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59)

요한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제게 있어 여기 계신 두 분만큼이나 고마우신 분입니다. 안 그래도 한 번쯤은 세 분께 정식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겨서 기쁩니다. 제가 런던에서, 그리고 대표 팀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세 분 덕분이에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머리까지 숙이는 요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장난을 치던 디에고와 바스티안, 그리고 살짝 웃던 준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요한아.”

“흠흠. 낯간지럽게.”

“요한, 선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준오와 디에고, 그리고 바스티안까지, 차례로 대답하는 그들을 보며 부드럽게 웃던 요한은 얼마든지 시켜도 된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 위로 손을 가져다 대던 요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시간과,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들이 반복되고 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확실히 두 달 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숙맥처럼 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그저 속으로만 앓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작년 8월에 있었던 1군 콜업 이후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모습의 자신이 거울 앞에 서 있다.

거울 속의 자신은 틀림없는 백요한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보이지 않는, 가면.

‘제대로…… 웃고 있기는 한 건가.’

언제부터인지 억지로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문득 발견하게 된다.

그가, 이런 가면을 쓰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두근-

아마도 그날 이후.

두근-

[우리……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자신을 찾아온 레온하르트 악셀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꺼내기 힘들었던 말을 했던 그날 이후가 아닐까.

‘정신 차려.’

네가 자초한 일이니, 감당해야지.

책임을 져야지.

태연해……져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십 번씩, 수천 번씩.

사라지지 않는 잔상처럼 제 앞을 맴도는 누군가의 모습이 또다시 머릿속을 맴돌아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까지 악물며 어떻게든 그의 얼굴을 지워 내려 했으나, 제 말을 듣자마자 상처받은 듯하던 눈빛이 지워지지 않아 심장에 비수가 콕콕, 박혔다.

먼저 저버린 것은 그가 아닌 자신이었다.

무서워서.

두려워서.

다시 상처받기 싫어서.

그의 손을 그렇게 놓아 버린 자신이 어떻게 그를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요한은 주먹을 세게 움켜쥔 후,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화장실을 나섰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해.

‘그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얼굴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런 면에서 큰 이득이었다.

요한은 후우, 호흡을 고른 후 동료들이 있는 룸으로 발길을 옮기려 했다.

“제가 미리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악셀 씨.”

그러나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귀 익은 이름이, 성큼성큼 움직이던 그의 발걸음을 뚝 멎게 만들었다.

* * *

“할리우드……요?”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기에 대체 무슨 말일까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이 들려왔다.

데릭 킴이 준비해 온 리무진에 타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상대가 건네는 샴페인을 정중하게 사양한 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빙긋 웃은 데릭 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라헤 팀의 내한 공연 외에도 제가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있습니다.”

“…….”

“촉망받는 한국의 배우들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유망한 배우들을 할리우드로 진출하게 하고자 하는 사업이죠. 간단하게 말하면, 제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를 좁은 한국에 국한시키지 않고 글로벌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물론! 그러려면 저희 회사에도 아시아 배우들이 아닌 배우들이 필요하겠죠. 그렇게 영입할 배우 1순위로 악셀 씨를 모시고 싶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열변을 토하는 데릭 킴을 쳐다보다 쓰게 웃었다.

“미스터 킴,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악셀 씨는 영화나 드라마에 크게 관심이 없으시다는 거.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잖습니까? 이왕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를 덧붙이는 데릭 킴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미 리무진에 올라타 있었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귀찮은 사람이었군.’

리무진 내에서도, 그리고 리무진에서 내려 레스토랑으로 향하면서도.

한번 시작한 말을 도통 멈추지 않는 데릭 킴을 힐긋거리며 레온하르트는 몹시 피로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대체 그가 무슨 제안을 할지 모르겠지만 레온하르트는 개인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과 함께 일하는 것을 선호했고, 데릭 킴의 말대로 드라마나 영화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특히 영국 내의 연극도 아닌, 영화를 위주로 하는 미국의 할리우드는 더더욱.

레온하르트 악셀은 스태프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그것을 알아봐 주는 관객들의 시선이 함께 어우러지는 무대가 자신의 연기를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키가 화를 많이 내겠어.’

스티브의 부탁 때문에 데릭 킴과의 식사 자리는 거절하지 못했지만, 만일 데릭 킴이 제안하겠다는 해외 진출에 대한 이야기를 마커스 젠슨이 듣는다면 길길이 날뛸 것이 틀림없었다.

“……!”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삼킨 레온하르트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리로 오시죠, 악셀 씨.’ 하고 자신을 안내하는 데릭 킴이 갑자기 멈추어 서자 덩달아 걸음을 멈춘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리다 두 눈을 크게 떴다.

쿵.

잘 달려 있던 심장이 바닥으로 수직 강하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쿵쿵.

쿵쿵.

런던은, 생각 이상으로 넓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지난 두 달 동안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지난 한 달 동안은 상대가 런던 내에 없었으나, 그 전에도 우연히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가 상대를 보는 것은 언제나 TV나 지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일 뿐.

‘어……떻게.’

그런데 오늘, 지금 이 순간 레온하르트는 우연히 찾은 레스토랑에서 그와 마주쳤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언제나 머릿속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그 남자와.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

레온하르트는 자신과 허공에서 눈이 부딪치자마자 새하얗게 얼굴을 굳히고 움직이지 못하는 요한을 향해 말을 꺼내려 했다.

무심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요…….”

“요한아, 왜 이렇게 안……. 백요한! 너 얼굴이 왜 그래?”

……!

그러나 그런 레온하르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뒤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더니 파리하게 질린 요한의 얼굴을 보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아, 준오…… 선배님.”

“괜찮아?”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어깨를 부여잡는 낯익은 얼굴의 남자를 보며 인상을 썼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요한이 준오의 손을 제게서 떼어 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 괜…… 괜찮습니다.”

“안 되겠다. 이대로 식사는 무리겠어. 일단 나가자.”

“네?”

“너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끝으로 요한을 부축하며 출입구 쪽에 서 있는 자신과 데릭 킴 쪽으로 다가오는 준오를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준오는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데릭 킴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얼마든지.’ 하고 데릭 킴이 스윽 비켜났다.

준오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요한에게 ‘가자.’라고 말한 뒤,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봤다.

두근두근.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던 레온하르트 역시 옆으로 스윽 비켜나자 준오는 요한과 함께 유유히 레스토랑 안을 벗어났다.

[너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몇 달간 마주치지 않다 우연히 마주쳤건만, 그런 자신을 보자마자 그렇게 안색이 어두워질 줄이야.

저를 발견하고 새하얗게 질리던 요한의 모습에 숨이 막혀 레온하르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흐응, 저 녀석은 여전하네.”

그때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인지하며 어두워지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는지, 요한과 준오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데릭 킴이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가 그 말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응시했다.

“아는…… 사입니까?”

데릭 킴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레온하르트의 말에 ‘예? 아아, 백요한이요?’ 하고 요한의 한국 이름을 제대로 내뱉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 그냥 알다 뿐입니까? 아주 잘, 아는 사이죠.”

101화

왠지 모를 비웃음까지 섞여 있는 데릭 킴의 비릿한 미소가 신경에 거슬렸다.

레온하르트는 입꼬리를 내리지 않는 데릭 킴을 향해 무심코 중얼거렸다.

“잘…… 아는 사이?”

그 말에 하하, 웃던 데릭 킴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제가 한국계라는 건 알고 계시죠?”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릭 킴이 입가에 미소를 단 채 소리를 내뱉었다.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 사는 해외 동포들의 세계는 생각 외로 좁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연이 닿지 않을 수 없죠. 저야 뭐, 한국 국적이 아닌 영국 국적을 선택했지만…… 어쨌든 저 녀석이랑 같은 동네에 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잠깐, 인연을 맺었죠.”

“……아.”

“단순한 인연이라기보다는 꽤 가까운 사이였지만요.”

“네?”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데릭 킴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한 3, 4년 전이었던가? 저 녀석이 갓 프로 계약을 맺었을 때일 겁니다. 그때 잠깐 저 녀석의 한국어 과외 선생으로 있었죠.”

한국어 과외…… 선생?

생각지도 못한 데릭 킴의 말에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릭 킴은 굳어진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알아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것이 단순한 놀람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계속해서 제 말만 이어 갔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확실히 맞는 것 같습니다.”

“…….”

“그 숙맥이 이제는 잘나가는 축구 선수가 될 줄이야. 사실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땐 천지가 개벽하는 줄 알았지 뭡니까? 하하하. 그나저나…… 런던 FC 선수들은 엉덩이를 조심해야 할 겁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반대려나?”

레온하르트는 비소를 흘리며 중얼거리는 데릭 킴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립니까.”

낮게 목소리를 깔며 묻자 데릭 킴이 검은 눈을 빛내며 쿡쿡 웃었다.

“미스터 악셀은 모르시겠군요. 하긴, 그 세계에서 소문이 나면 곤란하니 구단 차원에서도 막아 뒀겠지.”

뭐?

“미스터 킴.”

“아까 그 녀석 말입니다.”

“…….”

“백요한 그 자식 그거, 남자들 엉덩이만 밝히는 게이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길래 뜸을 들이나 싶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비하를 담다 못해 경멸까지 느껴지는 데릭 킴의 말투에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데릭 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가며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자식의 한국어 과외 교사였지 않습니까? 정확히 따지자면, 교사보다는 친구로 고용당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군요. 그때 그 자식은 한국어를 저보다 더 잘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성격이 모난 그 자식한테 친구가 없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마침 동네에서 나이가 비슷했던 제게 그 자식 부모가 과외를 맡겼거든요.”

“…….”

“저는 외동이라 동생이 없어서, 동생 하나 생겼다 생각하고 나름 잘해 줬는데 글쎄…… 하하. 그 자식이 저한테 흑심을 품었지 뭡니까.”

데릭 킴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치가 떨린다는 듯한 그의 행동과 표정에 레온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귀엽다, 귀엽다 해 주니 천지 분간도 못 하는 꼴이라니……. 당장 학을 떼고 과외 일도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

“그런데 그런 녀석이 잘나가는 축구 선수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아무리 세상이 혼란스럽다지만, 이 정도로 말세인 줄은 몰랐습니다. 게이 축구 선수라……. 제가 알기로 게이로 밝혀진 축구 선수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거 꽤 반향을 일으킬 일 아닙니까? 정말 언론에라도 퍼트려야 하나, 아니면 런던 FC의 고위 관계자들한테 넌지시 언급해 줘야 하나 고민이 되는군요. 선수들이 죄다 웃통을 벗고 있는 드레싱 룸에서 그 자식이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잖습니까. 안 그런가요? 하하하!”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호탕하게 웃는 데릭 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요한의 안색이 왜 나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친구를 잘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꽤 오래전에 경험한 일 때문이죠. 난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표정이었군.

조금 전 목격했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던 요한의 모습이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제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요한이 그토록 흔들릴 정도여서 혹 자신의 영향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요한의 반응은 저 때문이 아니라,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이 검은 머리 영국인 때문이라는 것이 짐작 가능했다.

아무렇지 않게 요한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며 쿡쿡 실소를 터트리고 있는 데릭 킴의 모습에 레온하르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아무리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어도 그렇지, 이성도 아닌 동성의 엉덩이를 탐내는 녀석이라니……. 으으, 정말 역겹지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요! 대체 왜 여자가 아닌 같은 남자를 탐내는 건지. 게이들은 진짜 이해할 수 없어.”

“…….”

“……아, 죄송합니다, 미스터 악셀. 저도 모르게 과한 발언을 했습니다. 하하하. 과거에 당한 일이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잠시 흥분을 한 모양입니다. 자,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

“미스터 악셀?”

레온하르트의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내뱉던 데릭 킴이 뒤늦게 레온하르트의 눈빛을 인지하고선 레스토랑 안쪽을 가리켰다. 여전히 복도에 선 채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기에 은밀한 곳에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인 듯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런 데릭 킴의 제안에 꿈쩍도 하지 않았고, 데릭 킴은 가만히 서서 무표정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

“식사는 됐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저를 부르려는 데릭 킴에게 빙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갑작스러운 레온하르트의 말에 데릭 킴이 ‘예?’ 하고 되묻자 레온하르트가 붉은 입꼬리를 위로 슥 올렸다.

“식사는 한 걸로 치죠.”

“그, 그게 무슨……. 아, 혹시 스테이크류가 거북하시다면 다른 곳을 알아…….”

“아뇨, 됐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단호한 답변에 데릭 킴의 눈이 더욱 큼지막해졌다.

“미, 미스터 악셀?”

“더는 미스터 킴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앞으로도 그쪽과 식사를 함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예?”

“미스터 킴과 함께 있다 보니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아서.”

비소를 머금은 레온하르트의 음성에 데릭 킴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하고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린 레온하르트가 데릭 킴을 이해시키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전, 미스터 킴이 그렇게 역겨워하는 동성애자라서요.”

* * *

쾅!

“악셀! 너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굉음을 내며 레온하르트의 대기실 문이 열렸다.

눈을 감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분장을 돕던 레온하르트의 담당 분장사 이자벨라 한나가 퀸 레베카 시어터 오너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들고 있던 붓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이자벨라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시끄럽군.

그는 무척이나 평온했다.

“미스터 킴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이봐, 악셀!”

“아, 악셀 씨.”

“벨, 아직 다 안 했잖아.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예?”

“뭐? 너 방금 뭐라 그랬어!”

레온하르트의 심드렁한 반응에 이자벨라뿐 아니라 스티브 위버 역시 발끈했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눈을 내리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공연 시작 시간까지 두 시간밖에 안 남았어. 얼른 끝내고 동선 체크 들어가야 해.”

“아, 악셀 씨…….”

“제정신이 아니군! 그냥 사고도 아니고 대형 사고를 쳐 놓고, 지금 오리발이라도 내밀려는 거야? 그런 거냐고!”

레온하르트는 대기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 대는 스티브 위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이자벨라에게 하던 일을 마저 이어 가라고 지시했다.

결국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행위를 견디지 못한 이자벨라가 겨우 집어 든 분장용 붓을 화장대 앞에 툭 내려놓고선 ‘저, 전 못 하겠어요!’라 외치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레온하르트는 달칵 닫히는 대기실의 문소리를 듣자마자 제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스티브를 응시하기 위해 내리깔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아, 한숨을 내쉰 스티브가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돼서 그래. 자네가 왜 미스터 킴과 틀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분명 파티 때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나? 대체 미스터 킴이 왜 내게 한국 진출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까지 한 건지 모르겠어. 변명이라도 좋으니 말해 봐. 그와 무슨 일이 있었나?”

스티브 위버는 노련한 수완가였다.

다른 곳도 아닌 웨스트엔드에서 세 손가락 안에, 아니 이제는 거의 톱으로 꼽히는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검증이 가능했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는 타고난 제작자였다. 어떤 공연을 올리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미리 예측하고, 올린 공연의 대부분을 성공시켰다.

그의 손을 거치면 실패는 없다, 라는 말이 퍼질 만큼 훌륭한 제작자인 그는 뮤지컬 의 내한 공연에 무척이나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미 뮤지컬 의 라이센스를 따 공연이 진행 중인 대한민국에서 웨스트엔드 버전의 를 선보이고 부수적인 협력을 생각하고 있던 스티브 위버로서는 한국 쪽 인맥에 엿을 먹인 레온하르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거고.

레온하르트는 쉬지 않고 침을 튀겨 대는 스티브 위버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악셀! 이러다 내 속이 터져 버리겠어! 그렇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뭐라고 했습니까.”

“뭐?”

“데릭 킴이, 제가 그쪽에 어떤 실수를 했답니까.”

“어? 그, 그게…….”

스티브는 화를 내는 자신보다 더욱더 음산한 기운을 풍겨 대는 레온하르트의 반응에 살짝 당황하는 듯했다.

레온하르트가 말없이 그런 스티브를 올려다보자 흠흠, 헛기침을 흘리며 숨을 고르던 스티브가 말을 이었다.

“아니, 네가 자기와의 점심 식사도 멋대로 파투 내고 예의 없이 굴었다잖아.”

틀린 말은 아니군.

“게다가 씻을 수 없는 치욕도 받았다는데……. 그 말은 대체 뭐야? 네가 게이라니? 데릭 킴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 사람, 한국 진출에 있어 꽤 중요한 사람이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의까지 줬는데 대체 어떤 반응을 보였길래 그 사람이…….”

달칵!

“아! 위버 씨, 여기 계셨습니까?”

“……하아, 젠슨! 자네는 대체 배우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지?”

레온하르트를 향해 말을 쏟아 내던 스티브 위버는 소식을 듣고 제 배우의 대기실로 찾아온 마커스 젠슨을 보자마자 몰아붙였다.

결국 마커스가 곧 있을 공연에 대해 언급하며 스티브를 달래고 달랜 후에야 퀸 레베카 시어터의 오너는 대기실을 벗어났다.

“젠장할…….”

폭풍우가 몰아치고 난 후의 대기실에서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던 마커스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거울 속에 비친 마커스의 눈빛에도 서늘한 얼굴을 유지하던 레온하르트는 스윽,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렸다.

“마키, 지금 당장 여기로 사람 한 명만 데려와줘.”

마커스 젠슨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생각이 있다면 일단 데릭 킴한테 사과부터…….”

“내가 그 버러지한테 사과할 일은 없어.”

“……뭐?”

당연히 데릭 킴을 불러 달라는 이야기일 줄 알았던 마커스가 되물었다.

레온하르트는 냉정하게 답한 뒤, 자신이 생각해 둔 사람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레온하르트의 말을 들은 마커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누구?”

102화

「정말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낮게 깔리는 한국어에 고개를 들자 준오의 검은 눈이 보였다. 그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어 낸 요한은 쓰게 웃었다.

쿵쿵, 거칠게 뜀박질하던 심장이 조금은 안정을 되찾은 상태라 어렵지 않게 머리를 아래위로 주억일 수 있었다.

「……네, 이제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두 분에게 너무 죄송해서…….」

「응? 두 분?」

「식사를 대접한다고 해 놓고 약속을 못 지키지 않았습니까.」

「아아.」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선배님. 다시 레스토랑으로…….」

「잠깐! 잠깐만. 기다려, 백요한.」

예의 레스토랑에서 도망쳐 나온 셈이 되고 말았다. 남겨 둔 동료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 워낙 경황이 없었던 터라 이제야 바스티안과 디에고가 떠오른 요한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두 사람에게 돌아가 봐야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요한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준오가 그를 막았다.

저를 저지하는 준오를 보고 놀란 요한이 푸른 눈동자를 크게 일렁이자 준오가 좌우로 고개를 내저었다.

「너희 팀 동료들이라면 걱정 마. 레스토랑 나오면서 내가 연락했어.」

「예?」

「번호, 땄거든.」

준오가 피식 웃으며 어리둥절해하는 요한에게 손안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요한의 입술 밖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준오는 흠흠,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신경 쓰인다면 내가 다시 가 볼게. 네 말대로, 대접하겠다고 한 건 우린데 그 두 사람만 그렇게 내버려 두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러니 너는 걱정 말고 푹 쉬어. 안색이 많이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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