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59)

“…….”

-참, 요한! 그것보다 그 기사에 언급된 사람, 그러니까 기자가 인터뷰를 한 한국계 영국인이라는 사업가 말이야. 이름이 익숙해. 외형도 그렇고……. 혹시 그 개자식 아니니? 그 자식, 영국 들어온 거야? 만약 그렇다면 정말 가만 안 둘……!

“안나.”

-으응?

“미안한데, 나 볼일이 생겼어.”

-어?

“연락해 줘서 고맙다. 일 끝나면 전화할게.”

누군가를 떠올리며 부드득 이를 가는 안나마리아를 향해 말한 요한은 얼른 전화를 끊고선 핸드폰 속의 시계를 흘긋거렸다.

현재 시각, 오전 11시를 갓 넘긴 상황.

내일 있을 리그 경기를 대비한 훈련은 오후 2시부터 열린다. 아시안컵 일정을 모두 치르고 돌아온 요한은 리그 경기가 아닌 다음 주 목요일쯤 있을 챔피언스 리그 홈 경기부터 출전을 할 예정이었다.

‘아직 시간은…… 있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서둘러 외출할 채비를 한 후 현관으로 향했다.

“……!”

그리고 막 요한이 대문을 연 순간, 요한은 제 앞에 서 있는 커다란 그림자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악셀…… 씨?”

“나가려던 거 아니었나?”

레온하르트 악셀이 쓰고 있던 마스크와 선글라스, 그리고 검은 캡 모자를 벗으며 요한을 올려다봤다.

소파에 앉은 레온하르트를 내려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던 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당신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으니까.

목구멍을 맴도는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요한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그래?’ 하고 웃으며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없이 착석하는 요한을 힐끔거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

어젯밤에 이어 또 한 번 불쑥 나타난 레온하르트로 인해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요한은 하하, 웃으며 긴 한숨을 내쉬는 레온하르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한테 문제가 좀 생겼어.”

아.

“공연도 펑크를 내야 할 정도로 난처한 일이라서, 잠깐 피해 있을 곳이 필요한데…….”

“…….”

“……이상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그쪽밖에 없더라고.”

그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요한은 계속해서 레온하르트를 직시했다. 요한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레온하르트는 후우, 한 번 더 호흡을 고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미안. 그쪽과 내가 아무 사이가 아닌 것도 알고, 내가 어제…….”

“알겠습니다.”

“어?”

“여기 계십시오.”

어제 일을 언급하다 주저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레온하르트의 녹안이 흔들렸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보다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으응?”

“어째서 그런 기사가 난 거죠? 그건 너무…….”

“의도적이었지?”

차마 꺼내기 어려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레온하르트는 태연했다. 요한은 그런 그의 반응에 당황했다. 레온하르트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손을 쓸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수까지 쓸 줄은 몰랐어. 아니,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는 건가? 하긴 뭐, 한국에서 유명한 엔터 사업가라니, 여기 언론에 줄을 대는 것 정도야 쉬웠겠지.”

쿡쿡 실소까지 터트리며 마치 남 일처럼 말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생소했다. 요한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왜, 너무 태연한가?’ 하고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요한이 주저하다 물었다.

“그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분명 어제 봤을 땐…….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요한을 보고 옅은 눈웃음을 그리던 레온하르트가 대답했다.

“있었지.”

“네?”

“내가 그 자식의 심기를 건드렸거든.”

“심기……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했다. 아무리 심기를 건드린다고 할지언정, 레온하르트의 비밀을 언론에 폭로하기까지 할 정도인가. 게다가 어떻게 찬영이 레온하르트의 비밀을 알게 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요한이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기자 하하, 크게 웃던 레온하르트가 설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 자식이 그쪽을…… 요한 너를, 안 좋게 말하잖아.”

……뭐?

“참을 수가 있어야지. 감히 누구 앞에서 네 험담을 하는 거야?”

“…….”

“개자식.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는군. 나는 상관없지만, 네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건 견딜 수 없어.”

주먹을 세게 움켜쥐는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요한은 은근한 살기마저 피우는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

그때였다.

“참.”

입술을 꽉 악물며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요한에게 레온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있어도 되나?”

“예?”

“훈련, 오늘도 있을 거 아니야.”

상황이 이렇게 됐음에도 제 일을 걱정하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심장을 콕콕 건드린다. 요한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 흐리게 웃었다.

“안 그래도 가려고 했습니다.”

“아, 그럼 나는 상황이 수습되면 나갈…….”

“아뇨.”

“응?”

“제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계십시오.”

“어?”

요한은 눈을 크게 뜨는 레온하르트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돌아와서, 악셀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107화

“다들 이 기사 봤어?”

훈련을 마친 요한이 드레싱 룸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뱅그르르 모여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선수들 중 한 명이 목소리까지 가다듬으며 기사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밤 본 기자가 한국의 유명 엔터 계열 회사의 중역인 K 씨와의 만남을 통해 얻게 된 정보에 의하면, K 씨가 협업을 준비 중이라는 공연의 캐스트이자 웨스트엔드의 왕자로 불리는 배우 A가 놀랍게도 동성애를 즐긴다고 한다. ……동성애라니. 내가 잘못 말한 거 아니지?”

기사를 읽다 놀라 주변 동료들에게 묻는 후안 고메스의 말에 근처에 있던 브래들리 찬이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쩐지 오늘 아침에 뭔가 시끄럽더라니, 이래서였군.”

“더 읽어 봐, 고메스.”

재촉하는 주변 선수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고메스가 다시금 핸드폰 속으로 눈을 고정시켰다.

“흠흠! 웨스트엔드에서도 톱클래스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A는 동종 업계의 다른 배우들과 달리 깨끗한 사생활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바른생활 이미지까지 얻었던 그의 사생활이, 이번 폭로로 인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간 A의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은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그의 성적 취향이 ‘특별’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참고로 A는 웨스트엔드에서 남성이 투톱을 이루는 공연의 주연 배우이며, 런던의 유명 축구 클럽의 메인 모델로 활약하고 있다……라. 하하.”

“이니셜을 쓰긴 했지만 대놓고 누군지 지목하고 있군.”

“그러게 말이야. 이거, 누가 봐도 레온하르트 악셀 아냐? 남성 투톱극은 라헤밖에 없고. 런던의 유명 축구 클럽이라면 우리 팀이잖아.”

“그래서 우리 출근길도 시끄러웠던 건가?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혹시 우리한테서 뭔가 건지려고?”

쯧, 혀를 차는 수비수 커티스 닐의 발언에 같은 수비수 다니엘 루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의 캡틴, 리케프랭크 주니어가 ‘다들 그 정도로 하지.’라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훈련을 마친 선수들은 예의 기사를 두고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른다.

‘…….’

내일 있을 리그 경기를 대비한 훈련에서 다른 동료들과 달리 가벼운 몸풀기 정도의 훈련을 받았던 요한은 동료들이 하나둘씩 샤워실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동료들은 언제 그런 말을 건넸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할 준비를 했다.

요한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백, 너는 안 가?”

드레싱 룸에서 옆자리를 쓰고 있는 골키퍼, 조나단 리드가 빙긋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급하지 않으니 먼저 가십시오.’라 대답한 요한은 트레이닝 센터로 오기 직전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걱정 마. 그쪽 말대로, 아무 데도 안 가고 여기 있을게.]

이미 한 번 겪어 봤기에 이번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고 있었다.

원치 않은 폭로로 인해 받을 상처는 생각 이상으로 큰 법이니까.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손까지 휘휘 저으며 말하는 레온하르트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자신감이었을까.

집을 나서는 마지막까지 뒤를 돌아보며 그를 살피는 저와 다르게 빙긋 웃으며 자신을 배웅하던 레온하르트는 자연스럽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했다.

요한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흘렸군, 그 K라는 놈.”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겨우 조용해진 드레싱 룸을 울린 것은 디에고 가르시아의 음성이었다.

요한은 고개를 들어 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디에고를 바라봤다.

“어느 멍청한 사업가가 자신이랑 협업하고 있는 공연의 배우에 대한 약점을 읊어. 다분히 고의적이지. 그나저나 악셀이 바이인 줄 몰랐네. 아니면 정말 게이인 건가? 뭐, 딱히 중요하진 않다만.”

“…….”

“이봐, 랄프. 그 K라는 놈, 혹시 어제 봤던 그 자식 아냐? 왜, 악셀이랑 어제……. 어이, 어디 가!”

자신을 향해 말하는 디에고의 음성을 가뿐히 무시한 바스티안이 ‘요한.’ 하고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요한은 잠깐 이야기 좀 하자는 바스티안의 자안을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

“난처하게 됐겠어. 악셀 씨 말이야.”

저만 내버려 두고 어딜 가냐고 소리를 질러 대는 디에고의 외침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린 바스티안은 요한을 휴게실로 데려왔다.

바스티안에게서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받은 요한은 멈칫했다.

“게이설이라니. 그것도 본인이 직접 밝힌 게 아닌 타인에 의한 강제 커밍아웃이라니……. 그 말을 꺼낸 K라는 사람,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부드러운 음성을 흘리고 있었지만 바스티안은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쓰고 있는 바스티안을 쳐다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티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응? 뭐가?”

바스티안이 되묻자 요한은 주저하다 다음 말을 내뱉었다.

“만약 들켜 버린다면. ……키스트 씨와의 사이를 들켜 버린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헤어……지실 겁니까?”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바스티안 랄프가 이안 키스트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은연중에 이미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바스티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거론하지 않았을 뿐.

요한의 직접적인 질문에 바스티안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풋 웃어 버렸다. 바스티안은 ‘이제야 아는 척을 하는 거야?’ 하고 생긋 미소를 그리며 속삭인 뒤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확실히…… 난처하긴 하겠지.”

“…….”

“아무래도 직업적 특성상 게이라는 게 들키면 좋지 않을 테니까. 나나 그 사람이나, 다르지 않을 테고.”

찌르르, 속이 따끔거린다. 예상했던 대답에 요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런 요한의 명치를 세게 내리치는 바스티안의 다음 발언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연애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단호하다 못해 확신까지 실려 있는 바스티안의 말에 요한은 정신을 차렸다. 미동 하나 없이 당당한 바스티안의 시선이 코앞에 있었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스티안은 약간의 충격을 받은 듯한 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비밀이, 그리고 상대의 비밀이 세간에 알려진다고 할지라도…… 단지 그뿐이야.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게 되었을 뿐, 달라지는 건 없어.”

“……!”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남들도 알게 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과 헤어질 생각은 없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 향했기 때문인데, 다른 사람의 시선이 걸린다고 해서 그 마음을 접을 이유는 없잖아?”

바스티안은 눈에 힘을 주고 있는 요한에게 이어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믿고, 그 사람도 나를 믿는다면…… 나는 오히려 당당하게 그 마음을 드러낼 거야. 좋아하는 사람을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가락질을 받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요한.”

바스티안은 대답 없는 요한에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이런 사실은, 이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 * *

-기사 봤어. 사고를 쳐도 아주 대형 사고를 쳤던데? 아니, 정확히는 당한 건가?

웃음기 섞인 엘레나의 말에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명백하게 당해 버렸지.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거짓말. 일부러 당하도록 유도한 건 아니고?

“…….”

약한 척 대꾸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발언을 들으며 레온하르트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물론, 대충 각오는 했다.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상대는 아닌 것 같았지.’

이를 꽉 악물며 저를 노려보던 데릭 킴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스티븐 위버에게까지 연락을 넣어 길길이 날뛰었다지 않은가. 레온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응?

-어떻게 대처할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레온하르트 악셀이 대놓고 일격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거니?

“…….”

-듣자 하니 널 건드린 녀석이 한국에서 돈깨나 굴리는 집안 자제라며?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하더군.”

-레온, 너무 느긋한 거 아니야?

“내가?”

-그래. 너 지금 게이라고 소문 다 났어.

“그 덕분에 마키의 핸드폰에 불이 날 지경이라더군. 큭큭.”

-어머, 웃음이 나와?

“울상을 지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뭐?

“잘못한 게 없는데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잖아? 내가 게이인 게 맞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

-……!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엘레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레온하르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나는 아직 완벽한 게이는 아니야.”

-그게 무슨…….

“한마디로, 아무 남자에게나 서는 놈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오로지…….”

-요한 백, 한정이다?

“……그런 거지.”

말끝을 흐리는 레온하르트 대신 대답해 준 엘레나는 부정하지 않는 그를 보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스캔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밝아 보여서 다행이야.’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대꾸하지 않은 레온하르트는 엘레나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짧게 상의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 헉!

“어, 언제 왔지?”

어느덧 해가 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온하르트가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갈무리하며 고개를 돌릴 무렵이었다. 요한의 귀가 시간에 맞춰 그를 반길 생각이었던 레온하르트는 언제 왔는지 제 뒤편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선 놀라 입을 벌렸다.

‘이런.’

요한이 도착한 시점이 언제인지 걱정이 됐다. 하필 엘레나와 통화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은 아닐까. 그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이별하게 된 데에 그녀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던지라,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서둘러 말하기 위해 입술을 열려고 했다.

“요한, 방금 전화는…….”

“돌아오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엘레나와는 지극히 공적인 문제로 연락을 한 것이라고 말하려던 레온하르트는 제 말을 끊어 버리고 침투해 온 요한을 멀뚱히 응시했다.

요한은 무언가 각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진지한 얼굴에 움찔하던 레온하르트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미안해요, 악셀 씨.”

뭐?

레온하르트는 앞뒤 다 잘라 버리고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요한을 바라봤다. 요한은 힘껏 제게 머리를 숙였다 다시 들어 올리며 의지를 담은 푸른 눈동자를 그에게 고정시켰다.

요한의 눈빛과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쿵쿵, 심장이 뛰어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요한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대략 두 달 동안…… 제 감정만 앞세워서 당신을 상처 입힌 점, 멋대로 시간을 갖자고 한 점, 헤어지자고 한 점, 당신을 믿으려 하지 않은 점, 모두…… 사과드립니다. 미안해요.”

“……요한.”

“무서웠어요.”

요한이 말간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떨리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두려웠어요. 그 사람처럼…… 악셀 씨도 저를 버릴까 봐, 외면할까 봐. ……무서웠습니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

“알아요. 당신은 그럴 리 없다는 거.”

요한은 소리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그럴 일 없다는 거.”

“후우, 요한.”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어요.”

“…….”

“아니, 정확히는 저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죠. 당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될, 나 자신을. 그래서 더욱 곪게 될 우리 둘 사이의 간격을…… 믿지 못했어요.”

토해 내듯 내뱉는 요한의 고백을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물었다.

“굳이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지?”

어째서 하필 이 시점인가.

아무 사이가 아니게 된 바로 지금 이 시점에.

자신과 얽히게 된다면 요한 본인 역시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걸 모르지 않을 이 시점에, 대체 왜.

사과를 하기에는 시기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삼키는데 요한이 이어 말했다.

“저 역시, 당신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두근.

기대를 했던 거겠지.

어쩌면, 그런 말을 들려줄 것이라고.

혹시나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을까- 하고.

자신 역시 기대를 했었다.

그래서 굳이 요한의 집을 찾아왔고, 스캔들을 핑계로 도움을 요구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그 누구보다 단호해지는 요한이 저를 내쫓지 않았다는 것에 희망을 갖고, 끊어진 인연의 끈을 다시금 붙이려 애썼다.

두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그 인연의 실이 이어지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레온하르트는 짧게 숨을 고른 후 저를 응시하는 요한을 내려다봤다.

요한은 그의 눈을, 사랑을 담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이 저를 좋아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저 역시……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아.

“……지난 두 달 동안,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정말 언제나, 당신이 생각났어요. 외로울 때도, 슬플 때도…… 그리고 기쁠 때면 더더욱.”

두근두근.

심장의 떨림이 제 것인지, 아니면 요한의 것인지 의심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긴장한 것은 틀림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코앞에서 느껴지는 요한의 숨결에 무의식적으로 이를 세게 악물었다. 요한은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좋아해요. 당신을 정말, 좋아합니다. 아니…….”

그리고 자신이 자각할 만큼, 떨리는 마음을 담아 말을 꺼냈다.

“무척 사랑하고 있습니다, 레온.”

108화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할지언정, 상대가 그 마음을 되돌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의, 요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가 자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자.

그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가 주된 마인드였기에,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며 힘주어 내뱉는 요한의 말에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고 있는 요한은 흔들림이 없었다.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의 푸른색 눈동자에 레온하르트의 가슴이 쿵쿵,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청력을 의심할 만큼 웽웽 맴도는 요한의 말이 지워지지 않고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레온하르트는 움직이지 못하고 멍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악셀 씨를 많이 놀라게 한 모양입니다.”

요한은 돌처럼 굳어 있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하죠. 그런 악의적인 보도와 스캔들은…… 공인인 악셀 씨에게 치명적이니까요. 저 역시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주먹까지 세게 움켜쥔 요한은 레온하르트의 스캔들을 터트린 기자와 언론사, 그리고 누구인지 짐작되는 K를 떠올리며 부드득 이까지 갈았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악셀 씨. 저도 더 이상은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레온하르트가 신경 쓰였는지 얼굴을 굳힌 채 말을 이어 나가던 요한이 돌연 그를 향해 결의를 다진 말을 뱉어 냈다. 그는 ‘지금 당장 앨리에게 전화하겠습니다.’ 하고, 자신의 에이전트인 앨리슨 디어에게 전화를 걸겠다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레온하르트는 그 순간에도 목구멍까지 차오른 ‘왜?’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앨리, 접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당장 성명서 하나를……!”

성명서.

요한이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러한 단어를 사용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레온하르트가 요한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들자 요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요한은 통화 중에 갑자기 전화를 끊어 버리고는 핸드폰을 감추는 레온하르트를 황당한 표정으로 응시하다 인상을 썼다.

“악셀 씨.”

“나를 지지한다는 그쪽의 성명서는 발표하지 않아도 돼.”

“예? 하지만!”

“그보다 요한.”

“……?”

“조금 전에 했던 말…… 그거 다시 해 줄 수 있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쿵쿵,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가 요한에게 닿을 것 같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럼에도 재차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노골적인 발언에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짓던 요한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고…….”

“아니, 그거 말고.”

“네?”

고개를 가로젓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눈썹을 까딱이던 요한은 곧 생각난 것이 있는지 ‘아’ 하고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후우, 짧게 호흡을 가다듬더니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레온.”

쿵.

쿵쿵.

그 말을 꺼내기까지 여러 번 고민했을 요한의 숨결과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발언에 가슴이 거세게 반응한다.

잘못 들은 게 아니군.

풋,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결국 입꼬리를 씰룩거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야.’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하던 요한 백이 자신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 주었다. 아니, 이름보다 더 가까운 애칭을, 내뱉었다. 심장이 들썩인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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