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59)

“디어 씨, 정말 감사합니다. 많은 에이전트들을 만났지만 디어 씨만큼 든든한 에이전트는 처음입니다. 아무래도 전 디어 씨를 소개해 준 요한이한테 평생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호호호. 우리 요한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죠. 저 역시 요한이의 안목을 믿고 준오 씨를 소개받아서 너무 기뻐요.”

“요한아, 뭐 해? 디어 씨가……. 요한아?”

“…….”

“백요한.”

“……!”

“너 괜찮아?”

어떻게 식사가 끝났는지, 또 어떻게 자신이 차에 올라타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 갑자기 이마에 손을 얹는 느낌에 깜짝 놀라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준오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은 옆자리에 앉은 준오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선 괜찮다며 어렵게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래요? 우리 요한, 어디 아픈 거예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앨리슨이 룸미러를 힐긋거리며 뒷좌석의 요한을 살폈다.

요한이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벌렸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집까지는 멀었나요?’ 하는 준오의 대답에 묻혀 버렸다.

“준오 씨,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늦게라도 괜찮으니 저한테 연락 주세요.”

“네, 걱정 마십시오. 제가 함께 있을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요한의 집 앞까지 바래다준 앨리슨이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요한을 바라보며 말하자 준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답했다. 돌아서서 운전석에 다시 오르는 마지막까지 요한을 힐끔거리던 앨리슨이 사라지자 준오는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집 앞 거리에 서 있는 요한에게 다가왔다.

「요한아, 많이 아파?」

「선배님…….」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건가. 많이 아프면 얼른 들어가서 쉬자. 그러고 보니 내가 왔을 때부터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괜히 밥 사 준다고 졸랐나 보다.」

「……아닙니다. 괜찮……!」

오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 탓에 후반 조커로 뛸 계획도 무산되었고, 핏기 하나 없이 앉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감기 기운이 있어서라기보다, 근래 마음의 짐을 너무 많이 짊어지고 있는 탓이었다.

요한은 미리 그의 컨디션을 파악하지 못했다며 자책하고 있는 준오에게 답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낯익은 인영을 발견했다.

「요한아?」

「……선배님.」

앨리슨과 함께 있을 때 외에는 준오에게 한국어로 말하던 요한은 ‘어?’ 하고 자신의 부름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준오를 향해 주머니를 뒤적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무…….」

「집 열쇠입니다. 먼저 들어가서 기다려 주세요.」

「어?」

당황한 준오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인 요한이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저를 찾아온 분이 계셔서요.」

* * *

레온하르트 악셀은 요한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장 그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둘러 도착한 집에 불이 꺼져 있자 내내 집 앞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어 시간쯤 기다리다 보니 요한이 누군가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요한이 친구십니까?]

요한을 부축하며 함께 걸어오던 이준오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며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시선은 오로지 요한에게만 꽂혀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답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이준오가 결국 먼저 요한의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요한은 그제야 레온하르트에게 말했다.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휘이잉.

쓰라린 겨울바람이 살갗을 스친다.

코트를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온몸이 오돌오돌 떨릴 정도였다.

레온하르트와 요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요한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원이었다.

사람 하나 없이 가로등만 불을 밝히고 있는 으슥한 공원의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잘…… 지냈나?”

결국 먼저 침묵을 깨트린 사람은 레온하르트였다.

그는 자신과 요한 사이에 감도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천천히 제게로 고개를 돌리는 요한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요한의 얼굴은 여전히 하려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눈가에는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울컥 감정이 차오려는 것을 꾹꾹 짓눌렀다.

‘이런 표정을 짓진 않았는데.’

한때 저를 부담스러워한 적도 있고, 경계를 한 적도 있지만 이 정도로 어두워 보이는 표정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화가 나서 요한을 찾아오긴 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 녹듯 마음이 풀어져 괜히 안쓰럽기만 했다.

[레온, 네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말이지, 아직까지도 백 선수와 이번 일에 대해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점이야.]

이안 키스트의 말이 맞다.

이준오라는 남자가 얽혀 있든 말든 중요한 건 두 사람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애써 질투를 할 이유는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근심이 가득한 요한의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보드랍게 어루만지며 입 안에 맴돌던 말을 내뱉으려 했다.

“저기, 요한. 사실 그쪽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악셀 씨.”

그런 레온하르트의 손이 벤치를 꽉 붙잡고 있는 요한의 손등 위에 닿기 직전, 요한이 흔들림 없는 눈을 레온하르트에게 고정시키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동시에 말을 꺼낸 요한을 보고 움찔하던 레온하르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만큼이나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네.”

“그럼 내가 먼저 해도…….”

“아뇨. 제 말부터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안의 조언처럼, 지금이라도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 보려던 레온하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요한을 응시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평소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언제나 레온하르트의 말을 먼저 들어주던 요한이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자 레온하르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경련이 이는 입꼬리를 움직이며 요한에게 수락의 신호를 보냈다.

요한은 말없이 레온하르트를 직시하다 말라 버린 입술을 움직였다.

“그동안…… 악셀 씨와 함께 지내면서 많이 즐거웠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기쁜 적도 많았고, 그 누구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따뜻함도……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

“저는 악셀 씨를 만나서 조금씩, 아니 조금 많이 변했습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요. 악셀 씨 덕분에 친구도 생겼고, 연애라는 것도 해 보았습니다. 여러 감정을 깨달았고,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몹시 즐거운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어요.”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토해 내듯 숨을 뱉어 내는 요한의 모습이 왠지 힘겨워 보여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벙어리가 된 사이, 요한은 흐리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악셀 씨, 그런 악셀 씨와 함께하는 시간이 마냥 즐겁지 않다는 건 저를 힘들게 합니다.”

“……!”

“당신에 대해 좋은 기억들만 가득 채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저를 발견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요……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레온하르트는 말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요한의 말이 벼락 치듯 그에게 내려앉았으니까.

“우리……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97화

#Second Half : 후반 31′ ~ 후반 40′

2월.

길었던 겨울이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빨리 매진되는 공연 중 하나인 뮤지컬 의 주연을 맡고 있는 이안 키스트는 근래 들어 습관적으로 구매하게 된 신문을 든 채 자신의 대기실로 들어왔다.

앞으로 두 시간 후에 시작될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대기하던 이안은 메이크업을 도와줄 분장사를 기다리다 접어 두었던 신문을 펼쳤다.

“어?”

무심코 고개를 아래로 내린 이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것은 예의 신문 1면에 낯익은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의 별, 50년 만에 대한민국의 왕좌 탈환을 돕다!>

이틀 전, 아시아 대륙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대해서는 런던 FC의 팬이라면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1월부터 2월 초까지 한 달 동안 런던 FC의 주전 공격수인 요한 백이 대표 팀에 차출된 탓에 강제적으로 리그 경기를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50여 년 전 우승한 이후 여태까지 한 번도 아시안컵 트로피를 차지하지 못한 대한민국 팀을 위해 한창 시즌이 진행되는 와중에 요한 백을 아시아 대륙까지 보낼 수밖에 없었던 런던 FC의 팬들은 하루라도 빨리 대한민국이 탈락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필 백이 나간 이후부터 득점력이 저조해졌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런던 팬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새로운 폭격기를 단 대한민국 대표 팀은 조별 예선을 전승으로 돌파한 것으로도 모자라 결승전까지 무난하게 진출했고, 바로 이틀 전 대망의 아시안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런던의 팬들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요한 백은 아시안컵에서 총 11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고, 이렇게 타 대륙의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스포츠 신문 1면에까지 실리는 영광을 낳았다.

국가를 위해 우승컵을 들고 금의환향하게 된 런던의 별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프리미어리그 경기와 리그컵 경기,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경기의 우승컵까지 들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기사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던 이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두 사람이 설마 그렇게 될 줄이야…….”

지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요한 백의 얼굴과 달리, 이안의 안색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백 선수랑 헤어지다니?]

그는 요한 백이 아시안컵에 차출되어 영국을 떠나기 전, 아니 그 이후로도 한동안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을 불과 몇 주 전에 알게 되었다.

갓 신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나.

분명 레온하르트의 성격상 신년 이벤트다 뭐다 해서 소란을 피워 댈 것이 틀림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고요해서 의아해졌다.

결국 솟아오르는 의구심을 지워 내지 못하고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더니 놀랍게도 레온하르트가 요한과의 이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제 귀를 의심하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이안에게 레온하르트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게 됐어.]

[레온?]

[안 맞았던 모양이지.]

[……!]

[늦겠군. 어서 나가지.]

공연 시작 전, 너무도 태연하게 뱉어 낸 그 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파리하게 질린 자신과 다르게 빙긋 웃기까지 한 레온하르트는 굳어 있는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먼저 백스테이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지.’

이안 키스트가 파트너인 레온하르트 악셀을 알게 된 건, 레온하르트가 막 조연에서 주연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뮤지컬 의 두 주인공으로 만나 안면을 익히고, 파트너로 지난 3년 동안 동고동락하다 보니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만큼 친해졌다.

그 덕분에 레온하르트의 연애사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던 이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조금, 아니 무척 충격을 받았다.

레온하르트가 이별을 대하는 데 있어 이토록 담담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레온하르트가 상대에게 차이면 농담을 건네곤 했던 이안이지만 이번만큼은 우스갯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수상쩍어 보이는 레온하르트를 간과할 수 없었던 이안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던 그날 이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레온하르트와 술잔을 기울이며 넌지시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잡을 수 있겠어. 그런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데…….]

술에 취해 깊은숨을 내쉬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자신이 알고 지내던 웨스트엔드의 왕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요한? 글쎄요.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왜 그러는 겁니까? 요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답니까?]

그 후 더 이상 요한 백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티를 팍팍 풍기는 레온하르트였기에 어쩌다 일이 그렇게까지 됐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신과 악연에 가까운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바스티안 랄프에게 넌지시 요한 백에 대한 안부를 물었더니, 바스티안 랄프가 자안을 일렁이며 오히려 되묻는 것이 아닌가.

“하여간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거, 설마 날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헉!”

툭!

바스티안 랄프의 뻔뻔한 얼굴을 떠올리며 투덜거리던 이안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만 들고 있던 신문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하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던지라, 제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을 때는 이미 상대의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진 신문을 바라본 뒤였다.

‘망할!’

하필이면 1면에 실린 사진이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든 채 환하게 웃는 요한 백의 모습이었고, 그 옆에는 한때 레온하르트가 몹시 거슬려 했던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주장인 이준오도 함께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낀 이안은 미동 없는 녹안으로 예의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힐끔거리다 얼른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하여간 ‘The Moon’도 이상하지. 별 관심도 없는 대회를 왜 헤드라인으로 하는 건지 모르겠어.”

“…….”

“저, 저기…… 레온…….”

“우승, 했나 보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신문을 툭툭 접은 이안은 근처 테이블로 예의 신문을 던지며 투덜거렸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쿵쿵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렇게 레온하르트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작게 중얼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제정신일 때는 요한 백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던 레온하르트였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린 레온하르트는 이내 사색이 된 이안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더니 피식 웃으며 닫아 두었던 입술을 움직였다.

“이안, 애써 숨기지 않아도 돼.”

“……으응?”

“이미 지난 일이니까, 괜찮아.”

“아, 나는…….”

“그것보다 오늘 밤 애프터 파티가 있는 건 기억하나?”

“어?”

“스티브가 그랬지. 다음 시즌, 리뉴얼이 있을 거라고. 그때를 대비해서 투자자들과 만날 예정이니 반드시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기, 기억하지.”

“다행이군.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거다.”

“아…….”

“그럼 조금 이따 보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이안을 향해 살짝 미소 지은 레온하르트는 이내 몸을 돌려 그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하아아.”

대기실의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보던 이안은 달칵 소리가 들리자마자 스르륵 주저앉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돌아 버리겠군, 정말.”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은 척하는 친구가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 * *

“그쪽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설마 그 말, 헤어……지자는 건 아니지?”

레온하르트 악셀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들은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저를 바라보는 요한의 눈빛이 두 번째 이유였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 와 스르륵 올리던 입꼬리 주변이 파르르 떨렸다.

미간을 좁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웃지도 못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제게 고정되어 있던 얼굴을 아래로 떨구기만 할 뿐.

그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악셀 씨.”

제게 말을 한 뒤에도 소리를 내뱉지 않던 요한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땐, 그의 눈동자가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한 뒤였다. 그런 요한의 눈빛이 지독할 만큼 고요해서 무서워졌다.

뭐라 대응하지 못하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요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시간을 갖자던 그 말이 이별의 말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는 그 말이 으레 하는 말이 아닌,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져 레온하르트는 돌아서는 요한을 붙잡지도 못했다. 단호해 보이다 못해 아파 보였으므로 숨이 막혀 오기만 했다.

그가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던 레온하르트는 결국 준비해 온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엘레나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도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게 되어 버린 그들이었기에 더더욱.

폭풍처럼 다가온 사랑은 눈 깜짝할 만큼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그리고 시간은 놀랍게도 빠르게 흘렀다.

‘벌써 한 달인가.’

한 달.

아니, 정확히 따지면 한 달하고도 며칠 더.

레온하르트의 옆자리가 비게 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나 있었다.

“어, 악셀! 거기 있었나!”

뮤지컬 의 리뉴얼을 앞두고, 여러 투자자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공연 스태프들을 초청하여 열리는 애프터 파티.

마티네 공연이 끝나자마자 퀸 레베카 시어터의 연회장에서 시작된 이번 파티에 참석한 레온하르트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검은 턱시도에 붉은색 보타이를 착용한 채 제게 다가오고 있는 오너, 스티브 위버가 보였다.

상념에서 강제적으로 벗어난 레온하르트는 후우, 숨을 내쉬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스티브를 반겼다.

“스티브.”

얼굴을 아래위로 주억이며 살짝 인사를 하자 스티브가 씩 웃더니 샴페인 잔 하나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드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뺐을 녀석이, 웬일로 고분고분 참석을 했군?”

“하하, 스티브.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제가 언제 내뺐다고.”

“웬만한 파티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항상 피했잖아. 뭐 어쨌든, 참석해 줘서 고마워. 키스트는?”

“이안도 곧 올라올 겁니다.”

“하하, 그거 잘됐네. 두 주연이 도망치지 않고 얼굴을 보이면, 투자 유치가 더 쉬워지겠어.”

레온하르트는 ‘미꾸라지처럼 도망 안 쳐 줘서 고마워.’라고 속삭이는 스티브에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배우들의 참석이 이번 투자 유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겁니까?”

“응?”

“물론 다음 시즌에 누가 캐스트로 참여하느냐에 따라 티켓 셀링이 달라지긴 할 테지만, 어차피 리뉴얼인 이상 배우들이 반드시 참석해야 할 만큼 막대한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 같은데.”

이번 파티에 무조건 참석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듣기는 했지만,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던 레온하르트는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는 스티브 위버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스티브가 저 역시 동의한다는 듯 쓴웃음을 흘리더니 레온하르트에게 답변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 문제 때문에 난처하기는 한데…….”

“그런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온하르트에게 스티브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 새로 투자자가 될 사람 중 한 명이 반드시 공연을 이끌어 나가는 두 주연들을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예?”

“그 사람이 젊은 한국계 영국인인데, 예전에 라헤를 재밌게 봤나 봐. 그래서 자네와 키스트를 소개해 달라고……. 어, 마침 저기 오는군. 여기입니다, 미스터 킴!”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스티브가 레온하르트의 뒤편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미스터 킴?

스티브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 레온하르트의 눈에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키 큰 동양인이 서 있었다.

98화

“미스터 위버.”

퍼플 슈트에 회색 보타이를 매고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남자의 발걸음은 힘찼다. 레온하르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저와 스티브 앞에 멈추어 선 남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미스터 킴’이라 불린 뮤지컬 의 새로운 투자자는 활짝 웃고 있는 스티브 위버와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하더니 이내 입을 다문 레온하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하, 이거 참. 내 정신 좀 봐. 인사하시죠, 미스터 킴. 여긴…….”

큰 키의 두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스티브 위버가 머쓱한 웃음을 흘리더니 레온하르트와 미스터 킴을 번갈아 응시하며 말하려 했다.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 악셀,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스티브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그의 말을 끊어 낸 미스터 킴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레온하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온하르트는 검은 두 눈을 제게 고정시킨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미스터 악셀. 미스터 악셀이 나온 뮤지컬은 모두 흥미롭게 봤어요. 저는 데릭 킴입니다. 편하게 데릭이라 불러 주시면 좋겠군요.”

단순한 자리도 아닌, 투자자와 만나는 중요한 자리. 웨스트엔드에서 일하는 동안 가급적 이런 일들은 모두 자신의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에게 맡기거나, 혹은 정중하게 거절하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스티브가 너무나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스티브 위버가 라헤의 해외 순방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러니 귀찮아도 어쩔 수 없지 않겠어? 협조하는 수밖에.]

더군다나 애프터 파티의 소식을 접했을 때, 자신의 에이전트인 마커스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었기에 더더욱 정중히 대할 수밖에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제게 내민 데릭 킴의 손을 직시하더니 입가에 미소를 달며 상대의 손을 맞잡았다.

“……악셀입니다.”

꽈악.

‘……?’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제 손을 움켜쥔 상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의아함을 느끼며 데릭 킴을 쳐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떼어 낸 상대가 하하 웃음을 흘리고 있는 스티브 위버를 바라봤다.

스티브는 두 사람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을 확인한 직후 두꺼운 입술을 움직였다.

“악셀, 미스터 킴은 아주 전도유망한 경영인이야. 그것도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 다음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한국 뮤지컬계를 이끄는 혜성 같은 존재지. 한국에서도 꽤 이름을 높인 몬스터 컴퍼니 ENT의 이사직을 맡고 있는데, 혹시 들어 봤나?”

“예?”

“아직 못 들어 봤어도 앞으론 자주 들을 테지! 우리가 몬스터 컴퍼니를 통해 한국 진출을 할 거니 말이야!”

“아…….”

스티브 위버는 잔뜩 꿈에 부풀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스티브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쿡쿡 웃으며 말을 맺은 스티브는 홱 고개를 돌려 빙그레 눈웃음을 그리고 있는 데릭 킴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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