워졌고, 곧이어 요한의 얼굴이 떴다.

“맙소사! 너, 넣었어! 넣었다고! 백 선수가 넣었다고!”

굳어 있는 레온하르트와 달리 제자리에서 폴짝이던 이안이 레온하르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소리를 내질렀다.

평상시였다면 그런 이안의 행동에 그를 밀어냈겠지만, 레온하르트는 골을 넣은 뒤 자신이 있는 관객석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요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레온하르트는 똑똑히 목격했다.

자신이 찬 공이 골망을 흔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요한은, 입고 있던 유니폼을 벗어 던지더니 레온하르트가 있는 2층의 관객석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유니폼을 벗는 행위는 경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주저하지 않고 벗어 던진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보여 줄 목적으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있었다.

[그런데 요한.]

[네, 레온.]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두 달 전 내가 했던 제안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는…… 꼭 경기장을 찾아야 하는 건가?]

[예.]

[반드시?]

[네. 반드시.]

[하하. 경기장에서 무슨 이벤트라도 준비하고 있는 거야? 대체 얼마나 거창한 답변을 하려길래 그래?]

[……기대해 주세요. 아마, 레온의 마음에 들 겁니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유니폼 속에 감추어져 있던 티셔츠 위에 적혀 있는 영어 글귀를 발견하고선, 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본편 完 -

113화

#Injury Time(+6)

1.

“이봐, 이거 정말 괜찮아 보여?”

사방이 전신 거울로 장식된 드레스 룸에서 이 옷, 저 옷을 몸에 대어 보던 레온하르트가 퀭한 눈을 한 채 앉아 있는 누군가를 향해 툭 말을 건넸다. 그러자 하암, 길게 하품을 하며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던 이안 키스트의 벽안이 느릿하게 레온하르트를 향했다.

이안은 ‘아니. 아무래도 별로인 것 같은데.’ 하며, 결국 입고 있던 자주색 슈트 상의를 벗어 던지는 레온하르트의 커다란 등을 멍하니 응시하다 입술을 삐죽였다.

‘정도껏 해야지.’

호들갑의 정도가 지나치다. 이안은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을 느끼면서도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대체 어째서 이 황금 같은 휴일에 자신이 다른 곳도 아닌 레온하르트 악셀의 집 드레스 룸에 와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는다면, 새벽에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이안, 큰일 났어!]

새벽 5시 반.

전날 밤 이어진 침대 위의 활동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이안 키스트는 축 늘어진 상태였다. 빌어먹을 ‘누군가’가 어찌나 놓아주지 않는지, 온몸이 뻐근해 침대 위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않던 그의 귀에 요란한 벨 소리가 들렸다.

단잠을 깨울 만큼 끈질긴 전화의 주인공이 레온하르트였다는 것도 충분히 놀랍거늘, 다급함이 가득 서린 예의 외침에 이안 키스트의 고운 미간이 좁아졌다.

[큰일?]

[아침에 우리 집에 좀 와 줄 수 있나?]

[……오늘?]

[부탁이야. 일생일대의 일이라, 혼자 결정할 수는 없을 듯하군. 그래서 네 의견이 필요해.]

이안 키스트는 조금 놀랐다. 레온하르트가 무려 일생일대의 일이라고 표현할 만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필요로 하다니.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피곤에 백기를 들어 올리며 축 늘어져 있을 때는 언제고, ‘당장 갈게!’를 외치며 외출 준비를 하는 이안을 못마땅하게 보는 이들은 당연히 존재했다. 이안은 중계 화면에 비친 모습과는 달리 입까지 쭉 내밀고선 눈을 가늘게 뜨는 바스티안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침실을 벗어났다.

‘그래, 그랬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아까 그 슈트가 나았던 모양이야. 장식이 너무 많은 것도 별로지. 흠, 그럼 이젠 색을 고를 차롄데…….”

이안은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훑어보다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상의를 벗어 던지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를 듣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한참 동안 거울 앞에서 고민하던 레온하르트는 마치 이안의 충고를 기다린다는 듯, 거울을 통해 제 어깨 너머로 보이는 이안의 눈을 빤히 응시하는 듯했다.

귀찮군, 정말.

이안은 하는 수 없이 후우 한숨을 내쉬고는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네 말대로 방금 벗은 것보다 그 전에 입었던 슈트의 디자인이 나았던 것 같군.”

“그래? 그럼 확실히 디자인은 이걸로 하고…… 넥타이를 골라 보자고. 보타이보단 넥타이가 낫지?”

“파티가 아니라면.”

“색은 어떤 게 좋을까? 블랙 슈트를 입을 거니까 넥타이는 튀는 게 나으려나?”

“글쎄…….”

“흠, 차분한 느낌이 좋을 것 같으니 그레이 계열도 나쁘진 않겠군.”

“……”

“이런! 이쪽 소매에 실밥이 풀린 것 같은데?”

“……풀려도 이쪽에선 보이지도 않아. 대충 잘라 내.”

“흠, 아무래도 넥타이는 이게 좋겠어.”

“……”

“구두는 어떤 게 좋을까? 여기서 괜찮아 보이는 걸로 하나 골라 줘.”

“……네 번째 구두가 괜찮겠네.”

“이거?”

“그래, 뭐.”

“…….”

“…….”

“이봐, 이안.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닌가?”

‘그래 가지고는 기껏 너를 부른 이유가 없잖아.’라는 말까지 떠올리는 레온하르트의 투덜거림에 미간을 좁히던 이안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온하르트 악셀!”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큰 눈을 부라리며 제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이안의 행동에 움찔했다. 190센티가 넘는 거구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자 레온하르트의 드레스 룸은 금세 가득 차 보였다.

이안은 제 행동에 크게 당황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그의 어깨 위로 턱 손을 얹었다.

“대체 뭘 걱정하는 거지?”

“어?”

“정말 한심해서 못 봐 주겠군!”

새벽바람부터 전화를 걸어온 레온하르트가 홀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길래, 실은 꽤 많이 걱정을 했다. 하여 바스티안의 투정도 뒤로한 채 급히 레온하르트의 저택으로 달려왔건만, 한다는 말이…….

[이안, 큰일 났어. 오늘 중요한 만남이 있는데,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

―라니.

이안 키스트가 레온하르트의 저택에 도착한 것이 벌써 세 시간 전. 지난 세 시간 동안 무대 위의 파트너가 수십 벌이 넘는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의 머리 뚜껑은 결국 열려 버렸다. 이안은 제 외침에 당황하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힘껏 소리쳤다.

“넌, 레온하르트 악셀이라고!”

“……!”

주저 없는 이안의 말에 레온하르트의 눈이 요동쳤다. 이안은 구겨진 미간을 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은 퀸 레베카 시어터가 자랑하는 웨스트엔드의 간판이자,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파트너라고. 게다가 누더기 옷을 입고 있어도 널 싫어할 사람은 없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

“너는 혜성처럼 떠오른 백 선수가 직접 선택한 사람이야. 나이답지 않게 똑 부러지고 강단 있는 백 선수가 선택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런 녀석이, 백 선수의 부모님을 만나는 것으로 이렇게 긴장하는 꼴이라니. 너, 내가 아는 레온 맞냐?”

정곡을 찌르다 못해 명치까지 타격해 버리는 이안의 외침에 흔들리던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제자리를 찾았다.

씩씩거리며 ‘아무거나 입어도 괜찮아!’ 하고 한 번 더 소리친 이안은 흥 콧방귀를 뀌더니 자신이 일어났던 의자에 다시 착석했다.

[요한의 부모님이 돌아오신대. 그분들이…… 나와 만나고 싶어 하신다더군.]

어떤 중요한 일이 있기에 이토록 긴장을 하는 것일까.

의상을 골라 달라 부탁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의아해하긴 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지. 그러나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자신이 아는 레온하르트 악셀답지 않았다.

정말 눈꼴시어 못 봐 주겠군.

절친한 친우의 고민을 들어주고자 연인의 질투까지 깔끔하게 무시한 채 달려왔건만, 알고 보니 애정 행각의 연장선이었던지라 괜히 입술이 삐죽여졌다.

게다가 드레스 룸 안이 먼지로 가득 찰 정도로 옷을 갈아입는 레온하르트가 아니꼬웠던 이안은 결국 속에 든 말을 내뱉은 후 입술을 삐죽였다.

“……이안.”

그러자 돌연 풉 웃음을 터트린 레온하르트가 왠지 그윽한 눈빛으로 이안의 이름을 불렀다. 흥, 콧방귀를 뀌며 ‘왜’ 하고 퉁명스레 대꾸하던 이안은 빙긋 웃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까지 날 좋게 보는 줄은 몰랐군.”

……뭐?

“고마워. 네 충고대로 나는 위대한 ‘레온하르트 악셀’이니, 아무거나 걸쳐도 되겠지. 이 몸은 무엇을 입어도 제 것으로 소화하는 남자니까.”

“뭐…… 뭐라는 거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행커치프는, 어떤 색이 좋을까?”

여러 색의 행커치프를 들어 올리며 생긋 미소 짓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벙찐 표정을 짓던 이안은 입술을 삐죽이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군청색이 좋겠어.”

* * *

두근두근.

가슴의 떨림이 멎지 않는다. 장미 향이 가득한 붉은색 꽃다발과 프랑스에서 직접 공수해 온 와인 한 병을 들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주르륵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후우, 길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흥분이 멈추지 않는다.

‘……!’

그런 레온하르트의 긴장은 ‘레온.’ 하고 저를 부르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음성에 멈추었다.

요동치던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향했다. 레온하르트의 눈에 빙긋 웃으며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요한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혼나러 가는 게 아니니까요.”

[레온, 저희 부모님이 닷새 뒤 오전 비행기로 입국하실 예정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두 분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며칠 전, 요한으로부터 그의 부모님의 입국에 대해 들었을 때는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긴장하게 될 줄 몰랐다. 일전에 요한의 삼촌들을 만난 적도 있었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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