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59)

“참, 그러고 보니 미스터 킴,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었지?”

“스물아홉입니다.”

“스물아홉? 이야, 나는 20대 초중반인 줄 알았어요. 어휴, 동양인들 나이는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하하하. 그런가요?”

“어어? 잠깐. 그러고 보니 미스터 킴, 악셀과 동갑이네? 두 사람, 나이도 같은 데다 관심사도 같으니 친하게 지내면 되겠어!”

“예?”

“그럼 되겠군요.”

“……!”

제게로 바통을 넘기는 듯한 스티브의 발언에 당황한 레온하르트와 달리,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데릭 킴은 자연스러웠다.

레온하르트는 ‘그럼 부탁할게. 나는 다른 손님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해서 말이야.’ 하고 속삭인 후 어디론가 가 버리는 스티브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날 어떻게든 이곳에 오게 만든 이유가 있었군.’

레온하르트는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려 휘휘 젓는 스티브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속으로 쓴 물을 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얼굴을 돌려 샴페인 잔을 쥐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우리가 몬스터 컴퍼니를 통해 한국 진출을 할 거니 말이야!]

한국…… 진출이라.

요즘 들어 얽히게 되는 동양인들은 놀랍게도 죄다 한국과 연관이 있었다. 불현듯 한 한국인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속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낀 레온하르트는 ‘미스터 악셀?’ 하고 저를 부르는 남자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제가 실례를 했군요. 손님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하.”

레온하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지으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새로운 투자자라.

화려한 웨스트엔드에서 숱하게 등장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족속들 중 하나가 바로 투자자들이었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돈을 투자하고 공연의 흥망에 따라 수입을 창출해 내거나 혹은 그 반대인 존재들.

이 남자는 어떤 의도로 우리에게, 그리고 스티브 위버에게 접촉했을까.

가끔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극장의 오너들에게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본능적으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던 레온하르트는 ‘왜 그러십니까?’ 하고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근처 웨이터에게 건네는 데릭 킴에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른 나이에 큰 회사를 이끌고 계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뮤지컬을 좋아해 주시는 능력 있는 분과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하. 미스터 악셀, 생각보다 아부를 잘하시는군요. 뭐, 틀린 발언은 아니지만 조금 정정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네?”

“뮤지컬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엔터 사업에 뛰어든 건 이제 겨우 2년밖에 안 돼서 말입니다.”

레온하르트는 너무도 솔직한 상대의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긋 웃던 데릭 킴이 말을 이었다.

“미스터 악셀, 혹시 한국에도 뮤지컬 라헤가 올라오고 있는 거 아십니까? 기존의 탄탄한 팬들이 있는 한국에 웨스트엔드의 라헤가 상연된다면 아마도 더욱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뮤지컬 라헤의 리뉴얼과 한국 진출을 도우려는 거고요.”

“아.”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키면 막대한 부는 물론이고, 제 능력 또한 인정받게 되겠죠. 하하하!”

설명을 마친 뒤 호탕하게 웃는 데릭 킴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런던의 별, 런던으로 돌아오다!>

자정을 훌쩍 넘기는 시각까지 이어진 애프터 파티가 끝난 후, 레온하르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귀가했다. 근래 매일같이 이어지던 집 주변 조깅까지 패스한 채 10시쯤 눈을 뜬 그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뉴스를 보다 익숙한 글귀를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거렸지만 결국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인 그의 시야로 누군가의 귀환 소식을 담은 내용이 들어왔다.

기사의 대략적 내용은 한 달간의 부재 끝에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온 요한 백이 오는 일요일에 열리는 런던 FC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선발로 출전할 건지, 아니면 후보로 대기할 건지에 대한 의견들이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후보로 나설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는 이야기로 끝이 난 기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흘렸다.

‘미쳤군.’

벌써 두 달.

그날 이후 벌써 두 달가량이 지나고 있거늘, 어찌 된 셈인지 제 행동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켜고 뉴스 면에 들어가 일반 카테고리도 아닌 스포츠 카테고리를 확인한다. 요한의 이름이 있다면 유심히 기사를 보고, 아니라면 금방 핸드폰을 내린다. 출근을 할 때도 마찬가지. 퀸 레베카 시어터 앞의 신문 가게 주인인 마사 씨는 레온하르트를 위한 신문을 따로 빼 둘 만큼 그를 배려해 주었다.

‘미련한 자식.’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 달, 그리고 두 달이 될 때까지 그를 잊지 못해 이렇게 질척거리다니.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미칠 지경이다. 그간의 연애들과 달리, 이번에는 이상할 정도로 그를 지워 내기 힘들어 숨이 막혀 온다.

레온하르트는 컥 차오른 호흡을 토해 내기 위해 살짝 입을 벌린 후 미간을 좁혔다.

‘아.’

레온하르트가 요한과 알게 된 후 연인으로 발전하기까지의 시간은 고작 삼사 개월 정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요한이 제 세상을 완벽하게 뒤흔들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

연애를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 온 레온하르트였지만, 이번만큼 전 연인을 잊지 못한 적은 없었다.

[잘…… 지내세요.]

어째서 이렇게 걸리는 걸까.

어찌하여 목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쉽게 잊을 수 없는 건지.

이별을 마주하면 일주일 정도는 앓을지언정, 금세 털어 내곤 했던 레온하르트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과거와 달리 벌써 두 달이 흘러갔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요한을 생각하며 그를 마음에서 지워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게 이별을 말하며 몸을 돌리던 요한의 목소리가 유달리 떨려서였을까, 아니면 시간을 갖자고 한 뒤 제 연락을 완벽히 차단해 버린 그가 매정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제 눈에 자신을 담던 요한을 와락 끌어안지 못해서였을까, 요한에게 모든 해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까.

그를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

자신을 응시하던 요한이 제발 저를 잡지 말아 달라고 너무나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워 냈다 여겼거늘,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머물러 사라질 생각을 않는 요한의 모습을 떠올리던 레온하르트는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빨리 받네?

레온하르트가 ‘그래.’라고 말하자마자 대답이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들고 있었어.’라고 짧게 답변했다.

-그랬구나.

“무슨 일이지?”

-아니, 별건 아니고…… 독일은 언제 들어와?

“왜?”

-막심이 조만간 파티를 열고 싶다고 해서. 식구들이 모두 모일 예정이라, 레온 너도 와 줬으면 좋겠는데. 막심도 그걸 원하고…….

전화를 걸어온 이는 엘레나였다. 레온하르트의 활약 덕분에 남편에게 더더욱 사랑받는 아내가 된 엘레나는 몇 달 뒤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가 언급한 파티는 그런 그녀를 위한, 그리고 새로 태어날 아기를 위한 파티가 되겠지.

레온하르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날짜가 언젠지 말해 주면 시간 내 볼게.”

-정말?

“그래.”

-…….

“……왜?”

-아니. 목소리에 통 힘이 없는 것 같아서. 저, 레온. 내가 한번…… 만나 보면 어떨까?

“뭐?”

-백 선수 말이야. 아무래도 그때 스위스에서 뭔가 오해를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직접 백 선수를 만나서…….

“엘렌, 쓸데없는 짓이야.”

-어?

“어차피 끝날 사이였으니 그렇게 된 거야. 네 탓이 아니야.”

냉정하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맞았다.

자신은 요한과 함께하는 그 시간 자체만으로도 행복했지만, 요한은 저와 많이 달랐던 건지도. 무엇이 그렇게 불안했을까. 레온하르트는 마지막으로 제게 고개를 숙이던 요한을 떠올리다 쓴 물을 삼켰다.

이별은, 예정되어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다. 대신, 그 시기의 차이였겠지.

레온하르트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엘레나에게 ‘날짜 정해지면 다시 연락 줘.’ 하고 짧게 말한 후 멀리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통화를 종료했다.

침실 밖으로 나가 보니 그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우스키퍼가 ‘손님이 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그녀를 따라 인터폰 쪽으로 향했던 레온하르트는 그곳에 서 있는 낯익은 이를 발견하고선 행동을 멈추었다. 이윽고 레온하르트는 ‘미스터 악셀, 계십니까?’ 하고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을 발견하고선 입술을 움직였다.

“미스터 킴?”

99화

하우스키퍼에게 자신이 나가겠다는 의사를 전한 레온하르트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빙긋 웃고 있는 데릭 킴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맞은편 남자를 향해 말했다.

“미스터 킴이 어떻게 여기……?”

“미스터 위버가 귀띔해 줬습니다.”

“스티브가요?”

집 주소를 알려 주지 않았건만 자신의 집을 찾아온 상대에게 의문을 표하자 오히려 제게 미소가 되돌아왔다.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스티브, 귀찮은 짓을…….

그러한 레온하르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부드러운 눈웃음을 그리던 상대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스터 악셀, 혹시 잊으셨습니까?”

“예?”

“어제 했던 얘기 말입니다.”

어젯밤 파티는 참석자도 많았고 신경 써야 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정신을 제대로 붙들고 있기가 힘들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기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태라 멈칫하던 레온하르트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끝에 자신이 무심코 뱉어 낸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식사 자리를 갖도록 하죠.]

……설마.

“생각나신 모양이군요.”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데릭 킴이 말했다. 레온하르트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예의상 건넨 말이었는데.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가?’

레온하르트가 대답하지 않자 미소 짓던 데릭 킴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자택까지 찾아오는 일이 실례라는 것은 압니다만, 저도 꽤 절실해서 말입니다. 미스터 악셀과 따로 상의하고픈 이야기가 있어 여기까지 발걸음하게 되었습니다.”

“아.”

“많은 시간을 뺏진 않겠습니다. 오늘 밤 공연이 있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간단한 점심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

“조금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공연 준비 전까지는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데릭 킴이 머리까지 숙여 가며 제게 부탁하자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매우 중요한 투자자니까, 이왕이면 책잡힐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특히 악셀과 키스트, 두 사람은 특별히 주의해 줘. 알겠지?]

애프터 파티 내내 여러 관계자들을 소개해 주었던 스티브가 데릭 킴의 대우에 대해 특히나 중요하게 언급한 것이 떠올라 말없이 한숨을 삼키던 레온하르트는 스윽, 머리를 들어 올리는 상대를 향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한턱이요?”

지난 연말, 바쁘게 돌아간 박싱데이가 끝나자마자 아시안컵이 열리는 카타르로 향했던 요한은 무려 한 달 만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리그 경기와 다르게 지난 한 달 동안 사흘에 한 번, 그리고 많게는 이틀에 한 번꼴로 경기를 치른 요한은 이번 일요일에 열리는 리그 경기에 후보로 출전할 예정이었다.

중후반을 향해 달리는 리그에서의 순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었지만, 지금 체력 관리를 해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전망이 더 어두워질 것이라는 코치진의 판단 때문이었다.

덕분에 다른 동료들보다 여유롭게 오전 트레이닝 세션을 치른 요한은 이른 퇴근을 위해 준비를 하다 들려오는 디에고 가르시아의 발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에고는 놀라는 요한을 내려다보더니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 밥 한 끼도 안 살 생각이었어?”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이적 시장 때 네 국대 동료도 PL로 이적했지? 그 친구도 시간 나면 같이 식사나 하자고 불러 봐.”

“……네?”

“뭘 그렇게 봐? 얼른 전화 안 해?”

거의 강제에 가까운 디에고의 말을 들으며 요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디에고가 흠흠, 헛기침을 흘리더니 중얼거렸다.

“타 대륙인들과도 알고 지내면 좋으니까. 딱히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니 빨리 연락해 봐. 나 배고파.”

툴툴거리던 디에고가 제 말만 쏘아 댄 후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며 몇 번 흔들더니 드레싱 룸을 나가 버리자 요한은 멀뚱멀뚱 눈을 깜빡였다.

쯧, 하고 그런 디에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붙임성이 있다 생각하면 오산이야.”

바스티안은 대체 디에고가 왜 저러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요한에게 작게 속삭였다.

“다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는 거라고.”

“꿍꿍이?”

바스티안이 피식 웃더니 요한에게 다가와 설명해 주었다.

“가르시아 저 녀석, 와이프가 요즘 K-POP에 빠졌나 봐.”

“K-POP……이요?”

“흠, 요한 너는 한국인이라면서 그쪽엔 영 관심이 없나 보군.”

“아…….”

“어쨌든 K-POP 스타들한테 빠진 와이프가 근래 들어 한국 여행을 가고 싶다고 졸라 대는 모양인데, 너한테 묻고 싶어도 너 역시 줄곧 영국에서 지냈으니 한국에 대해 잘 모르잖아.”

“그건…….”

“그래서 그러는 거야. 이왕이면 현지인한테 꼭 가 봐야 할 관광지 정보도 얻고. 얼마 전에 PL 입성한 한국인이면 이준오라는 그 친구일 텐데…… 너희 국대 주장이잖아. 그러니 더욱더 연줄을 만들고 싶은 거겠지. 새로운 인맥을 쌓는 건 둘째 치고라도.”

요한은 ‘하여간 은근히 계산적이군.’이라 중얼거리는 바스티안을 보며 낮게 탄성을 흘렸다.

“뭐, 그 친구도 가르시아 녀석이랑 알게 되면 나쁠 건 없을 테니 초대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러니 시간만 맞으면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해 봐. 아, 잠깐만.”

혼잣말처럼 내뱉은 바스티안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한 요한이 고개를 주억이고 있을 때였다.

지이잉.

다른 동료들은 훈련 직후 샤워장으로 갔기 때문에 드레싱 룸에 남은 사람은 요한과 바스티안뿐이었다.

바스티안은 요한과 대화를 나누다 말고 핸드폰을 집어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이안이군. 이 시간에 웬일이지?”

……!

요한이 낯익은 이름에 움찔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심코 중얼거리던 바스티안 역시 뒤늦게 요한의 반응을 알아차렸는지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드레싱 룸을 나서는 바스티안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던 요한은 그가 자신을 위해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군.]

진동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바스티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내려앉는 모습이 선명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너무도 태연하게 이안 키스트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눈꼬리가 휘어지는 모습은 놀랍게도 보기 좋았다.

이안 키스트와 바스티안의 사이를 우연히 알게 되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단 한 번도…….’

콕콕.

가슴이 쓰려 온다.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못했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그’와 만나는 내내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의 애칭은 더더욱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명색이 연인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매번 ‘악셀 씨’라 불렀던 몇 달 전의 일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쓴 물이 차올랐다.

정말 빵점짜리 연인이었군.

요한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예? 요한이 식사를 대접하는 거라고요?”

요한이 일행과 함께 도착한 곳은 런던 첼시 지역의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동료들 중에서도 요한의 빈자리를 훌륭히 메웠다고 주장하는 디에고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할 겸 웃으며 점심을 사게 된 요한은, 얼마 전 런던 FC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다툰 레드 가든으로 이적한 준오와 함께 앉아 있었다.

어차피 한 번쯤은 리그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는 두 남자들과 A팀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준오를 만나게 해 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막 팀에 적응 중이던 준오가 요한의 연락을 받자마자 기꺼이 요청에 응해 이러한 자리가 성사되었다.

첼시 지역의 레스토랑 중에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달려온 준오는 요한이 오늘 점심을 살 거라는 말을 하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디에고는 그런 준오의 맞은편에서 태연하다 못해 뻔뻔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꼬맹이가 한턱 내는 건 당연하죠.”

“……예?”

“꼬맹이 빈자리를 메우느라 무려 한 달 동안 일곱 골을 넣었단 말입니다. 물론 내가 워낙 잘나서 그런 활약을 보인 거지만, 그래도 아주 힘들었다고요. 레드 가든이 얼마나 쫓아오는지.”

“하하하. 우리 팀 얘기군요.”

“그래요, 리 씨의 팀 말입니다. 어쨌든 1위 자리 유지하느라 힘들어 죽을 뻔했습니다. 여기 있는 랄프 녀석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골을 넣었고요. 골잡이도 아닌 우리가 팀 순위 유지를 위해 이렇게 애썼는데, 앞으로 리그 우승컵을 들려 노력한 팀 동료한테 간판 골잡이가 한턱 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어이! 안 그러냐, 랄프?”

“어련하시겠어.”

농담인지, 아니면 진담인지 의심할 만한 디에고의 말에 요한과 준오가 풉 웃는 사이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뭐?’ 하고 두 눈을 치켜뜨는 디에고를 보며 갑자기 준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제가 요한이랑 이 식사비를 분담하도록 하죠.”

“왜요?”

못마땅하다는 듯 바스티안에게 레이저를 쏘아 대던 디에고가 의아한 표정으로 준오를 응시했다.

‘레드 가든 선수가 사 주는 음식은 좀 그런데.’를 중얼거리는 디에고를 향해 준오가 옅은 미소를 흘렸다.

“경쟁 팀 선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요한이를 차출해 갔던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주장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아.”

“요한이가 없었다면 아시안컵에서 우승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우리 국대에는 아주 중요한 우승컵이었거든요.”

“…….”

“안 그래도 런던 FC한테 무척이나 고마웠는데, 가르시아 씨의 말마따나 요한이의 빈자리를 채워 주시느라 고생하신 두 분께 보답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 오히려 기쁘네요.”

“……흐응.”

“왜 그리 보십니까?”

“아니, 우리 대표 팀 주장도 리 씨처럼 팀 동료를 위하는 녀석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랬다면 월드컵 우승은 밥 먹듯 하지 않았을까……. 쳇. 왜 이런 사람은 매번 다른 팀에 있는 거야?”

“하하하, 멕시코 팀 말이죠?”

“어? 내 국적도 알고 있습니까?”

“가르시아 씨, 본인이 굉장히 유명한 선수라는 거 잊으셨습니까?”

“……하긴 뭐, 내 명성이 아시아 지역에서도 상당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하하.”

“디에고라 부르십쇼.”

“예?”

“그쪽, 마음에 들어서요.”

“풉. 가르…… 아니, 디에고 씨. 엄청 직설적이시네요. 저도 편하게 준오라고 불러 주세요. 아니면 준도 괜찮습니다.”

“오케이, 준! 앞으로 친하게 지냅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던 두 남자가 식사 도중 갑자기 손까지 맞잡으며 눈을 빛내자 요한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요한의 맞은편에서 디에고와 준오의 말을 듣고 있던 바스티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한테는 절대로 이름을 허락하지 않더니.’를 중얼거리는 바스티안의 표정에 약간의 섭섭함과 짓궂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한 요한은, 확실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와 아닐 때의 디에고의 모습이 확연하게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쿡쿡거렸다.

“그런데 준은 생각 이상으로 꼬맹이랑 친한 것 같습니다?”

100화

어느 날 갑자기 회동한 서프라이즈 미팅이었지만, 그럼에도 테이블의 분위기는 몇 년이나 알고 지내 온 사람들처럼 화기애애했다.

바스티안이 살짝 언질해 줬던 것처럼 디에고는 결국 자신이 목적으로 한 K-POP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다음번 한국 방문 때 준오의 도움을 받는 데 성공했다.

웃으며 와이프에게 자랑해야겠다고 중얼거리던 디에고는 요한에게 자신이 썬 스테이크를 덜어 주고 있는 준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말을 던졌다.

“네?”

준오는 그런 디에고의 말에 움찔거리며 디에고와 요한을 번갈아 쳐다봤다.

디에고는 제가 꺼낸 발언에 몹시 당황하는 준오를 힐끔거리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아니, 무슨 여자랑 데이트하는 남자처럼 그걸 썰어 주고 있으니까.”

“……!”

“꼬맹이 녀석이 손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하. 준은 꼬맹이가 그렇게 좋습니까?”

디에고는 생각을 그대로 뱉어 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로 인해 많은 다툼이 일기도 하지만, 악의는 없는 편이었다.

요한은 디에고의 말을 듣다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디에고의 발언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대표 팀에서 함께 숙식을 하며 가장 가까이 있었던 준오가 자신을 챙겨 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요한은 제 플레이트 위로 스테이크 조각을 옮기고 있던 준오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준오의 목덜미는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은 상태.

‘왜 저러시지?’

디에고가 쏟아 낸 말이 노골적인 발언이기는 했으나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건만, 준오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다. 그러자 오히려 놀란 사람은 디에고였다.

“아! 시, 시비 거는 건 아닙니다! 그저 꼬맹이 녀석이 부러워서요. 하하하!”

“아…….”

준오의 반응이 심상찮다는 것을 알아차린 디에고가 황급히 손을 휘휘 저었다. 그제야 준오의 경직된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맴돌았다.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바스티안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트릴 겸 ‘왜, 너도 잘라 주길 원해?’라고 툭 뱉어 내자 디에고가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됐어. 네 건 안 먹는다.”

“어차피 줄 생각도 없었어.”

“뭐? 하여간, 이 자식은 말이라도!”

“이준오 선배님은…….”

흥, 코웃음을 치며 디에고에게 주려던 스테이크 조각을 제 입 속으로 쏙 밀어넣어 버리는 바스티안의 행동에 디에고가 발끈할 때였다. 차분하게 숨을 고른 요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요한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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