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59)

「…….」

「정말 멋진 선배다 싶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준오의 모습에 요한은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두 눈썹을 위로 까딱이는 준오에게 요한이 머리를 숙여 보였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고맙긴.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뭘.」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들어가서 쉬어!」

재촉하는 준오의 닦달에 못 이겨 요한은 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문을 열기 직전 계속해서 들어가라고 외치는 준오를 한 번 힐긋거렸지만, 준오는 자꾸만 손짓하며 푹 쉬라는 말만 반복했다.

요한은 그런 준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쓴웃음을 흘렸다.

‘좋은 사람이야.’

국가 대표 차출 이후 준오와 알게 된 것은 요한에게 있어 크나큰 행운이었다.

A팀의 주장인 준오가 발 벗고 나서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팀원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그 결과 50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최고의 결과를 낳았다.

다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기쁨을 맛봤던 순간은, 길지 않았던 요한의 프로 데뷔 이후 기억에 남을 일들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

두근.

희미하게 미소 짓던 요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졌다.

대문을 열고 집 앞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열기까지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으나 적막이 흐르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안정을 찾았던 심장이 급격하게 벌렁거렸다.

두근.

가슴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해 요한의 목을 죄어 왔다. 갈증이 일고 숨이 막혀 왔다.

핏기 가신 얼굴로 서 있던 요한은 몇 시간 전 자신이 마주했던 누군가의 검은 눈빛을 떠올리다, 간신히 잊어 낸 과거와 마주했다.

[네가 요한이냐? 반갑다. 오늘부터 네 선생님 겸 ‘친구’가 될 찬영이야.]

정들었던 한국을 떠나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요한이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던 시기, 그 사람을 만났다. 친구라고는 안나마리아밖에 없는 자신을 걱정한 어머니의 배려였다.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민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제 또래로 보였고, 어머니 지인의 소개를 받았다길래 큰 의심을 하진 않았다. 매일 제게 시비를 거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를 경계하지 않은 것이, 요한의 실수였다.

[요한아, 지금부터 나랑 하게 될 건 비밀이야.]

[비밀……이요?]

[그래. 좋은 ‘친구’는 가끔 비밀을 주고받는 법이니까.]

한국어를 수준급으로 구사하고 있던 요한에게 과외 선생은 사실상 필요가 없었다. 요한은 이미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축구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 것뿐이었으니까.

부족한 그의 사회성을 넓히기 위한 일환으로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요한은 가끔 부모님이나 안나마리아에게 알리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행동을 함께 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었고,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요한, 너 요즘 변했어.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이랑 어울린 이후로 더욱 그래!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요한의 변화를 눈치챈 건 바쁜 요한의 부모님보다 그와 자주 어울리는 안나마리아 쪽이었다.

안나마리아는 이상할 정도로 ‘그’를 싫어했는데, 처음에는 그런 안나마리아의 행동이 친구를 빼앗긴 ‘그’를 질투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냐. 느낌이 이상해. 그 사람 눈이……. 그것보다 요한, 들어 봐. 나 얼마 전에 그 사람, 여기서 세 블록쯤 뒤에 있는 골목에서…….]

[안나.]

[응?]

[선생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네가 누군가를 이렇게 험담하는 건 처음 봐. 네가 그런 사람일 줄 몰랐어.]

[요, 요한!]

당시 ‘그’에게 완벽하게 빠져 있던 요한은 안나마리아의 경고를 흘려 넘기고 말았다.

그것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당연히 좋아하지. 내가 널 안 좋아하면 누굴 좋아하겠어?]

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귀까지 닫아 버리고 그를 따랐다.

다정한 행동과 말, 그리고 부드러운 눈빛이 모두 계산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바보처럼 마음을 열었고, 그 결과 감당하기 힘든 큰일을 겪을 뻔했다.

[잊자. 잊는 것이 최선이야.]

그라는 존재를 제 인생에서 지워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모두에게 폐를 끼쳐 가며 제 삶을 망칠 뻔했던 사람을 완벽하게 잊지는 못했지만, 대신 덤덤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가족들과 안나마리아, 그리고 앨리슨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근 것은 오로지 그 때문이었고, 그렇게 몇 년이 더 흘렀다.

[혹시 나랑 섹스할 생각, 있습니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의문은 계속되었다.

어째서 자신은 동성에게 끌렸던 걸까.

왜 그 미묘했던 기분을 잊을 수 없을까.

내내 마음속에 남아 잊히지 않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요한은 결국 Dawnlight를 찾았고, 그곳에서 레온하르트 악셀을 만났다.

“하아.”

컥,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토해 낸 요한의 입술이 조금씩 혈색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세게 움켜쥐고 있던 손을 다시 풀어낸 요한은 ‘그’와 함께 있던 레온하르트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설마 그런 곳에서 레온하르트와 부딪칠 줄은 몰랐다. ‘그’와 마주칠 것이라고는 더욱더 생각도 못 했다.

안나마리아로부터 그가 한국으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에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 버렸었다.

두근두근.

‘그’를 보고 하얗게 질려 버린 제 모습에 몹시 놀란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뒤늦게 떠오른다.

‘많이…… 야위어 보였어.’

[요즘 들어 악셀 씨가 공연을 더욱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공연뿐 아니라 다른 활동도 한다고 하더라. 화보 촬영이나 뭐 그런 거 말이야. 이토록 열심히 일을 한 건 오랜만이라고 팬들이 좋아하면서도 건강 해칠까 봐 걱정한다는데……. 아, 맞다. 요한 너는 그 사람 이야기하는 거 싫어하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꺼내 놓고는, 실수인 것처럼 빙긋 웃는 안나마리아의 말들이 귓가를 맴돈다.

‘……!’

양반은 못 되겠군.

지이잉 울리는 전화에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린 요한은 발신인이 안나마리아라는 것을 깨닫고는 쓰게 웃었다.

그는 크게 호흡을 고른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요한, 괜찮아?

……뭐?

다짜고짜 묻는 안나마리아의 질문에 미간이 좁아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안나.”

-어? 아아. 그, 그냥. 네가 괜찮은지 갑자기 걱정이 돼서……. 모, 목소리를 들으니 나빠 보이진 않네. 나 오늘 밤샘이라 내일 아침에야 잠깐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얼굴 좀 보여 줘. 괜찮은지 확인 좀 하게. 알았지?

“…….”

-요한!

“알……았어.”

시험이다 뭐다 해서 계속 도서관에 머무르고 있는 안나마리아의 요청에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요한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안나마리아가 통화를 종료했다. 요한은 안부를 묻는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뜬금없던 그녀의 전화에 말없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네가 괜찮은지 갑자기 걱정이 돼서.]

갑……자기.

‘갑자기라.’

바쁜 안나마리아가 이렇게 짬을 내서 전화를 걸어온 것을 보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요한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전했을 누군가를 유추해 보았다. 그녀와 소통할 사람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이잉.

“……!”

거실의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슬슬 침대로 가야 할 시점인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요한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두근.

가슴이 무의식적으로 박동했다.

안나마리아와의 통화 이후 핸드폰을 내내 움켜쥐고 있었기에, 예의 전화가 손에 쥔 핸드폰으로 걸려 온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지이―

한 번, 그리고 두 번째 진동 소리가 들려오려던 와중 뚝 끊어져 버린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요한의 눈을 큼지막해지게 만들었다.

요한은 얼른 거실의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봉인해 두듯 놓아둔 핸드폰이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근, 두근-

지난 두 달 동안, 단 한 번도.

아니,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걸려 오지 않은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저, 그날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핸드폰이 울렸을 뿐이다.

단호하게 끊어 낸 사람은 자신이면서, 마치 습관처럼 예의 핸드폰을 충전해 두었던 요한은 지난 두 달 동안 그 핸드폰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전화도, 메시지도 온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가슴이 뛰었던 걸까.

그가 걸어온 전화가 아닐 수도 있는데.

잘못 걸려 온 전화일 수도 있는데.

스팸 전화일 수도 있는데.

입술을 잘근 깨물던 요한은 저도 모르게 홱 몸을 돌려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닫혀 있던 커튼의 문을 활짝 연 요한의 시야로, 그의 집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다 결국 몸을 돌려 버리는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 순간, 요한의 다리가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103화

“악셀 씨 생각이 맞아요. 데릭 킴, 아니 한국 이름으로는 김찬영. 그 자식은 정말 상종 못 할 악질이에요.”

저녁 공연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온 레온하르트의 시야로 붉은 머리의 여인이 보였다. 레온하르트가 간곡히 부탁하여 퀸 레베카 시어터까지 온 안나마리아 디어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던 안나마리아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레온하르트는 심상찮은 그녀의 반응에 조용히 대기실 문을 닫고는 그녀에게 물이 든 컵을 건넸다. 씩씩거리며 얼굴을 구기던 안나마리아는 ‘고마워요.’라고 말한 뒤 벌컥벌컥 물을 마시더니 후우,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 자식만 생각하면 피가 역류할 것 같아요. 그때 그 개자식을 속 시원히 패 주지 못한 게 얼마나 한이 되는지.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으으!”

바드득 이를 갈던 안나마리아는 ‘요한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요.’라는 이유로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요한과 데릭 킴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데릭 킴을 선생님으로 소개받았던 요한이 그를 따랐고, 그런 요한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여 그에게 나쁜 짓을 하려다 발각된 데릭 킴을 요한의 주변 인물들이 쫓아냈다는 이야기였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안나마리아의 발언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안나마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완벽하게 끊어졌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네?”

“하긴,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쉽게 끊어질 순 없죠. 그래서 조금 전처럼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악셀 씨를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나저나 용건은 대충 끝나신 것 같은데, 저 이제 가 봐도 될까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공부가 있어서요.”

요한과 이별하고 난 이후 안나마리아와의 개인적인 인연 역시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하여 그녀가 이곳, 퀸 레베카 시어터까지 와 줄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기실로 들어온 자신을 향해 ‘공연은 끝났어요?’ 하고 묻는 안나마리아의 모습에 살짝 안도했다.

긴 대화를 마친 후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안나마리아를 택시에 태워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 준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요한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의식적으로라도 찾지 않았던 요한의 집으로 차를 몬 것은 순전히 반사적인 행위였다. 안나마리아의 말이 귀에 남아서라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 레온하르트는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녀의 음성에 이를 악물었다.

[사고가 있었어요.]

[사고?]

[요한의 생일날 벌어진 일이었어요. 모두 그 개자식이 꾸민 일이었죠. 모든 약속을, 심지어 가족들과의 약속도 취소한 요한이 조금 이상해서 그의 뒤를 밟지 않았다면…… 요한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아직도 상상이 안 돼요.]

[……!]

[많이 믿었던 사람이어서 더욱더 상처를 받았을 거예요. 본인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전혀 아니었죠. 안 그래도 친화력이 떨어지는 애였는데 더 소극적이 되어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다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던 터라, 악셀 씨와 친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었죠.]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일.

그 일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상황에서 제게 트라우마를 안겨 준 사람과 재회를 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겠지.’

데릭 킴을 보자마자 핏기가 사라지던 요한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요한의 집 앞이라는 것을 깨달은 레온하르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짓이야, 너.’

대체 어쩌자고 여기에…….

물론 요한이 걱정되는 것은 막지 못하는 본능과도 같았다. 그래서 비밀리에 안나마리아까지 불러들였으니. 하나 요한이 자신과 만나기를 거부하는 상황이라면, 자신이 원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집을 찾는 것은 민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젠장.’

무심코 발길이 닿아 버렸다고 변명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길가에 차를 세운 뒤 핸드폰을 꺼내어 요한에게 전화를 걸던 레온하르트는 통화가 되기 직전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그는 손에 들린 핸드폰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푹 아래로 떨구었다.

‘진상을 알게 됐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군.’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이 이토록 쓰릴 줄이야.

그는 좁혀진 미간을 펴지 못한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조금이라도 명분이 있었다면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서라도 찾아갈 텐데, 요한은 이러한 일에 너무도 단호해서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의 닫힌 마음을 알기에, 지난 두 달 동안 수천 번도 넘게 연락을 해 보려다 포기했던 자신이 아닌가.

제기랄.

안나마리아에게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충동적으로 요한의 동네까지 찾아오기는 했으나 결국 집 앞을 서성거리기만 할 뿐, 초인종을 누르는 데는 실패했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쾅!

그때였다.

무겁기 그지없는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차를 세워 둔 곳으로 움직이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얼굴을 돌린 레온하르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자신을 발견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요한이 보였다.

쿵쿵.

심장이 반응했다. 푸르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얼어 버린 것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가로등 밑으로 요한의 검은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모습을 지켜보다 화들짝 놀랐다.

“요한, 너…….”

“왜 왔습니까.”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제게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요한의 행동에 레온하르트는 꽤 당황했다. 코트까지 입고 있는 자신과 달리, 재킷 하나 걸치지 않은 요한은 레온하르트가 답할 시간 따위 주지 않고 물었다.

레온하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뭐?”

“어째서 악셀 씨가 여기 있는 겁니까.”

따지듯 묻는 요한의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차가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혀 버리는 그 말에 요한을 향해 뱉어 내려던 말이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그의 신체 부위 중 가장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발’을 너무도 험악하게 다루고 있는 요한에게 미처 그것을 지적할 틈도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추궁하듯 저를 노려보는 요한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렸다.

쿵쿵.

그러다 그만, 쓰게 웃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픽 실소를 터트리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요한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레온하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

“왜 여기에 온 걸까.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쪽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했는데…….”

아니, 사실은 이유를 알고 있다. 어째서 이곳까지 오게 된 건지.

올 수밖에 없었는지.

후우.

길게 숨을 고른 레온하르트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요한을 향해 말을 이었다.

“걱정됐던 모양이야.”

“……!”

레온하르트가 뱉어 낸 말에, 힘을 주고 있던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인다. 동요한 걸까. 그 모습을 보며 울컥 감정이 치솟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계속 입술을 달싹였다.

“알아, 그쪽이 이런 행동 싫어한다는 거. 그래서 미안하게 생각해. 나도 질척거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악셀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많이 놀랐을 거예요. 그 자식을 마주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리고 혼자 감당하려 들겠죠. 그때처럼, 바보처럼.]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는 요한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는 찬찬히 요한을 바라본 후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마주쳤던 그쪽 눈빛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어.”

“……!”

“괜찮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왔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조용히 돌아가려 했는데…… 들켜 버렸군.”

레온하르트는 빙긋 웃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그러니…… 못 본 척해 줘.”

……대꾸조차 하지 않는군.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이건가.’

안나마리아의 말을 들은 이상 그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오전에 마주쳤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낯빛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군.’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긴 숨을 삼켰다.

‘그날’ 이후 요한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은 쌓이고 쌓여 수백, 수천 가지가 되었다. 얼마 전 이룩한 우승을 축하한다는 말부터 경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든가, 골을 멋있게 넣었더라 등등의 말이 입 안을 맴돈다.

그러나 끝내 뱉어 낼 수 없는 말들을 삼킨 레온하르트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요한을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갈게.”

저와 함께 있는 것이 괴로운 사람처럼 보였기에, 레온하르트는 흐린 미소를 담은 말을 흘렸다. 더는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못 본 척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응?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요한으로부터 레온하르트가 완벽하게 돌아섰을 때.

“그런데 왜…….”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레온하르트의 귓속으로 제 옷자락을 움켜쥔 요한의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왜 난 당신을 못 본 척할 수…… 없는 겁니까.”

104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어? 어어.”

거실로 자신을 안내한 후 돌아서는 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온하르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내뱉은 대꾸가 자연스러웠는지 흠칫하던 그는 이내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요한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 여겼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당혹스러웠다. 태연한 요한과 달리 이곳에 처음 온 사람처럼 긴장하고 있는 제 모습이 대조적이어서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뭐가…… 어떻게…….’

레온하르트 악셀은 자신이 요한의 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경위에 대해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그게 무슨……?]

못 본 척할 수 없다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요한은 깜짝 놀라 되묻는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간…… 있으십니까.]

[……!]

[여기까지 오셨는데, 차라도 드시고 가십시오.]

불과 몇 분 전, 제게 왜 이곳까지 온 것이냐고 물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 한잔 마실 것을 제안하며 홱 몸을 돌려 버리는 요한의 뒷모습을 멀뚱히 응시했다.

두근두근.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가슴이 멋대로 뛰어올랐다.

‘악셀 씨.’ 하고, 돌처럼 굳어 버린 제 이름을 그가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 버렸을 것이다.

“드십시오.”

차를 타 오겠다며 사라졌던 요한이 향긋한 차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날 뻔한 레온하르트는 으응, 하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후 요한의 눈치를 살폈다.

말없이 차를 내린 후 눈을 내리깔고 있던 요한이 자신이 건넨 찻잔을 받아 드는 레온하르트에게 말을 건넨 것은 몇 초가 흐른 뒤였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문장을 완벽하게 구성하지 않은 채 던진 요한의 질문에 레온하르트의 몸이 움찔거렸다. 레온하르트가 멈칫하자 후우, 숨을 흘린 요한이 중얼거렸다.

“안나군요.”

안나마리아가 무엇을, 어디까지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듯 말을 잇는 요한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얼른 입술을 열었다. 안나마리아를 위한 변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요한, 오해하지 마.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겠죠. 대신 악셀 씨께서 신경 쓰일 만한 발언을 한 모양이군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걸 테고.”

담담하게 말하는 요한을 보며 목구멍이 턱 막혔다. 하나같이 맞는 말인지라 레온하르트는 대꾸하지 못했다.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차분한 음성을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이제 괜찮으니.”

……뭐?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요한이 말을 이어 갔다.

“제가 한때 그 사람과 좋지 않은 일로 엮였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전, 괜찮습니다.”

살짝 뜸을 들이는 요한의 모습에 어둠이 서려 있다.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해서든 제게 티를 내지 않으려는 요한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혼자 감당하려 들겠죠. 그때처럼, 바보처럼.]

정말로 그럴 생각인가 보군.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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