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59)

어디 그뿐인가.

‘사랑……이라.’

요한의 성격상 그 말을 듣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다. 아니,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자신을 내쫓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겼다. 그랬기에 더욱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으려는 것을 겨우 눌러 버린 레온하르트는 민망한 듯 제 시선을 피하고 있는 요한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안 그래도 지척에 있던 두 사람의 거리가 코끝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시야로 들어오는 와중,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저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요한에게 물었다.

“그럼…….”

“…….”

“우리 이제, 다시 시작해도 되는 건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말을 꺼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직 요한의 답을 듣지 못했기에 조마조마하기는 했지만 그의 답이 부정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요한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조급해졌다.

“그것보다, 이번 스캔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먼저…….”

“스캔들보다…….”

“……?”

“스캔들보다, 그쪽 대답이 중요해.”

“……!”

“다시, 시작하는 거지? 그 빌어먹을 시간, 이제 안 가져도 되는 거지?”

낮게 으르렁거리는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흠칫 놀라던 요한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 시간.’ 하고 중얼거리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몇 초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요한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당신이 저를 받아 준다면, 당신과 다시 만나고……!”

아마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잇고 싶었을 테지만 그의 말은 팔을 길게 뻗어 그를 와락 끌어안아 버린 레온하르트로 인해 삼켜졌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널찍한 가슴으로 요한을 힘껏 안았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단단하고 또 단단하게 그를 붙잡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중얼거렸다.

“만나.”

“…….”

“다시, 만나는 거야.”

그쪽 없는 생활은 지난 두 달로 충분했어.

“네가 또 헤어지자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을 거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이제 없어.”

으스러지게 요한을 껴안은 레온하르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하고 또 말했다.

처음에는 그 말에 당황하여 입술을 뻐끔거리던 요한도 곧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온기를 느낀 채 서 있었다.

“그런데 악셀 씨.”

“레온.”

“…….”

“불러 줬었잖아, 그렇게.”

“……레온.”

“응?”

“스캔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 안겨 있던 요한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는 대놓고 애칭을 요구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살짝 볼을 붉히던 요한이 주저하다 그를 부르자 레온하르트는 더욱 생글거리며 무엇이든 물으라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요한은 그의 태연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하하, 웃던 레온하르트가 대꾸했다.

“걱정 마, 요한. 이번에 터진 스캔들을 염려하는 거라면,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야.”

“……네?”

마치 남 일을 거론하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일관하는 레온하르트를, 요한은 의아하게 바라봤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벽안에 드리워진 의문을 읽어 내고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당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

* * *

-정말 실망입니다, 미스터 킴. 어떻게 나하고 상의도 없이 그런 악의적인 기사를 낼 수 있습니까.

찬영은 단단히 화가 난 듯한 스티브 위버의 말에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물론 이러한 항의 전화가 올 것이라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으나, 전화가 걸려 온 시기가 생각보다 늦었다. 기사가 터지자마자 연락이 올 줄 알았기에 더욱더 그렇게 느껴졌다.

찬영은 자신을 원망하는 스티브 위버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자가 제게 모욕감을 줬다고. 물론 미스터 위버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놓고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A라는 자가 누구인지.”

-하아, 미스터 킴. 이니셜을 썼으면 뭐합니까. 지나가던 개도 그 이니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텐데.

“하하, 그런가요?”

실소를 터트리는 찬영의 태도에 핸드폰 너머에서 긴 한숨이 들려왔다.

찬영은 먼저 전화를 걸어 놓고 침묵을 유지하는 스티브 위버에게 다음 말을 내뱉기로 했다. 압박을 했으니, 슬슬 돌아올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줘야지.

“악셀을 제 앞으로 데려오시죠.”

-……예?

“그 작자에게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

“그 작자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본인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습니다.”

그 고고하고 오만한 태도를 이어 가던 레온하르트 악셀이 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하는 모습을 봐야겠다. 그래야 그에게 당했던 며칠 전의 일이 뇌리에서 지워질 것 같았다.

불같이 화를 내던 전략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긴 찬영은 싸늘하게 말한 뒤 스티브 위버의 답변을 기다렸다.

찬영이 예상한 위버의 대답은 울며 겨자 먹기 식의, ‘알겠습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우.

찬영은 시원하게 답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는 위버의 태도에 인상을 썼다. 이 반응은 뭐지? 생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미스터 킴.’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영은 어렵게 말을 꺼내는 스티브 위버의 음성을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예?”

-오늘 내가 미스터 킴에게 전화를 한 건, 우리의 협업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뭐라……고?

찬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잠시 청력을 의심하기는 했으나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는 상대의 행동으로 보아 자신이 들은 말이 결코 실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찬영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보세요, 미스터 위버.”

-듣고 있습니다, 미스터 킴.

“……당신, 내 도움 없이는 한국 진출 꿈도 못 꾼다는 거 잊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웨스트엔드의 세계화에 내 힘이 없어선 안 될 텐데?”

-……글쎄요.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

-악셀을 건드린 건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하루빨리 악셀에게 사과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이만.

“이봐요, 미스……!”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던 찬영은 멋대로 전화를 해 놓고 다시 멋대로 전화를 끊어 버린 스티브 위버의 행동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 개자식이!

“정은 무슨! 자기가 무슨 한국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한국 진출을 꿈꾼다더니, 표현까지 닮아 가려는 건가.

스티브 위버의 말에 어이없는 한숨을 삼키던 찬영은 대기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을 꽉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왜 이리 당당하지?’

무언가 이상했다.

[걱정 마십시오. 틀림없이 미스터 킴한테 머리를 조아릴 겁니다. 기사는, 믿고 맡겨 주십시오.]

며칠 전, 자신과 작당을 했던 기자 역시 비슷한 의견이었다.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연예계였기에, 한번 흠집이 나면 여러 번 흠집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 고고하게 하늘을 날고 있던 레온하르트 악셀이었지만, 높이 나는 새를 떨어트리는 것만큼 희열 넘치는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번 스캔들의 주인공이 레온하르트 악셀이란 건 얼마든지 짐작 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레온하르트를 데리고 있는 퀸 레베카 시어터의 오너 스티브 위버가 조금 전과 같은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찬영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전, 미스터 킴이 그렇게 역겨워하는 동성애자라서요.]

아무리 되새겨 봐도, 그 상황에서 자신의 비위를 맞춰 줘도 모자랄 레온하르트 악셀은 의문이 들 정도로 발끈했다.

특히, 자신이 백요한에 대한 험담을 했을 때는 더욱더 그랬다.

‘설마…….’

백요한을 본 순간 확연하게 가라앉던 레온하르트 악셀의 눈빛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군.

하하, 찬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그런 거였어.”

어쩐지, 지나치게 흥분을 하더라니.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찬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꽉 움켜쥔 핸드폰을 들어 올리려 했다.

달칵!

“이, 이사님! 큰일 났습니다!”

그리고 막 자신의 비서를 부르려고 할 때, 임시로 마련한 그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헉헉, 거칠게 숨까지 몰아쉬며 달려온 비서 유진을 노려보며 찬영이 이를 갈듯 말했다.

“이봐, 유진. 내가 몇 번을 말하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노크는 하고 들어오는 게 기본이라고…….”

“TV 보셨습니까?”

뭐?

“무슨 헛소리야?”

“얼른 웰리트 쇼를 틀어 보십시오! 레, 레온하르트 악셀이…… 악셀이!”

웰리트 쇼라면 현재 영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청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국민적인 TV 토크쇼였다.

웰리트 쇼와 레온하르트 악셀의 이름을 연이어 언급한 유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음을 인지한 찬영이 못마땅한 눈으로 이미 TV의 리모컨을 들고 있는 유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삐빅,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려한 조명과 함께 무대 뒤에서 무대 위 소파석으로 걸어오는 누군가를 비추고 있는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주인공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웨스트엔드의 왕자라 불리는 레온하르트 악셀 씨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악셀 씨! 악셀 씨의 TV 프로그램 출연은 우리 웰리트 쇼가 처음인 걸로 아는데요, 생애 첫 TV 출연을, 그런 엄청난 스캔들이 일어난 직후에 바로 해도 되는 겁니까?』

109화

더 웰리트 쇼.

영국의 국민적인 엔터테이너 사무엘 웰리트가 자신의 성을 걸고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은 최고의 스타들, 혹은 현재 가장 큰 이슈 몰이를 하고 있는 셀럽들이 출연하여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대중들에게 한 발짝 다가가는 토크쇼로 알려져 있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웰리트 쇼의 메인은 아무래도 마지막 3부였는데, 3부의 주인공이 한 회차의 주인공이라 봐도 무방했다.

‘악셀이 왜 저기에……!’

한국계 영국인이기는 하지만 영국에서 지낸 시간보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훨씬 많았던 찬영도 웰리트 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을 만큼 예의 쇼는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방청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당당하게 사무엘 웰리트가 안내하는 곳으로 착석한 레온하르트 악셀을 화면으로 본 찬영의 얼굴이 경직됐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찬영과 달리, 제게로 쏟아지는 조명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미소까지 띤 레온하르트 악셀이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웰리트 씨, 초면인 사람에게 보자마자 너무 직구를 날리시는 거 아닙니까? 숨 돌릴 시간쯤은 주시죠. 아시다시피 제가 TV 프로그램은 처음이라서요.』

『하하, 제가 그랬나요? 어쨌든 반갑습니다, 악셀 씨. 여러분, 모두 환영해 주십시오! 레온하르트 악셀입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하는 레온하르트의 넉살에 사무엘 웰리트가 하하 웃으며 방청객들과 시청자들에게 다시 한번 그를 소개했다.

찬영은 서서히 전환되는 TV 속의 분위기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레온하르트와 웰리트가 나누는 대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 웰리트는 레온하르트 악셀의 프로필과 커리어에 대해 간략하게 읊어 준 후 그가 어떻게 뮤지컬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주연으로 나서고 있는 뮤지컬 가 어떤 내용인지 자연스럽게 말하도록 유도했다.

현재 TV를 응시하고 있는, 그리고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있는 ‘그’ 질문이 언제 나올지 예측하는 글이 SNS에 올라올 만큼, 레온하르트 악셀의 TV쇼 출연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합니다. 자, 그럼…… 후후,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이군요.』

『올 게 왔나요?』

『기다리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저희 프로그램이 몇 년 동안 악셀 씨 한번 섭외해 보겠다고 그렇게 애를 쓸 땐 콧방귀도 안 뀌시더니, 얼마 전 직접 저희 쇼에 출연 의사를 밝히셨다면서요?』

……직접?

찬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찬영이 알기로도 레온하르트 악셀은 공연 외의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인터뷰도 공연의 프로그램북을 위한 대답만 간략하게 하거나 공연 개막 전의 프레스콜 등의 단체 활동에만 응했다.

그 탓에 레온하르트에 대해 알려진 건, 그가 웨스트엔드로 넘어오기 전 독일에서 짧게 활동을 했다는 것과 그마저도 단역에 가까웠다는 사실뿐이었다.

영상이 남기 힘든 공연계의 특성상 레온하르트의 과거 행적을 찾기란 더욱 어려웠다.

물론 근래 들어 기술이 발달한 덕에 레온하르트가 출연했던 공연의 영상이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오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극히 드문 일화였다.

찬영이 몬스터 컴퍼니 ENT의 해외 진출을 위한 첫 타깃으로 레온하르트 악셀을 잡은 것은, 웨스트엔드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배우가 지나칠 정도로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껴서였다.

TV에 출연하지 않는 은밀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들리던 그 레온하르트 악셀이 직접 프로그램에 출연 의사를 밝혔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저 역시 당혹스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찬영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레온하르트는 늙은 여우와도 같이 능숙하게 대답을 유도하고 있는 사무엘 웰리트에게 짙은 미소를 짓더니 닫혀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정말 노골적이시군요, 웰리트 씨.』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해해 주시죠. 저는 어디까지나 여기 계신 분들과 현재 TV를 보고 계시는 분들을 대신해 질문하는 것뿐이라서요.』

『이해합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역시 호쾌하시군요. 그렇다면 저도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현재 런던에서, 아니 영국 전역에서 축구 중계보다 더 높은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람이 단연코 악셀 씨인데요, 왜 그런지는 알고 계시죠?』

『제 스캔들 때문 아닙니까? 제가 게이라는.』

『그렇죠. 저의 짐작컨대, 스캔들이 터지고 난 이후 입장 발표를 하지 않던 악셀 씨가 이렇게 저희 쇼에 직접 출연해 주신 건…… 아마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셔서일 것 같은데, 아닙니까?』

『…….』

찬영은 입을 다문 레온하르트의 녹색 눈동자가 잠잠하게 일렁이는 것을 목격했다.

‘느낌이 안 좋군.’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무는 찬영의 귀로 피식 실소를 터트리는 레온하르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직설적인 사무엘 웰리트의 질문에도 여유를 잃지 않던 레온하르트 악셀은 천연덕스럽게 다리를 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뭐?

『웰리트 씨의 ‘더 웰리트 쇼’에 출연한 건, 이 프로그램이 저의 입장을 발표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정하지 않는 레온하르트 악셀의 반응에 방청석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찬영은 심장박동이 더욱더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시원하게 대답해 주시니 제가 더 놀랍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악셀 씨는 혹시……?』

『네, 게이가 맞습니다.』

……!

일순 스튜디오가 술렁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유려한 미소를 흘리며 붉은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처음부터 동성을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여태까지 만났던 상대들은 전부 이성이었고요.』

『그 말씀은, 동성애자가 되신 지 얼마 안 되셨다는……?』

『그렇죠. 얼마 전 제 인생을 바꿀 만큼 놀라운 사랑을 만나게 됐고, 그 사람이 하필 ‘남자’였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 거죠.』

짙은 눈웃음을 그리며 말하기는 했지만 세간을 향한 일침이 깔린 대답이었다.

조심스레 질문을 내뱉던 사무엘 웰리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웰리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침묵에 휩싸인 스튜디오의 적막을 깨트린 사람은 레온하르트였다.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을 이해하고 알아 가는 것은 이 스튜디오에 계신 여러분도, TV 화면을 지켜보시는 여러분도, 기사를 접한 여러분도, 그리고 제 앞에 앉아 계신 웰리트 씨도 겪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일 겁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알고 싶어지고, 점점 더 원하게 되는 경험은 한 번쯤 해 보셨겠죠. 저는 그런 여러분과 똑같이, 얼마 전 머리가 따라가기 힘들 만큼 원하게 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저와 같은 생식기를 지닌 남자라는 사실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게 뭐, 대수입니까? 제 사랑에 성별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그 사람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이면 충분했으니까요.』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무엘 웰리트와 스튜디오 내의 사람들을 차례로 응시하더니 숨을 고르며 말했다.

『물론 저 역시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성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동성을 좋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번 일에 이렇게 쏟아지는 관심을 조금 이해할 수 없군요. 아니, 정확히 짚으면, 제 연인의 성별에 관심을 가지는 현실이 꽤 씁쓸합니다. 저는 ‘누군가’로 인해 강제로 사생활을 오픈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인데 말이죠.』

‘저…… 개자식이!’

레온하르트가 언급한 ‘누군가’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찬영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함께 TV를 보고 있던 유진 역시 ‘이, 이사님!’ 하고 염려를 가득 품은 음성을 흘렸다.

찬영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SNS에서는 폭주하기 시작한 레온하르트가 대체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하다는 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악셀 씨는 이번 사건에 대해 화가 많이 나 계시는군요.』

사무엘 웰리트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흘긋거리며 툭 말을 던졌다. 그러자 하하, 웃던 레온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예. 뭐, 화가 나긴 했습니다. 저는 사생활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이라뇨?』

『이제 대놓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언급할 수 있지 않습니까?』

『……!』

레온하르트 악셀의 눈웃음을 지켜보던 찬영은 순간 멈칫했다. TV를 통해 보고 있는 그가 느끼기에도 상대를 향한 마음이 가득 느껴지는 미소였기 때문이다.

찬영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행복하고, 즐겁죠. 오히려 이렇게 당당히 드러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악셀이 사무엘 웰리트에게 향했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이런 식으로 저의 사생활을 강제 오픈하게 한 상대에게는, 그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두근.

“이, 이사님…….”

분명 자신을 지목한 말이었다.

찬영은 서늘하게 내리깐 눈으로 TV를 응시했다.

“이사님!”

“뭐야! 또 왜!”

그 순간, 몇 번이나 저를 부르는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영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유진을 노려봤다. 언제 전화를 받은 건지, 핸드폰을 들고 있던 유진이 ‘회…… 회장님이십니다.’ 하고 사색이 된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회장님?’

자신의 비서인 유진이 회장님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찬영은 자신의 큰아버지이자 몬스터 컴퍼니 ENT를 맡긴 장본인인 MC 그룹의 총수를 떠올렸다.

‘큰아버지께서 왜……?’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진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찬영은 TV를 끄라는 고갯짓을 한 다음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예, 회장님. 접니…….”

-김찬영, 이 버러지 같은 자식!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110화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죠.”

늦은 밤, 고독을 깨우는 전화에 딱딱한 태도를 유지하던 막시밀리언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달싹였다.

취침을 위해 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던 엘레나는 자신의 등장과 동시에 전화를 끊는 막시밀리언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전화인데 그렇게 딱딱하게 받아요?”

“왔어?”

방문 쪽에서 들리는 그녀의 음성을 듣고 낮게 탄성을 터트리던 막시밀리언이 두 팔을 벌리자 엘레나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 답 안 했잖아. 이 시간에 누구예요?”

그에게 안기는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막시밀리언을 보며 엘레나가 대답을 종용했다.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막시밀리언이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MC 회장.”

“MC? 아아, 이번에 일 벌인 남자네 모회사구나. 그런데 갑자기 그쪽 회장님이 왜? 당신은 직접 나서는 거 싫어하잖아요.”

명망 높은 독일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악셀가(家)의 차기 가주인 막시밀리언 폰 악셀은 얼마 전 세계적인 전자 회사인 AXE 전자의 총수 자리에까지 올랐다.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사교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사적인 감정으로 그룹의 공적인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더욱더 그랬다.

“싫어하지.”

그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엘레나의 발언에 쓰게 미소를 그리던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흘렸다.

“하지만 간절한 부탁이 있었어.”

“간절한 부탁? 누구의?”

답을 하는 대신 그저 옅은 웃음을 짓는 막시밀리언의 표정을 보고 엘레나가 작게 ‘레온이구나.’ 하고 속삭였다.

막시밀리언은 어느새 제 품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엘레나의 흑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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