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잘못은 남은 한 가지 잘못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그러고 보니 이안이 언급한 레온하르트의 잘못은 총 네 가지였다.
레온하르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안 키스트가 정말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레온하르트를 쳐다보더니 그의 마지막 잘못에 대해 말해 주었다.
“레온, 네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말이지, 아직까지도 백 선수와 이번 일에 대해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점이야.”
* * *
시도를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요한이 자신을 두고 먼저 런던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악셀 씨. 이왕 휴가를 얻으셨으니 방해받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얻기 힘든 휴가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온 요한의 음성은 어쩐지 냉랭하고 차분했다. 그에 괜히 덩달아 기분이 나빠진 레온하르트는 알겠다고 퉁명스레 대답한 뒤 통화를 종료했고, 그 뒤로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보니 요한은 요한대로, 레온하르트는 레온하르트대로 서운함이 차곡차곡 쌓여 버린 것이다.
결국 이 불유쾌한 상황을 참기 힘들었던 레온하르트는 자신과 달리 공연을 이어 가고 있는 이안의 대기실까지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넌 나한테 평생 고마워해야 할 거다. 자, 받아.”
이안뿐 아니라 마침 이안을 찾아왔던 안나마리아로부터 일침을 받았던 레온하르트는 피할 수 없는 제 잘못을 맞닥뜨렸다. 하나같이 일리 있는 말들이라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향해 이안 키스트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이안으로부터 그것을 받아 든 레온하르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레온하르트의 어깨 너머로 그것을 응시하던 안나마리아가 외쳤다.
“어머, 키스트 씨! 그거 내일 있을 리그컵 8강전 티켓 아니에요? 어디서 나셨어요? 그 표, 구하기 엄청 어렵다고 하던데.”
“응? 아, 하하. 그, 그게 말이죠. 흠흠. 어쨌든 레온! 잘됐지? 티켓도 준비되어 있으니, 이만하면 백 선수를 만날 기회 충분하잖아. 어떻게 할래? 갈 거냐?”
눈을 가늘게 뜨며 ‘안 가면 멍청한 거지.’라 중얼거리는 이안의 음성과 ‘가셔야죠! 그래서 요한이 마음도 달래 주셔야죠!’를 외치는 안나마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온하르트는 후우, 숨을 들이켰다.
“오늘 이스트 UTD가 몇 골이나 먹힐까?”
“이스트를 얕보는 거야? 아무리 런던이라도 쉽지 않을걸?”
“런던 기세가 만만찮은데?”
“잠깐만요! 밀지 마요!”
“좀 지나갈게요!”
오후 3시부터 시작될 프리미어리그 1부 팀인 런던 FC와 2부 팀인 이스트 UTD의 경기를 앞두고 수만 명의 관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든 이곳은 런던 FC의 홈구장 미라클 스타디움.
통칭 MS라고도 불리는 경기장에는 많은 관중들이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상태였다.
“이 티켓…… 본인 것 맞습니까?”
그리고 그런 관중들 틈에 끼어 MS를 찾은 레온하르트 악셀은 티켓을 내밀자마자 저를 빤히 응시하는 보안 요원의 질문에 움찔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나보고 변장을…… 하라고?]
[그래. 혹시 모르니까. 이 티켓은 나한테 온 초대권이거든.]
[…….]
[이왕이면 빨간 가발을 쓰는 게 좋겠다. 그래, 선글라스도! 모자랑 마스크도 있지? 다 챙겨 가서 절대 파파라치들한테 들키지 마. 너도 백 선수랑 만나는 걸 들키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안 그래?]
티켓을 건네주며 반드시 유의할 것이 있다고 하던 이안은 몇 번이고 레온하르트에게 주의를 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빨간 가발은 꼭 챙겨 가라던 이안의 당부를 잊지 않고 검은 모자 아래 이안 키스트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가발을 썼던 레온하르트는 제 정체를 의심하는 보안 요원의 따가운 눈빛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파파라치들을 주의해야 한다지만, 내가 여기 올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곳에 들를 이유는 이안보다 많았다. 이안이 어떻게 8강전 티켓을 구한 건지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런던 FC의 메인 모델인 자신이 초대를 받았다는 이유를 드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물론 보디가드도 대동하지 않은 채 다른 관객들처럼 줄을 서서 홀로 경기장을 찾았다는 것은 충분히 기사화될 만했지만, 보안 요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으려 했다.
“실은…….”
“아! 이 자리!”
……응?
“제가 잠깐 잊었습니다. 들어오시죠.”
“예?”
“참! 자리까지 안내해 드려야겠군요. 로이, 내 자리 좀 부탁해.”
레온하르트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들어오라고 말한 뒤 근처의 보안 요원에게 자신의 자리를 부탁하는 보안 요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실례 많았습니다. 미리 말씀을 들었는데 말이죠.’라고 작게 속삭이는 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은 곧 귀빈석 전용 구역에 도착했다.
[백 선수는 내일 경기에 출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하프타임엔 시간이 날지도 몰라. 경기 내용이 좋지 않으면 끝난 뒤가 될 수도 있고. 그건 내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 볼 테니, 넌 백 선수 만나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 알았어?]
레온하르트 악셀이 그간 숱한 연애에 실패한 이유를 알겠다며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얹어 툭툭 두드리던 이안은 레온하르트에게 몇 번이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만나 주기만 한다면…….’
요 며칠간, 요한이 저를 피한다고 느꼈기에 걱정이 앞섰다.
레온하르트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경기장의 파란 잔디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빈석 전용 구역 역시 초대받은 관객들로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평범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드디어 밝혀진 오늘의 라인업에 대해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요한이 독일어를 배운다고요?”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하고 투덜거리던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은 레온하르트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을 거론하고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독일어를 배우는 거지? 아, 설마…… 분데스로 진출하려는 건가요?”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생각되는 목소리였기에 레온하르트는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곧 그 목소리가 요한이 전화를 받을 때마다 들려오던, 그리고 요한이 대한민국 대표 팀으로 차출될 때마다 그의 옆을 차지하며 인터뷰를 함께 하던 남자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인지해 냈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한 번 들은 목소리는 쉽게 잊지 않는 편이기에 더더욱 의심하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어?’
그런 레온하르트의 시야로 먼저 들어온 사람은 요한 백의 에이전트이자 안나마리아 디어의 고모라고 알려진 앨리슨 디어였다. 그녀는 안나마리아와 매우 흡사한 외모였기에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의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아 또렷한 영어를 내뱉고 있는 흑발의 동양인을 쳐다본 순간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오!’
95화
“이준오…… 선배님이요? 악셀 씨가 준오 선배님을 어떻게 아십니까?”
언젠가 은근슬쩍 ‘그 남자’에 대해 요한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제게 되묻는 요한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젠장. 그렇게 저를 바라보는 모습마저 어찌나 귀여운지.
순간적으로 ‘왜 몰라! 얼마 전 국대 경기에서 그 자식이 그쪽을 꽉 안고 안 놔줬잖아!’라며 솔직한 심정이 나올 뻔했지만 레온하르트는 빙긋 눈웃음을 그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알긴, 뉴스에서 봤지.”
“아.”
“그나저나 요한, 너무 무심한 거 아냐? 이제 런던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선수가 됐다고. 그러니 요한과 함께 찍힌 선수에 대한 기사도 당연히 뜨지. 그 기사에서 이준오라는 선수에 대해 설명해 놓은 걸 봤어.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 주장이라던데.”
이준오라는 그 남자는 단순히 요한이 들어간 프레임 안에 함께 있는 선수 정도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 악셀이 자주 보는 AAB 신문사의 한 기사에서는 런던 FC의 별인 요한 백이 처음으로 입성한 A팀을 자세히 취재한 내용을 다루었는데, 그 기사에서 이준오는 ‘요한 백의 둘도 없는 룸메이트’라는 수식어까지 붙어 있었다.
뛰어난 배우답게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으며 자연스레 대답한 레온하르트를 보고 의심의 시선을 거둔 요한은 ‘그렇군요.’라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수긍하는 요한을 응시하다 입 안을 근질거리게 만드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그 이준오라는 선수와 그쪽은…… 많이 친한 편인가?”
빌어먹을 축구계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골만 넣으면 끈적한 세리머니를 이어 가서 불쾌하기까지 했다.
함께 중계를 지켜보던 이안 키스트는 ‘뭘 그리 일일이 흥분하고 그래. 저게 보통이라고.’라며 혀를 찼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다.
바스티안 랄프나 디에고 가르시아 같은 경우는 각각 파트너가 있는 몸이었기에 그나마 질투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지만 한국인인 데다 정체도 불분명한 이준오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근래 들어 저와 있을 때마다 걸려 오는 전화의 주인공이 하필이면 이준오라는 남자였기에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TV로밖에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경계할 대상을 찾은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피식 웃던 요한이 답변했다.
“네.”
“뭐?”
“친합니다.”
“……!”
“많이 의지하고 있는 분이기도 하고요.”
스윽 올라가는 요한의 입꼬리를 보며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주시하던 요한이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음을 던졌지만 하하 웃으며 별거 아니라고 대답해 버린 까닭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의지…….’
의지라.
레온하르트 악셀은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흑발의 동양인을 뒤로 힐끔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TV 중계 화면으로밖에 본 적이 없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축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던 레온하르트였지만 요 몇 달간 수도 없이 많은 축구 경기를 지켜봐 왔다. 요한이 선발로 뛰건 혹은 조커로 뛰건 가리지 않았다. 그 많은 경기들 중에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A매치도 있었던지라 앨리슨 디어의 옆에 앉은 남자가 이준오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저놈이 요한이 의지하고 있는 녀석인가.’
제게는 단 한 번도 그런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던 요한이었으므로 괜히 얼굴이 구겨졌다. 거기다가 얼마 전 요한과 자신은 저 남자가 걸어온 전화로 인해 다투지 않았던가.
레온하르트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저자가 여기 있는 거지?
‘한국에 있어야 할 사람 아닌가?’
거기다 왜 하필 앨리슨 디어와…….
레온하르트가 고뇌에 휩싸인 사이, 이준오의 말을 듣고 낮은 탄성을 흘리던 앨리슨 디어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호. 아뇨, 아뇨. 분데스 진출은 아니에요. 물론 은근슬쩍 제의가 들어오긴 했지만…… 요한은 런던 FC에 충실하거든요.”
“아.”
“아무래도 해외 생활을 하다 보니 독일어까지 배우고 싶어졌나 보더라고요. 그런데 준오 씨, 생각보다 영어가 능숙하시네요. 요한에게 그간 한국어로만 대화를 나눴다고 들어서 조금 걱정을 했는데 말이죠.”
“하하. 영어 회화 정도는 기본적으로 구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지인처럼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배우고 있고요.”
“그런데 왜 요한과는……?”
“대한민국 A팀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영어로 소통하면 다른 선수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고. 게다가 요한은 한국인이잖습니까? 한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요.”
“뭐, 그건 그러네요. 역시 요한의 말대로 본받고 싶은 주장다우세요.”
“예? 요한이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어디 그 말뿐이겠어요? 준오 씨가 잘해 주셔서 적응하기 쉬웠다든가, 한국 대표 팀이 잘나가는 건 준오 씨가 주장이라서가 아닐까 라든가, 해외 진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겠지만 엄청 기대되는 선수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죠.”
“하……하하. 이거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그 녀석 칭찬도 하는 성격인가요? 이왕 해 줄 거면 대놓고 해 주면 더 좋았을 텐데.”
“요한이 타인의 칭찬을 잘하는 편은 아니죠. 호호호!”
아직 킥오프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더욱더 또렷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에 레온하르트는 구겨진 얼굴을 펴지 못했다.
확실히 근래 요한이 꺼낸 타인의 칭찬 중 이준오의 비중이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의 앞에 누가 앉아 있는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두 남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참! 곧 아시안컵이라 시간 내기 힘드셨을 텐데 다행히 일정이 맞았네요. 런던에는 며칠 동안 머무신다고 했죠?”
“일주일? 혹시 더 길어지면 열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 협상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일주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숙소는 정하셨어요? 혹시 지금 계신 곳이 불편하시면 제가 따로…….”
“아아,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런던에 있는 동안 요한이네 집에 머물기로 했거든요.”
……뭐?
신경 쓰지 말아야지, 저들의 대화에서 관심을 돌려야지, 곧 시작될 경기에 집중해야지, 를 중얼거리던 레온하르트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하마터면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게 무슨 소리냐고 외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 냈다.
“어머, 요한의 집에서요? 요한이 그러래요?”
놀란 것은 앨리슨 디어도 마찬가지였는지 깜짝 놀라 이준오에게 묻는 게 들려왔다. 그러자 이준오가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얼마든지 머물라던데요?”
당사자는 편하게 뱉어 냈을 그 말이 레온하르트의 귀에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사라질 줄 몰랐다.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는데.’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굳어 갔다.
* * *
[랄프 선수! 오늘 오신다던 그 붉은 머리 남성분이요, 아까 오셨다고 연락 왔습니다!]
런던 FC의 후보 선수들이 대거 선발로 나섰던 풋볼 리그컵 8강전 경기는 런던 FC의 4 대 0 승리로 끝났다.
벤치에 앉아 그간 선발로 뛰지 못한 선수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바스티안 랄프는 경기가 끝난 후 제게 다가와 작게 속삭이는 관계자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빼더니.’
저만 보면 길길이 날뛰는 적발의 한 남자가 눈앞에 아른거려 피식 웃던 바스티안은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 결국 경기장까지 찾아온 남자를 마중 가기 위해 드레싱 룸을 벗어났다. MS를 가득 채웠던 관객들도 이미 대부분 빠져나간 후인지라 지금쯤은 올라가도 저를 알아볼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귀빈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꽤 가볍다 느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바스티안은 이미 도착해 있는 문자 하나를 응시했다.
<경기 끝난 뒤 백 선수 좀 잠깐 잡아 둘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문자의 발신인은 지금 그가 마중을 가려는 남자였다.
요한을?
‘갑자기 왜?’
의아해하며 문자가 도착한 시간을 내려다본 바스티안은 예의 문자가 하프타임 직전에 전송되었음을 인지했다. 아무리 출전하지 않는 경기라 해도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중에는 전자기기를 켜지 않았기에 뒤늦게 문자를 확인한 것이다.
‘요한은 이미 경기장을 빠져나간 것 같은데.’
휘슬 소리가 들리자마자 상대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홈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바로 퇴근하던 요한의 뒷모습을 떠올린 바스티안은 문자에 답을 할까 하다 말았다. 어차피 곧 보게 될 사람에게 직접 말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성큼성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뻗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엇이 그리 눈치가 보이는지, 축구를 그리 좋아하면서도 경기장에 오는 것을 질색하던 사람이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조금은 들떴다.
‘……!’
그렇게 힘차게 걸어가던 바스티안은 텅 빈 귀빈석 구역에 홀로 앉아 있는 검은 모자의 남자를 발견했다.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남자의 뒷모습이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큰 체격을 지니고 있기는 했으나,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특별했기에 저 정도 체격은 당연했다.
언뜻 보이는 모자 밑의 붉은 머리카락으로 그임을 확신한 바스티안은 싱긋 웃으며 그를 향해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왜 이렇게 숙이고 있는 거지?’
물론 그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아주 살짝, 정말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든 건 사실이다. 평소 그가 자주 입는 의상에 모자, 붉은 머리카락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미묘했다. 그러나 자신이 준 티켓이었고 그가 왔다는 말을 넌지시 들었기에 당연히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새 남자의 뒤에 도착한 바스티안은 그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결국은 올 거면서 대체 왜 그렇게 애를……. 헉!”
자신과 한 내기에서 진 셈이니 오늘 밤의 승자는 제 쪽이 틀림없다 여기던 바스티안이 웃으며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어깨를 덥석 잡는 순간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에 움찔하던 바스티안은 스윽 고개를 든 남자의 눈동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의 푸른색 눈동자가 아닌, 지독할 만큼 서늘한 녹색이라는 것을 깨닫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악…….”
“랄프 씨.”
‘악셀 씨?’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바스티안은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런 바스티안을 향해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고정시키던 남자가 어쩐지 쌀쌀맞은 음성을 내뱉었다.
“요한 백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96화
고작 메모 하나 남기고 떠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당혹감에 물든 레온하르트 악셀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빙긋 웃고 있는 엘레나 윈터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덜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요한은 스스로도 똑똑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질투라는 감정의 연장선임을.
과거가 어찌 되었든 레온하르트 악셀이 현재 그 누구보다 제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만으로 요란하게 흔들리는 이 감정은 요한이 그토록 꺼리던 질투에 가까웠다.
“요……한?”
그래서 그만 그런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물론 레온하르트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차갑게 말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준오와의 통화를 방해한 레온하르트에게 서늘한 음성을 날리고 이만 나가 달라고 말할 때의 제 모습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크게 당황한 레온하르트가 일언반구조차 못 한 채 방을 나선 것은 냉랭하기 그지없는 그의 태도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리라.
화가 났던 걸까, 아니면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레온하르트에게 제 모든 의구심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지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스위스를 떠난 사람도, 지금까지 앙금이 남은 사람도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덕분에 끊임없이 제게 연락을 하던 레온하르트의 문자 역시 조금씩 짧아지는 게 느껴졌다.
‘못……났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본다면 평소와 다름없을 테지만 매일같이 거울을 보는 자신은 그 변화를 확연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심술이 가득 묻어나 있는 모습이라니. 게다가 몇 날 며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눈가에도 그늘이 가득했다.
요한은 쓴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세게 짓눌렀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행동했더라면.’
원인을 제공한 쪽은 상대일지 몰라도, 결국 파국을 내 버린 것은 스스로였다.
그래서 가슴이 아려 왔다.
요한은 어둡게 내려앉은 제 눈동자를 빤히 직시하며 미간을 좁혔다.
만약 그와 약혼했던 사람이 동성이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하필이면 좋아하게 된 사람이 또다시 이성애자라는 사실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잊지…… 못한 건가.’
이제는 떨쳐 내야 할 과거의 일이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는다.
저를 믿어 주는 레온하르트를 만나 극복해 내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 한 번 상처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또다시 마음을 닫으려 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어 요한은 끝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벌 받는 게 아닌가 싶어. 네가 아닌 막심을 선택한 거, 이제야 벌 받나 봐.]
엘레나 윈터라는 여자가 여전히 레온하르트 곁에 머문다는 데 질투한 것도 사실이지만, 도망치듯 스위스를 떠나온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레온하르트가 어쩌면 자신이 아닌 그녀를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악셀 씨는…… 달라.
스위스에서도, 그리고 돌아온 후에도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레온하르트 악셀은 과거 자신이 알고 지냈던 그 사람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저 재미를 위해 너와 어울렸을 뿐인데. 그런 의미에서 백요한, 넌 참 순진하군.]
그러나 끝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이 지독한 굴레에서 도저히 벗어나지지 않는 스스로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요한은 구렁 속에 빠져들어 갔다.
「……한아.」
「…….」
「요한아!」
그렇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요한은 제 어깨 위로 손을 얹으며 외치는 누군가의 음성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뭐 하고 있어?’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준오의 얼굴이 보였다.
요한은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준오는 놀라는 요한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화장실 간 녀석이 하도 안 와서 직접 모시러 왔어.」
「죄, 죄송합니다.」
「하하. 뭘, 죄송할 것까지야. 디어 씨가 기다리는데 슬슬 나가자.」
「……네.」
풋볼 리그컵 8강전 경기 직후, 요한은 프리미어리그의 겨울 이적 시장에 맞추어 해외 진출을 하기 위해 런던을 찾은 준오와 만났다. 새로이 준오의 에이전트가 된 앨리슨도 함께 자리한 저녁 식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쩐지 그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집중할 수 없었다.
아니, 스위스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순간순간 넋을 놓고 있는 행동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심지어 경기 전 가장 중요하다 여겨지는 팀 토크에서마저 멍하니 앉아 있는 일들이 반복돼서, 지적을 당할 정도였다.
이런 나사 빠진 행동들이 지속되다 보면 분명히 큰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일모레쯤 정확한 미팅이 잡힐 것 같아요. 전반적인 계약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한 대로 진행을 할 거고, 세부 사항에 대한 조율이 있을 예정이에요. 물론 준오 씨가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갈 거니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 준오 씨는 언제나 당당한 태도로 임하고, 나머지는 전부 이 앨리슨 디어에게 맡기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