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에 가까운 실소를 터트리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요한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을 너무도 잘 아는 안나마리아의 말대로, 자신의 고통 따위는 나누려 들지 않는 요한을 똑바로 응시했다.
조금 전, 당황하던 모습 따위는 완벽하게 지워 낸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요한이 살짝 놀랐다. 레온하르트는 그가 동요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쪽은 참 여전하다 싶어서.”
“무슨…… 뜻입니까.”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는 요한을 주시하던 레온하르트가 소리를 내뱉었다.
“어떤 일이든 혼자 짊어지려고 하잖아.”
요한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과연 말을 해야 할까.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니,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더욱 해 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에게 미움을 받을지언정, 반드시 해야 할 말을 꺼내기로 결심한 레온하르트는 당황해 있는 요한을 바라봤다.
“데릭 킴이라는 남자가 그쪽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아.”
“악셀 씨.”
“그쪽은 아무 사이도 아닌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그 개자식을 당장이라도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어.”
“후우, 악셀 씨. 말씀드렸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어. 내가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나보다 더 아파할 그쪽 모습이 생각나서.”
“……!”
요한의 큰 눈이 일렁였다. 레온하르트는 호흡을 고른 후 말을 이어 갔다.
“그쪽이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한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요한, 그건 널 생각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일이라는 거, 모르는 건가?”
“……예?”
도톰한 요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거칠어지는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쓴웃음을 흘린 레온하르트가 계속 말을 이었다.
“더 이상 그쪽과는 관련이 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니, 아무 사이도 아니라서 오히려 더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레온하르트는 냉정한 음성을 흘렸다.
“요한, 힘든 일은 혼자 감당해서는 안 돼. 무엇이든 함께 의논하고 고민하다 해결을 해야지. 견디기 어려운 일을 끌어안고 있는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아.”
“……!”
“혼자 견디기 힘든 일은,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도 돼. 요한, 너는 너무 좋은 사람이라, 네가 혼자 힘들어하고 말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분담하려 들지 않아. 하지만 그건 나쁜 습관이야. 힘든 일은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법이라고. 그러니 네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버려.”
요한의 낯빛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날,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자세히는. 그저 우리가 짐작만 할 뿐이었죠. 아마도 나쁜 일을 당할 뻔했다는 거. 그래서 더욱 화가 나요. 그 애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그 때문에 계속 그날에 갇혀만 있으니까.]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쪽은 그 자식에게 제대로 화를 냈을까 생각해 봤어.”
“…….”
“아니, 그러지 않았겠지. 화도 내지 못하고 그저 잊으려고만 했을 거야.”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답이군.
레온하르트는 쓴 물을 삼키며 말했다.
“닫아 둔 거겠지. 언젠가는 덤덤해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줄곧 봉인만 해 둔 거고. 하지만 결국 제대로 털어 내지 못했기에 여기까지 온 거야.”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만 하는 자신의 말이 그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 수 없으나, 저 역시 요한 백이라는 사람을 경험했기에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있는 요한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을 흘렸다.
“요한.”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쪽은…… 그쪽 생각보다 강인하지 않아.”
“……!”
“아니, 그쪽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 아무리 강한 척하는 사람이라도 힘든 일이 있으면 흔들리기 마련이라고. 그러니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기대도 돼.”
레온하르트는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요한의 떨리는 눈동자가 제 움직임을 좇는 것이 보였다.
“물론 아무 사이도 아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고깝게 들린다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귀담아들어 줬으면 좋겠군.”
꼭 내가 아니더라도, 네 곁에는 널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시계를 흘긋거렸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꾸하지 않는 요한을 응시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이만 가 볼게.’라는 말을 내뱉은 후 그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
그러나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은, 그 순간 제 손목을 덥석 잡아 버린 요한의 강인한 힘에 의해 멈춰 버렸다.
놀란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내리자 요한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왜.”
두근.
“왜, 신경을 쓰는 겁니까.”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 당신이 대체 왜, 제게 신경을 쓰는 거죠.”
그의 앙다문 입술이.
“당신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고,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선 제게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감정을 가득 담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가슴을 두드린다.
레온하르트는 제 손목을 잡은 요한의 손길이 꽤나 우악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풉, 실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아니면 알면서도 인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저를 올려다보는 요한을 내려다보던 레온하르트의 눈꼬리가 호선으로 휘어졌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요한의 눈동자가 거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요한이 파르르 몸을 떨더니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 보였다.
레온하르트가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미련 따윈 갖지 말라고 그쪽이 날 밀어내도…… 내가 그쪽을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이렇게 신경을 쓰고.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가능하다는 방패까지 들고, 이렇게 찾아온 거잖아.”
너를 사랑하니까.
“네 모든 걸 함께하고 싶으니까.”
네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네가 겪는 기쁨도, 네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아픔도 나누고 싶으니까.
“내가 너를, 정말 미친 듯이 사랑하니까.”
그런 이유로 내가 그쪽에게 신경을 쓰는 건 불가항력이라고, 요한.
105화
“지금 뭐라고 했지?”
찬영, 아니 ‘데릭’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더욱 익숙해진 그는 귀를 타고 흘러들어 오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핸드폰 너머의 상대가 우물쭈물거리며 소리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조금 전 악셀 씨의 대리인인 젠슨 씨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생각보다 그쪽 입장이 확고하더라고요.
“확고하다니?”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이봐, 내가 꾸물거리는 걸 가장 싫어하는 거 모르나?”
-하아, 알겠습니다. 그쪽에서 계속 강조하더군요.
강조?
-악셀 씨는 더 이상 미스터 킴과 따로 만날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한국 진출로 협박을 하려거든 얼마든지 하라고……. 본인이 대변하고 있는 악셀 씨는 한국에 진출을 하면 좋긴 하지만, 안 해도 딱히 상관은 없다고.
“……!”
-그리고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는 관심조차 없으니 그런 걸로 위버 씨를 압박하려 들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며…….
“……뭐?”
근래 들었던 말들 중 가장 황당한 답변이었기에 찬영의 얼굴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오늘 오전 점심 식사 직전에 벌어진 일로 인해 누가 ‘갑’인지 가르쳐 주려고 은근한 압력을 행사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런 것이라니.
‘그쪽에서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하며, 어렵게 말을 꺼내는 자신의 비서를 향해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같았다.
찬영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일개 딴따라 주제에…… 감히 나를 무시해?’
[미스터 킴과 함께 있다 보니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제 귀를 의심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온하르트 악셀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녹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찬영은 그 당당한 태도에 기함했다.
물론 자신이 몬스터 컴퍼니 ENT의 세력 확장을 위해 괜찮은 해외 연예인들을 물색하고 있기는 했다.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웨스트엔드 외의 문은 두드리지 않는다던 레온하르트 악셀은 새롭게 시작하는 몬스터 컴퍼니와 잘 맞을 것이란 생각에 그를 스카우트하려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뿐.
레온하르트 악셀은 그저 ‘도구’였을 뿐이다.
그가 아무리 웨스트엔드에서 날고 기는 배우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일개 광대일 뿐이며, 손에 쥐고 움직이기 편한 한낱 장기말일 뿐이었다.
자신이 바람 한 번 불면 금세 와르르 무너트릴 수 있는 힘없는 갈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제게 그렇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다니.
저를 경멸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던 악셀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레온하르트와 헤어진 이후 그의 상사인 스티브 위버에게 짜증을 가득 담아 원성을 토해 낸 것은, 제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거두지 않던 레온하르트 악셀이 감히 누구에게 그런 말을 꺼낸 건지 똑똑히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광대에게 인생의 쓴맛을 보여 주려고 했건만,
-……사님. 이사……님?
“듣고 있어.”
몇 번을 생각해도 불쾌감을 씻어 낼 수 없어 입술까지 악물고 있던 찬영은 저를 부르는 비서의 음성에 현실로 돌아왔다.
찬영의 음산한 대답에 주저하던 비서가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음을 던졌다.
찬영은 눈을 내리깔며 잠시 답을 하지 않다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군.
“내일 아침 당장 기사를 터트릴 수 있는 기자를 하나 섭외해. 연예부면 좋겠군. 가십 전문보다는 이름이 있는 곳이 좋겠어.”
싸늘하게 일렁이던 찬영의 검은 눈동자가 그제야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고는 비서를 향해 지시했다. ‘예?’ 하고 되묻는 비서의 반응에 눈썹을 꿈틀거린 그는 오늘 제게 당당히 말하던 레온하르트 악셀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 미스터 킴이 그렇게 역겨워하는 동성애자라서요.]
“어디 한번, 나락으로 떨어져 봐야 누가 갑인지 알겠지.”
* * *
“내가 너를, 정말 미친 듯이 사랑하니까.”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떨어져 지내던 두 달 동안 확실하게 느꼈던 이 감정을 그에게 전달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꺼낸 이후 스르륵 풀어지는 요한의 손길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꽈악 붙들고 있던 요한은 멍한 얼굴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당황해 버린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찾아온 정적으로 인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쿵쿵.
멈추지 않는 심장이 자신의 고백이 제대로 된 타이밍에 꺼낸 것인지 의문이 들게 만들었고, 그 때문인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요한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화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순식간.
“느, 늦었군.”
레온하르트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레온하르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지만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생글생글 웃었다.
요한은 그런 레온하르트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만 가 봐야겠어.”
“…….”
“그, 그럼 또 보지.”
무심코 꺼낸 말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는 요한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걸까.
쾅!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홱 몸을 돌려 그의 집을 나섰다.
현관을 벗어나기 직전 요한을 향해 횡설수설거렸던 기억은 있는데, 길가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기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직전, 룸미러에 비친 제 얼굴을 힐긋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레온하르트 악셀.”
너, 제정신이냐?
쿵쿵쿵쿵.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Rrrr. Rrrr.
‘으음.’
Rrrr. Rrrr.
‘…….’
Rrrr. Rrrr-
젠장.
“여보세…….”
-너 지금 어디야!
……뭐?
레온하르트 악셀은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탓에 눈 밑이 퀭하고 온몸이 무거웠다.
그럴 만도 하지.
어젯밤 도통 눈을 감을 수 없었기에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 반전될 줄 몰랐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가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던 이유인즉, 이러했다.
그날 이후 지난 두 달 동안 제 안에서 요한의 존재를 지워 내려 애썼던 레온하르트 악셀은 놀랍게도 어제 오전, 그렇게도 지워 내려던 요한과 마주쳤다.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요한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됐으며, 모르는 척할 수 있었지만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요한을 향해 움직이는 감정을 끊어 낼 수 없었던 레온하르트는 결심이 서자마자 요한에게 달려갔고, 약해진 요한을 본 순간 엉겁결에 마음속에만 담고 있던 사랑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도망쳐 버리다니.’
자신의 사랑 고백을 듣고도 그저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기만 하는 요한의 모습에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뒤늦게 인지한 그는 그로 인해 숨이 가빠졌다.
제게 이별을 고한 상대와 두 달 만에 재회를 해서는 한다는 소리가 사랑한다는 말이라니.
상대가 얼마나 부담스러워할지, 그리고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결국 늦은 시간을 핑계로 도망치듯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집으로 돌아온 후가 더욱 문제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사고를 쳐도 그냥 사고가 아닌 대형 사고를 쳐 버린 바람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다 보니 늦게까지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던 레온하르트는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침대 속에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다 겨우 전화를 받았다.
고막을 찢을 듯한 음성을 내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안 키스트였다.
“이안?”
토요일인 오늘은 마티네 공연만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안의 외침에 한쪽 눈꺼풀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0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다.
‘조금 늦긴 했군.’
마티네 공연이 있는 날은 보통 7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곤 했던 레온하르트였지만 어젯밤의 여파로 인해 기상이 무려 세 시간이나 늦어 버렸다.
이안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하암, 크게 하품을 하던 레온하르트는 ‘어디냐고!’를 반복하고 있는 이안을 향해 말라 버린 입술을 달싹였다.
“집.”
-집?
“미안. 잠을 못 자서 늦게 일어났군. 곧 출발하도…….”
-안 돼!
응?
-집이라니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오늘, 아니 이번 주말 공연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무슨…… 소리야?”
레온하르트는 뜬금없는 이안의 발언에 황당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젠장할!’ 하고 욕설을 흘리던 이안이 말했다.
-인상도 더럽더니 정말 꼴값을 하는군.
“뭐?”
-데릭 킴 그 자식 말이야! 정말 미친 자식이었어.
“이봐, 이안 키스트. 알아듣게 말을…….”
-상황을 보아하니 아직 기사를 못 본 모양이군. 얼른 인터넷 확인해 봐. 네 이름, 쫙 깔렸어.
레온하르트는 이를 부드득 갈기까지 하는 이안의 말에 미간을 좁히다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 내의 인터넷을 확인하려 했다.
‘……?’
하지만 그러기 전, 자신의 메신저에 수백 통이 넘는 연락들이 와 있는 것이 보였다. 기사들을 확인할 틈도 없이 메시지들을 발견한 레온하르트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수많은 지인들부터 시작해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들까지, 그들에게서 온 연락들은 하나같이 레온하르트 악셀이 정말로 게이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문구를 담고 있었다.
‘흐응.’
대충 어떤 기사가 떴는지 예상이 되어 입꼬리를 올리던 레온하르트의 귀로 화가 단단히 난 이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개자식 정말 제정신이야? 아니, 제정신일 리가 없지. 제정신이라면, 강제 커밍아웃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짓인지 본인도 잘 알 테니까!
“…….”
-강경 대응하자고. 사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인터뷰 도중 말이 헛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떻게 헛 나올 수가 있어! 그리고 편집도 없이 그냥 인터뷰를 내보낸 그 기자 자식도 당장 고소하자고! 젠슨 씨한테 연락받았어? 젠슨 씨는 뭐래? 젠슨 씨도 고소하자고 하지? 이봐, 레온! 듣고 있어?
“…….”
-악셀!
“이안.”
제 일처럼 흥분하는 이안의 외침을 들으며 눈꼬리를 휘던 레온하르트는 높아진 친구의 톤과 달리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 화제면…… 우리 집 앞에 파파라치들이 들끓겠지?”
그러자 이안 키스트가 허탈한 숨을 흘리며 대꾸했다.
-뭐? 당연하지!
“그거 잘됐군.”
-……어?
코웃음을 치며 내뱉은 레온하르트의 혼잣말에 이안은 당황한 듯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이안에게 대답해 줄 생각 따윈 하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보다 레온, 스티브도 허락했으니 이번 주말엔 어디 가지 말고 집에만 박혀서 나올 생각 하지 마. 일단 상황이 조용해질 때까지……. 어이, 레온. 레온하르트 악셀! 듣고 있어? 왜 대답이…… 너 전화 끊으려는 거지? 그런……!
레온하르트는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는 이안의 음성을 완벽하게 무시하고는 종료 버튼을 눌렀다.
106화
[그렇게 미련 따윈 갖지 말라고 그쪽이 날 밀어내도…… 내가 그쪽을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떨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묻고 만 요한에게 레온하르트 악셀이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어째서 그가 자신의 집 앞까지 찾아온 건지, 그날 이후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건만 왜 아직도 그는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 ‘아무 사이’도 아닌 그가 자신의 과거를 듣고 이렇게 흥분을 하는 건지, 전부 궁금했다.
그의 입술에 시선이 고정됐다.
눈을 뗄 수 없었고, 호흡이 가빠 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지척에 있었기에 떨리는 제 마음을 그가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요한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인 레온하르트가 속삭였다.
[내가 너를, 정말 미친 듯이 사랑하니까.]
무심코 뱉어 낸 말이 분명했다. 어쩌면 분위기에 이끌려 꺼낸 말일지도.
그러나 진심을 가득 담은 말이었기에 얼어붙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인지 평소처럼 재빨리 대응하지 못했다.
쿵쿵,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요한은 한동안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또 보지.]
뒤늦게 자신이 꺼낸 말의 무게를 인지한 레온하르트가 서둘러 몸을 돌리기 직전, 스치듯 뱉어 낸 재회를 암시한 말에 요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손을 뻗어 그를 잡을 수도 있었으나 잡지 않은 까닭은, 붉어진 그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장은 잡지 말아 달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내버려 둔 요한은 쾅 닫히는 문소리를 듣자마자 풉 웃어 버렸다.
투득!
그러다 홀로 남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눈에서 후드득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금세 축축해진 손등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요한은 쓰게 웃어 버렸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고요하게 울리는 가슴의 여운이 씻기질 않고 있었다.
[사랑하니까.]
레온하르트가 제게 건넸던 그 말은, 적어도 요한에게 있어서는 무겁고 힘겹기만 한 말이었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요한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많은 이들로부터 애정을 받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상대에게서는 듣기 힘든 말이라고 여겼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제게 큰 상처를 주었던 찬영과의 일이 원인이 된 것이 틀림없다. 그랬기에 레온하르트 악셀의 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지레 겁을 먹고 그의 손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멀어지려 해도,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가능하다는 방패까지 들고, 이렇게 찾아온 거잖아.]
레온하르트는 정말이지 멋진 사람이었다.
용기 있는 사람이며,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과는 달리.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겁을 먹고 도망쳐 버린, 자신과는 달리.
‘너는?’
지난 두 달 동안 숨기고 감추기에 급급했던 마음의 호수 위로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는 깊은 밤, 레온하르트가 던지고 간 돌로 인해 눈을 뜨고 있던 요한은 스스로를 향해 묻고 또 물었다.
비록 무심결에 꺼낸 말일지라도, 어렵게 한 걸음 먼저 다가온 레온하르트 악셀에게 어떠한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까.
“……응, 안나.”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태양이 떴다. 요한은 요란하게 울려 대는 핸드폰을 응시하다 전화를 받았다.
-요한! 기사 봤어?
“기사?”
-악셀 씨 말이야!
어?
-세상에, 그런 악의적인 기사가 날 줄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안나. 기사……라니?”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잔뜩 흥분한 안나마리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던 요한은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핸드폰을 뒤적였다.
‘……!’
인터넷을 켠 순간, 안나마리아가 어째서 그러한 발언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기사가 시야로 들어왔다.
‘단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기사 속에는 웨스트엔드의 왕자와 협업을 하고 있다는 한 사업가가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무심코 흘린 말에 대해 서술되어 있었는데, 레온하르트 악셀이 예의 사업가 앞에서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혔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악셀 씨 말이야. 이제 너랑 아무 사이도 아니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게이는 아니잖아. 그런데 괜한 구설수에 얽히는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알기로는,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