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빚지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그 녀석이 그런 말을 꺼낸 건…… 처음이었어.”
막시밀리언은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져 눈을 내리감았다.
[이 전화 좀 받아 볼래요?]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엘레나가 갑작스럽게 제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전화를 받아 보니 놀랍게도 상대는 자신의 동생인 레온하르트였다. 안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말도 안 되는 스캔들에 기함을 터트리고 있던 와중인지라 더욱 놀라웠다.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답하자 주저하던 레온하르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형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문의 후계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눌려 살았던 자신과 달리,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던 동생에게 남모를 고심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동생은 무엇에도 굽히지 않고 고고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저보다 넓어 보였다. 그래서 한때는 악셀가의 후계가 그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여긴 적도 있었다.
막시밀리언은 레온하르트의 자유분방함을 동경하고, 불굴의 정신을 존경했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른 레온하르트에게 일어난 스캔들은 절대로 사실이 아닐 것이라 여겼다.
때문에 그 일이 사실이라 고백하며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동생의 말을 듣고 살짝 당황했다.
막시밀리언 스스로가 세워 둔 철칙에 어긋나는 레온하르트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던 까닭은, 그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동생의 새로운 면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게 당당하고 싶습니다.]
[당당?]
[예.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결코 숨길 일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습니다.]
[……!]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 힘만으론 부족합니다. 형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나 고심했을까. 레온하르트의 말을 떠올리며 옅게 웃던 막시밀리언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서인지…… 더욱 만나 보고 싶군.”
그 녀석을 사로잡은, 그 백이라는 친구를.
* * *
“이게 말이 돼? 우리가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경기를 대승으로 장식한 것보다, 악셀의 스캔들이 여전히 화제인 거?”
헛웃음을 흘리며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은 디에고 가르시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특히 어젯밤 3:0 대승을 장식했던 독일 분데스리가 1위 팀과의 1차전 홈 경기에서 첫 골이자 결승 골을 넣었던 그였으므로 더욱 그랬다.
‘내 기사는 여기 끄트머리에 있다고!’를 중얼대며 신문 1면을 장식한 레온하르트의 사진을 가리키는 디에고의 말에 드레싱 룸에 있던 모두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동료들은 ‘한 골만 넣어서 그래. 백처럼 두 골을 넣든가.’라거나, 혹은 ‘다음 경기에는 해트트릭을 하지그래?’라는 말로 디에고의 부아를 슬슬 돋웠다.
흥, 콧방귀를 뀌던 디에고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자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따라 나갔다.
요한은 그런 디에고가 던지고 간 신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쓰게 웃었다.
[그냥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
걱정하는 제게 짙은 미소를 그리며 꺼낸 레온하르트의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악셀을 TV 화면에서 마주한 순간,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TV 출연을 꺼리던 레온하르트가 정면을 바라보며 내뱉은 그 말은 제 가슴에 완벽하게 내려앉았다.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그의 인생에서 그러한 말을 공개적으로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요한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맺힌 이유는 레온하르트의 마음을 진실로 느낄 수 있어서였다.
사랑을 두려워하고 외면했던 제게 있어, 레온하르트와 만난 것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요한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놀랐어. 악셀 씨가 잠자코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런 강수를 둘 줄이야. 아니, 이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쇼에 나간 건가?”
레온하르트의 웰리트 쇼 출연은 영국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강제 커밍아웃의 피해자로 당당하게 자신의 성적 취향을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질책한 레온하르트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의 용기와 과감한 행동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반면, 오히려 레온하르트 악셀을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예의 K 씨라는 인물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요한과 레온하르트가 처한 상황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던 바스티안은 레온하르트의 대응에 감탄하면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단 있는 사람이군.’ 하고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요한은 그런 바스티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레온하르트 악셀을 둘러싼 스캔들은 여전히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제3자나 다름없는 대중들은 그의 편에 서서 제2의 피해를 막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듣기로는 앞으로 이런 강제적인 커밍아웃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소수자들을 둘러싼 인식 변화에 대한 캠페인도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변화는, 누군가의 과감한 용기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던 시점.
훈련을 마치고 귀가한 요한은 제집 앞에서 볼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남자를 발견하고선 우뚝 멈춰 섰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말한 남자는 저와 같은 머리 색을 지녔지만 눈 색은 확연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자신의 등장에 흠칫 놀라더니 이내 떨떠름한 기색으로 다가와 입술을 달싹이는 찬영의 모습을 요한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상하군.’
일주일.
런던에서 두 번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거라 여겼던 남자와 다시 만난 것이 고작 일주일 전의 일인데, 그 일주일 동안 상황이 바뀌었다.
일주일 전, 레온하르트와 함께 서 있던 찬영을 봤을 때는 그토록 자제하지 못했던 불안한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그를 향한 그 어떤 두려움과 염려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요한, 네 곁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거니까.]
대답하지 않고 무표정한 눈을 하고 서 있는 자신을 보며 ‘젠장.’ 하고 낮게 욕설을 중얼대는 찬영을 보자 레온하르트가 지난 일주일 동안 내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레온하르트가 옆에 서 있는 것도 아니건만, 마치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한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찬영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오랜만이군요.”
“그, 그러게.”
“…….”
“…….”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요한에게서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냉소적인 태도에 움찔하던 찬영은 누가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부드득 이를 갈더니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사…….”
사?
“사과를, 하러 왔어.”
……뭐?
두 번 다시 제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 굳이 이렇게 서 있는 찬영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싸늘한 눈빛을 유지하던 요한은 황당한 숨을 흘렸다.
저 역시 그게 짜증스러운지 빌어먹을, 하고 한 번 더 중얼댄 찬영이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하다.”
“……!”
“미안해.”
“…….”
“미안하다고.”
“뭐가 말입니까?”
“뭐, 뭐긴! 며, 몇 년 전 일 말이야.”
찬영이 언급한 ‘몇 년 전’이라는 말에 요한의 얼굴에 잠시 어둠이 내려앉으려다 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잠시 쿵쾅대려던 가슴이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요한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찬영은 그 모습이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다시 소리를 뱉어 냈다.
“그래, 그 당시에 난…… 솔직히 널 이용했어. 따분했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네가 나를 따르는 걸 보니 꽤 재미있더군. 나름 귀여웠지. 그래서 그때…….”
“내 마음을 짓밟았다?”
“……!”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되묻는 요한의 말에 찬영이 움찔했다.
구겨진 그의 표정은 몹시 볼만했지만 쓴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요한은 우물쭈물하는 찬영을 냉랭하게 쳐다보았다.
“놀라운 일입니다. 솔직히 당신에게 사과를 받을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사과다운 사과는 아닌 것 같지만……. 그만큼 궁지에 몰린 모양이군요. 나를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뭐, 뭐라고?”
“알겠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일 마음은 없지만, 당신과 더는 얼굴을 마주하기 싫으니 대충 받아들인 걸로 하죠.”
“이, 이봐!”
“그런 의미에서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당신의 얼굴을 보니 역겨워서.”
“너!”
“수고하세요.”
그날 이후 또다시 찬영과 대화를 나눌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와의 일은 제게 금기(禁忌)와도 같았기에 내내 묻어 두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렇지 않군.’
그와 대화를 나누어도, 그의 얼굴을 마주해도 가슴이 동요하지 않는다. 떠올리기만 해도 두려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나, 나는 분명히 너한테 사과했어! 사과했다고! 그러니 꼭 전해! 내가 너에게, 그날의 일을 사과했다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요한의 뒷모습을 보며 찬영이 이를 갈듯 소리쳤다. 악에 받친 소리였다.
소문으로 듣기엔, 레온하르트 악셀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그런 그였기에 어떻게든 재기하기 위해 저를 찾아온 듯했다.
요한은 그런 찬영의 외침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이지, 상종하기 싫은 인간이군.
111화
#Second Half : 후반 41′ ~ 후반 45′
“어? 이 남자……?”
지난밤 열린 A매치가 끝난 이후 곧바로 런던행 비행기에 올라탄 준오는 탑승하면서 받아 든 신문을 펼쳐 보다 무심코 소리를 내뱉었다. 어젯밤 열린 경기에 대한 기사를 훑은 뒤 다음 페이지로 넘겼는데 그 안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던 까닭이다.
준오는 저와 같은 비행기에 올라탄 요한의 얼굴을 힐긋거렸다. 막 자리에 앉은 요한이 안전벨트를 하다 제 눈길을 발견하고선 의아해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주저하던 준오가 들고 있던 신문을 요한에게 보여 주었다.
“요한아, 기억 안 나? 우리 이 남자, 몇 달 전에 런던에서 봤잖아.”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의문에 잠기기 직전 설명을 해 주자 다물어져 있던 요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기억납니다.”
준오는 요한의 시선이 느릿하게 제 손가락 끝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고선 중얼거렸다.
“몬스터 컴퍼니 ENT의 전 이사였군. 어쩐지, 돈은 꽤 있어 보이더라니.”
“…….”
“재벌 자제라 그런지 간도 크네.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마약 투약 및 공급, 밀반입 혐의라니……. 아무리 MC 그룹 직계라도 빠져나가기 어렵겠어. 요즘엔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국민들이 더 냉정하게 보니까.”
쯧쯧 혀를 차며 신랄한 말을 내뱉는 준오와 달리 요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준오가 그런 요한의 옆얼굴을 힐긋거렸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치열한 우승 다툼을 벌이고 있던 리그 경기가 A매치로 인해 잠시 중단됐다. 그 기간 동안 국가의 호출을 받지 않는 선수도 있지만, 요한은 매번 호출을 당하는 선수 중 하나였다. 특히나 이번 A매치 기간에는 고국까지 비행만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하늘길을 건너 두 경기를 모두 풀타임으로 뛰었다.
제자리로 돌아간 후에도 회복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요한아.”
“예, 선배님.”
“좀 잘래?”
준오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요한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번 비행을 위해 준비해 온 목베개를 내밀었다.
“그거 받치고 자면 편할 거야.”
“아…….”
“도착까지 한참 남았으니 눈 좀 붙이고 있어.”
눈을 가릴 수 있는 후드까지 함께 달려 있는 목베개를 건네자 요한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은 옅은 미소를 그리며 ‘감사합니다.’라고 답한 후 목베개를 받아 들었다.
준오는 사용법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요한에게 직접 목베개 쓰는 법을 가르쳐 준 뒤, 그가 좌석에 등을 기대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준오 형, 요즘 너무 요한이만 챙기는 거 아니에요?]
이륙을 준비하는지 비행기 안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저를 향해 툴툴거리던 후배의 목소리도 함께 머리를 울린다.
준오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과잉 보호인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지.
물론 처음에는 서늘한 얼굴을 한 채 우뚝 서 있는 국가 대표 신입 후배를 도와주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백요한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면서 오랫동안 알아 온 동생들만큼이나 정이 갔다. 위태로워 보이나 의외로 강단이 있고, 흔들리지 않는 요한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을 보며 천재다 뭐다 운운했지만, 실은 그 실력이 모두 다른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요한을 보면 잘해 주고 싶고, 그의 곧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 주고 싶었다. 특히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한 후로는 같은 한국인이라며 어울리는 시간이 잦았기에 더욱 그랬다.
‘이번 시즌 끝나고 함께 여행이나 가자고 해 볼까?’
하늘을 날기 시작한 비행기가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향하는 와중, 어느새 잠든 요한을 힐긋거리며 준오는 눈썹을 아래위로 까딱였다.
딱히 나쁜 생각은 아니군.
시즌이 끝난다면 더욱 여유로워질 테니, 요한과 휴가를 같이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준오는 낮게 웃으며 요한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날이 선 목소리가 이안 키스트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현재 이안이 통화를 하고 있는 상대와 통화를 할 때면 으레 이런 말투가 흘러나오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강도가 조금 셌다. 그러나 짜증 섞인 이안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반응을 보이던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말 그대롭니다. 요한에게 어떻게 제안해야 할지 고민하던데.
“……대체 그 자식은 뭡니까? 그 자식도 게이인 거야?”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애매하군요.
“이봐요.”
-어쨌든 이 이야기는 당신한테 전화를 걸기 위한 빌미였고, 오늘은 어떻게 할 거죠?
“뭐, 뭐를 말입니까.”
-요즘 파파라치가 붙어서, 웬만하면 집에서 보고 싶은데.
“윽.”
-뭐, 싫다면 이번 주는 패…….
“누가 패스한답니까? 우리 집으로 와요. 11시까지.”
-…….
“……왜 말이 없죠?”
-그때 봅시다.
“잠…… 끊었어! 또!”
팽팽하게 몰아붙이다가도, 잠깐만 방심하면 금세 전세가 역전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되묻지 말걸, 하고 어느새 끊어져 버린 전화를 들고 씩씩거리던 이안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쳇. 내가 대체 왜…….’
한동안 가만히 서서 미동 없는 핸드폰을 붙들고 있던 이안은 조금 전, 바스티안 랄프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대기실에서 벗어나 레온하르트 악셀의 대기실로 향하더니 벌컥 문을 열었다.
“어이, 레온! 들었냐?”
문고리를 잡은 이안의 시야로 얼마 전부터 새로 충원된 캐스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마티네 공연까지 두 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던 터라, 아마도 이번 주부터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 줄 배우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조셉, 자리 좀 피해 줄래?”
대본을 든 채 이야기를 나누던 레온하르트가 상대 배우에게 작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갈색 머리 배우가 이안에게도 인사를 한 뒤 대기실을 나섰다.
덩달아 꾸벅 인사를 한 이안은 ‘또 왜?’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레온하르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근처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만사태평이구만.”
“……뭐?”
“하긴, 스캔들도 잘 마무리됐겠다 이제 탄탄대로 같겠지.”
“……이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도통 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힐긋거리던 이안은 인상을 쓴 채 제 곁으로 다가온 그를 올려다봤다.
“넌 걱정도 안 되냐?”
“걱정?”
“정말 답답해 죽겠네! 이렇게 태평하니 제 연인 주변에 파리가 웽웽거리는 것도 눈치 못 채지!”
버럭 소리를 내지른 이안은 결국 황당해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줄줄 읊어 놓았다.
* * *
[아무리 네 일이 해결되고, 백 선수의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 비밀 연애를 한다지만…… 그래도 백 선수는 네 연인 아니냐. 그런 연인이 다른 사람이랑 여행을 갈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이번엔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 씩씩거리나 했더니, 이안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늘어놓았다.
여행……이라.
레온하르트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과민 반응이라고, 이안.
시즌이 끝나면 마음 맞는 친구끼리 여행을 갈 수도 있지.
‘물론 그게 이준오라는 사실이……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한 달 전, 온 매체를 들끓게 만든 레온하르트 악셀의 스캔들은 이제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스캔들을 대하는 레온하르트의 당당한 태도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고, 사랑에는 성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한 대중들의 반응에 힘입은 요한이 레온하르트의 연인이 자신이라 밝히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그건…… 시즌이 끝난 뒤에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일단 지금은, 시즌 중이잖아. 네 주변이 나 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거 싫어. 요한, 난 네가 온전히 좋아하는 일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이번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요한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요한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레온하르트는 툴툴거리며 ‘연인 관리 잘하라고!’ 주장하던 이안의 음성을 떠올렸다.
‘난감하군.’
요한과 같은 한국 국가 대표인 준오는 요한에게 잘 대해 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끼는 동생을 향한 애정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인지 인지할 수 없을 만큼 미묘했다. 하여 알게 모르게 준오를 견제한 적도 있었지만…….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준오 선배는 단순한 국대 선배일 뿐이니까요.]
요한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악셀 씨.”
“아, 고마워.”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눈을 내리감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제게 찻잔을 건네는 요한의 음성에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찻잔을 받아 드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옅은 눈웃음을 그린 요한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피곤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우승까지는 이제 한 경기 남았지?”
“예.”
“흐응.”
“…….”
“축구에 별 관심 없었는데…… 덕분에 조금 알게 됐어. 마지막까지 승점이 같다니, 이번 시즌은 정말 치열하군.”
호로록, 차를 마시며 중얼거리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빙긋 웃은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더 집중하기도 했어요.”
“집중?”
“네. 더욱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지를 빛내듯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는 모습을 레온하르트는 가만히 지켜봤다.
[너 그렇게 방치하다가는, 닭 쫓던 개 신세 될지도 몰라.]
이안 녀석…….
‘괜한 소리를 해선.’
요한의 웃는 얼굴을 보니 더욱 가슴이 뛰기 시작해서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요한이 ‘무슨 일 있습니까?’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주저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소식 들었어. 그 자식, 한국에서 구속됐다며?”
요한의 영향 때문인지, 뉴스를 찾아보는 빈도가 늘었다. 영국과 독일뿐 아니라 한국의 신문까지 찾아보게 된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귀국하기 직전에 벌어진 데릭 킴의 구속 소식도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아.”
레온하르트의 말에 살짝 움찔하던 요한은 이내 말없이 얼굴을 주억였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아뇨. 그게 아니라…… 이제 정말,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 하실 필요 없어요.”
레온하르트는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요한을 바라봤다.
“악셀 씨께서 저 대신 나서 주신 그날 이후,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아요. 전부…… 악셀 씨 덕분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저를 바라보는 요한의 얼굴에는 누군가를 향한 두려움도, 조급함도, 그리고 긴장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달 전, 레온하르트가 직접 봤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요한의 평온한 얼굴에 안도가 되었다.
요한은 빙긋 웃으며 소리를 내뱉었다.
“그때, 악셀 씨가 그러셨잖습니까.”
“응?”
“계속, 같이 있어 주겠다고.”
“……!”
“그 약속 때문에, 이젠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112화
의지를 가득 담은 푸른 눈동자가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로 인해 심장 박동 소리가 더욱더 강하게 쿵쿵 울렸다.
뭉클한 감정이 가슴을 뒤덮어서, 레온하르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또 그러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요한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레온.”
“……네?”
생각해 둔 다른 말이 있었는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요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온하르트는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근처로 내려놓더니 투덜거렸다.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얼마 전까지는 잘 부르더니, 왜 다시 돌아간 거지?”
“아.”
“안 불러 줄 거야?”
“……!”
“난, 듣고 싶은데.”
요한은 잔까지 내려놓고 자신을 응시하는 레온하르트의 눈이 부드럽게 접히는 걸 지켜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레ㅇ……!”
수줍은 기색이 가득한 요한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하르트가 양팔을 크게 벌렸다. 있는 힘껏 제 품으로 요한을 끌어당긴 그는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인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