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요한을 찾아 나서려다 엘레나의 통화 내용을 듣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응접실로 데려오기는 했으나,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던 여자에게서 듣기에는 몹시나 어이없는 발언이었다.
엘레나 윈터는 흔들리던 연회색 눈동자로 미동 없는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스윽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흥 콧방귀를 뀌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봐, 엘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애초에 그럴 생각 따위 없었으면서 무슨.”
조금 전 들은 말을 다시 떠올려 봐도 헛웃음만 흘러나온다. 레온하르트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쯧 혀까지 차더니 엘레나에게 가늘게 뜬 눈을 고정시켰다.
그러자 엘레나가 손에 쥐고 있던 잔을 아래로 내려놓더니 오히려 물었다.
“왜, 네가 어때서. 너는 예전부터 젠틀했잖아. 여자들 마음도 잘 알아주고. 게다가…….”
“넌 처음부터 형님, 아니었나?”
“…….”
“나랑 약혼하게 됐다는 소식 듣고 나한테 제발 파혼해 달라며 우는 모습까지 봤는데,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난처하다며 몸을 파르르 떨어 버리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안면을 굳히고 있던 엘레나가 결국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니.’ 하고 중얼대는 엘레나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서리자 레온하르트도 옅게 웃었다.
파혼한 지 벌써 5년이 흐른 레온하르트와 엘레나의 약혼은 두 사람의 의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정확하게 따지면 처음부터 끝까지, 비즈니스적 차원에 가까웠다.
당시 엘레나의 가문인 윈터가와 악셀가는 과거부터 인연을 맺어 온 상호 협력적인 가문이었고, 가문의 수장이었던 두 가주들은 휴일에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로 가까웠다.
그러던 와중 윈터가를 뒤흔드는 일이 생겼고, 그를 공식적으로 돕기 위해 악셀가의 가주인 레온하르트의 아버지 이그신이 윈터가에 혼약을 제안했던 것이다.
윈터가의 가주에게는 외동딸 엘레나뿐이었지만 악셀가의 가주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나이와 여러 가지 사정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원래대로라면 엘레나와 레온하르트의 형인 막시밀리언이 약혼을 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지만, 그때 막 뮤지컬 배우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해 런던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레온하르트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던 이그신이 욕심을 부린 것이 시작이었다.
오래전부터 교류해 오며 엘레나가 형 막시밀리언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한때 그녀를 마음에 두기도 했으나 자신보다는 막시밀리언과 그녀를 이어 주기로 자청했다.
하여 자신은 가문의 그 어떤 유산에도 뜻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유산 포기 각서까지 쓰며 파혼을 강행했고, 미래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윈터가와 인연을 이어 가야 했던 이그신은 레온하르트 대신 막시밀리언이라는 카드를 다시 들이민 것이다.
‘형님도 너무 서투르시단 말이지.’
비록 한참을 돌아온 관계이기는 하나, 레온하르트가 알고 있기로 엘레나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막시밀리언은 엘레나가 그를 마음에 품기 전부터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악셀가의 가주인 이그신 악셀이 자신이 아닌 레온하르트를 엘레나의 약혼 상대로 지목했고, 가문의 차기 후계자인 위치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기에 동생과 좋아하는 여자의 약혼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레온하르트의 중재로 엘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했던 막시밀리언은 엘레나와의 결혼식 날 그 누구보다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레온하르트는 요한만큼이나 무표정한 형님의 얼굴에 물들었던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군.’
한쪽은 너무 애정 표현이 과하고, 또 한쪽은 애정 표현을 할 줄 모른다. 그로 인해 부딪치는 일이 잦다는 것을 듣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어쩌면 요한보다 더 표현을 할 줄 모르는 제 형님의 모습을 떠올리던 레온하르트는 친애하는 두 남녀를 위해 자신이 나설 때라는 것을 인지했다.
“걱정 마, 엘렌. 형님은 내가 꼭 모셔 올 테니.”
임신한 이후로 더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엘레나를 위로한 레온하르트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한 뒤 응접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대체 무엇이 바쁜 건지 임산부인 아내만 덜렁 휴가지에 보내 놓고선 도무지 올 생각을 않는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체 뭡니까, 형님. 오전엔 오실 때까지 엘렌을 잘 부탁한다더니, 이젠 또 안 오시겠다뇨. 이건 엘렌뿐 아니라 저까지 괴롭히는 일입니다.”
-너……를?
“당연하죠, 형님. 혹시 오늘 제가 누구와 별장에 왔는지 들으셨습니까?”
-혼자 온 거 아니었나?
“아닙니다! 제가 뭐하러 이 귀중한 시간을 홀로 보내겠습니까!”
-아.
“저도 제 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요. 그런데 엘렌을 달래느라 그 사람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봤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 그랬군.
“형님, 두말할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오시죠. 안 그러면 엘렌 혼자 내버려 두고 저도 나가겠습니다.”
-뭐? 그건!
“그건, 은 무슨. 엘렌이 형수라는 건 둘째 치고, 형님도 형님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저도 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일보다 엘렌이랑 형님의 주니어가 중요하시다면 당장 뛰어오십시오. 엘렌이 홀로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협박에 가까운 말을 건넨 후 툭 전화를 끊어 버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도착했다.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다는 막시밀리언의 대답이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 골칫거리를 드디어 해소한 것에 피식 웃은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랐다.
어느덧 휴가 첫날의 해가 진 상태.
‘젠장!’
예기치 못한 엘레나의 등장으로 인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요한을 따라 루체른 산책을 나서도 모자랄 판에!
레온하르트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밖으로 나가려다 마침 마주친 프리츠가 요한의 컴백을 알려 주자 생긋 웃으며 그의 숙소로 달려갔다.
두근두근.
‘좋아하면 좋겠는데.’
그리고 아직 이르긴 하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리 챙겨 온 스노우볼 하나를 들고 요한의 숙소 앞에 도착했다.
레온하르트는 흠흠, 헛기침을 흘린 후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곧이어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환한 불빛과 함께 요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죠?”
서늘한 표정의 요한이 문 앞에 어색하게 서 있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레온하르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들어가도 되나?”
93화
‘흠흠.’
오늘 하루 동안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건 지금이 처음인지라, 괜히 목이 칼칼해졌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요한의 푸른색 눈동자가 지독할 만큼 고요해서인지 더욱더 그랬다.
레온하르트는 괜한 기침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스노우볼을 움켜쥔 손을 등 뒤로 돌린 채 그저 미소 짓는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보던 요한은 후우 한숨을 흘린 채 뒤로 물러났다.
레온하르트는 슬며시 비켜나는 요한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다행히 화가 난 건 아닌가?’
만약 화가 났다면 문전박대를 했겠지.
레온하르트는 빙긋 웃으며 요한의 숙소로 기다란 다리를 쭉 뻗었다.
“흐응, 여긴 이런 구조군.”
“……?”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머물고 있는 방 내부를 둘러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자 문을 닫던 요한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레온하르트가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내자 요한이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물었다.
“가문의 별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온하르트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게스트 룸에는 잘 오지 않는 편이라.”
“아.”
“그나저나 계획이 틀어져도 한참은 틀어졌군.”
“네?”
“원래대로라면 내 방이 여기서 가까워야 하는데 갑자기 엘렌이 오는 바람에.”
엘레나의 등장으로 인해 시작부터 꼬여 버렸다.
레온하르트는 쳇 입술을 삐죽이며 마침 보이는 요한의 침대 위로 엉덩이를 붙였다. 요한은 그러한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한의 얼굴로 보아 일단 자신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레온하르트는 등 뒤로 숨긴 작은 스노우볼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반지나 목걸이도 아니고 제게 스노우볼을 제작해 달라고 한 건 처음입니다.]
[그럼 안 되는 겁니까?]
[하하하, 그럴 리가요. 설령 해 본 적 없다 해도 제작해 드려야죠. 누구의 부탁인데. 걱정 마십시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스노우볼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레온하르트 악셀은 얼마 전 시간을 내어 런던의 유명 보석 세공 장인인 미첼 클라크를 찾아가 요한을 위한 스노우볼을 제작했다.
손안에 가득 들어찰 만한 크기의 작은 스노우볼이었지만 그 속에는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작은 그라운드가 펼쳐져 있었다.
은으로 만든 빛나는 골대에 슛을 하고 있는 인간 형상의 모형은 마치 요한을 떠올리게 했다. 거기에 반짝반짝 일렁이는 다이아몬드 가루로 안을 채워 넣은 터라, 아래위로 돌리면 그 빛나는 가루들이 눈이 내리듯 떨어졌다.
눈을 좋아하는 요한을 생각해 디자인부터 보석까지 모두 직접 선택했던 레온하르트는 이번 여행에서 그에게 이 물건을 전해 줄 생각이었다.
문제는, 이 물건을 건넬 타이밍인데…….
‘어떻게…… 전해 주지.’
두 사람을 위한 특별한 날, 그리고 특별한 순간에 선물을 주고 싶었다. 이것을 받아 든 요한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번지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서.
두근두근.
미동 없던 요한의 입가에 웃음꽃이 피는 모습이 선해서 레온하르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저기, 요한. 나, 그쪽한테…….”
여러모로 꼬여 버린 시작이기는 하나 밤은 아직 길었고,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요한에게 미소 지으려던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손을 들어 버리는 요한의 행동에 멈칫했다. 요한은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레온하르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악셀 씨, 죄송하지만 전화 좀 받아도 되겠습니까?”
“……어?”
“실례하겠습니다.”
레온하르트가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제 말만 하고선 전화를 받아 버린 요한이 몸을 홱 돌렸다. 등 뒤에 감춘 스노우볼을 앞으로 꺼내려던 레온하르트는 작은 탄식을 내뱉을 뿐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준오 선배님?」
이준오?
급하게 받아야 할 전화라면 응당 받아야지, 라고 생각하던 레온하르트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썼다. 물론 요한이 뱉어 낸 말들이 한국어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말들 중 유독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이준오라는 저 한국 선수 말이야, 백 선수랑 유독 친한 것 같다. 안 그래?]
귀가 따가울 만큼 들었던 단어가 신경을 벅벅 긁는다.
레온하르트와 함께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친선 경기를 지켜보며 쿡쿡 웃던 이안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기분이 나쁠 만큼 요한과 즐겁게 세리머니를 하던 이준오라는 한국 축구 대표 팀 주장은 요한과 같은 방을 쓸 만큼 친근한 사이라고 했다.
단 한 번도 요한의 앞에서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이안이 ‘가끔 백 선수가 말한대. 이준오 선수랑 친하다고 말이야.’라며 속삭였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제게 등을 돌린 채 창가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요한에게로 다가갔다.
성큼성큼.
「네. 안 그래도 선배님이 오신다길래 준비는 해 두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런데 정확히 12월 언제쯤 오실 예……!」
요한은 이준오와 통화를 하며 조금 전 레온하르트에게 문을 열어 줄 때는 보여 주지 않던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은 채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창밖에서 소복소복 하얀 눈이 내리는 모습을 응시하던 요한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갑작스러운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레온하르트는 인기척 없이 요한의 뒤에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요한이 전화를 받다 말고 뒤로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요한의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한국인에게 이 시간을 방해받을 순 없지.
놀란 요한을 자극하던 레온하르트는 이번엔 조금 더 과감하게 손을 움직였다.
「……흣.」
-「왜 그래, 요한아? 무슨 일 있어?」
그러자 요한을 부르는 듯한 한국어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피식 웃은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옷 사이로 집어넣은 손을 살짝 위로 움직였다. 요한의 뒷목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요한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조금 이따 다시…… 전화 드릴게요.」
한참 전화 통화를 이어 가던 요한의 탄탄한 복근이 레온하르트의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눈꼬리를 휘며 손길을 멈추지 않던 레온하르트는 한국어를 뱉어 내는 요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속도를 높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먼저 전화를 끊어 낸 요한이 제 뒤를 덮친 레온하르트를 팔꿈치로 밀어낸 뒤 홱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주저 없는 그 행동에 놀라면서도 이내 눈웃음을 그렸다.
“요…….”
“대체 무슨 짓입니까.”
입꼬리를 올리려던 레온하르트는 서늘함으로 가득 찬 요한의 푸른 시선에 움찔했다.
어?
이제야 제게 집중하냐며 장난스레 말하려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요한은 살짝 당황한 것이 틀림없는 레온하르트를 봐주지 않으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전화를 받는 도중에 이 무슨……. 대체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칼바람이 쌩쌩 부는 요한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멈칫하던 레온하르트는 아아, 탄성을 흘리며 변명을 하려 했다.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쪽이 내가 아닌 남자한테 신경을 쏟는 것 같아서 그랬어.’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다 젠장, 하고 욕설을 흘리는 요한의 생각지 못한 행동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요한은 움켜쥐고 있던 핸드폰을 스윽 내려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정면으로 노려봤다.
“……속에는 ……밖에 ……습니까?”
뭐라고?
분노가 서린 요한의 태도에 당황하며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끼던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꺼낸 다음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요한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악셀 씨는 제 몸밖에 관심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 * *
“최악이네.”
쯧, 혀를 차며 말하는 이안의 목소리가 귀를 웽웽 울린다.
레온하르트는 순간 발끈하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이안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마리아를 발견했다.
적발의 두 남녀는 동정의 가치도 없다는 눈빛으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하며 손가락까지 좌우로 젓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최악이라고?”
“당연히 최악이지! 안 그래요, 디어 양? 동조해 줄 가치도 없지 않습니까?”
뭐?
“맞아요. 악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답답하시네요.”
레온하르트는 두 남녀의 반응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되려 미간을 좁혔다.
오히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요한이…… 먼저 돌아갔다는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말을 듣고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던 그날 밤.
레온하르트는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한의 말에 얼떨결에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요한의 방으로 가던 중 프리츠가 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숨까지 헐떡이며 요한의 숙소로 달려가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휴가를 즐길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짧은 쪽지 하나뿐이었다.
그때 느꼈던 허탈감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군.’
저를 놀리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는 이안 키스트는 그렇다 치더라도, 안나마리아 디어까지 한숨을 푹 내쉴 정도였다.
레온하르트는 어휴, 하고 한숨을 쉬더니 ‘그래서 요한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았구나.’라고 중얼거리는 안나마리아의 말에 인상을 썼다.
“이 녀석 얼굴을 보아하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그러니 저렇게 입을 쭉 내미시지.”
“레온, 네가 그동안 왜 레이디들에게 차였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어머, 악셀 씨가 차는 입장이 아니었나요?”
“그럴 리가. 한 번도 먼저 찬 적은 없을걸요?”
“흐음, 뭔가 이해가 되네요.”
“그렇죠? 허우대만 멀쩡하면 뭘 합니까. 속이 부실한데.”
“우리 요한, 마음 많이 상했겠다.”
“마음만 상했다면 다행이죠. 부디 이 녀석을 미워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지? 그리고,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적어도 난 노력했어. 분위기를 바꾸려고 간 건데, 그걸 거부한 건 요한이잖아!”
죽이 잘 맞는 두 남녀의 대화를 들으며 얼굴을 구기던 레온하르트는 듣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움찔하던 두 남녀가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쉰 이안 키스트가 입을 열었다.
“이 키스트 님이 볼 때, 일단 레온 넌 총 네 가지 잘못을 저질렀어.”
……뭐?
94화
커다란 오른손에서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펼친 이안 키스트의 파란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열정적이다 못해 과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눈빛에 움찔한 레온하르트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이안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첫째. 레온하르트 악셀, 너 그 별장에서 만났다는 ‘형수’에 대해 요한에게 제대로 설명하기는 했냐?”
레온하르트는 느닷없는 이안의 질문에 얼굴을 구겼다.
“그걸 왜 설명해야 하지? 엘렌이 누구인지는 어차피 요한도 알고……!”
아.
흥, 콧방귀를 뀌며 대답하던 레온하르트의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못했다. 투덜거리던 그의 머릿속에 엘레나 윈터가 누구인지 요한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는 내 전…… ‘친구’ 엘레나 윈터.]
당시 레온하르트는 요한에게 그녀를 단순히 친구라고만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잠시 응접실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기는 했으나 갑자기 걸려 온 막시밀리언의 전화로 인해 자리를 비우게 됐고,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니 요한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요한과 엘레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레온하르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말을 하다 마는 레온하르트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이안이 쯧, 혀를 찼다.
“디어 양.”
“네, 키스트 씨.”
“혹시 휴가에서 돌아온 후 백 선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예?”
“백 선수 표정이 어떻던가요. 평소보다 좋았습니까, 아니면 나빴습니까.”
“글쎄요. 요한은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라.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안나마리아를 응시했다. 안나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안 키스트는 안나마리아의 대답을 듣자마자 ‘이것 봐!’ 하고 외치더니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이게 네 첫 번째 잘못이야. 아무리 친형님의 아내라고 해도 과거 인연이 있었던 여자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은 점. 백 선수는 어떤 경위를 통해서든 너와 그 여성의 예전 관계를 들었을지 모르지. 그래서 더욱, 화가 났던 건지도.”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레온하르트를 말없이 직시하다 어휴, 숨을 흘리더니 이번엔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였다.
“두 번째 잘못은, 네가 백 선수를 쫓아가지 않고 네 형수의 곁을 지켰다는 점이겠군.”
레온하르트는 ‘이거 역시 못쓰겠는데?’ 하고 쯧쯧거리는 이안을 노려봤다.
“그게 뭐가 잘못됐지? 내가 요한을 바로 따라가지 않은 건, 아니 따라갈 수 없었던 건, 엘렌의 사정을 들었기 때문이야. 난 엘렌의 친구로서 그녀의…….”
“잠깐, 잠깐. 이봐, 악셀. 잠깐만 멈춰 봐.”
두 번째 잘못에 대한 지적을 용납할 수 없었던 레온하르트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이안 키스트가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레온하르트가 왜 그러냐는 듯 이안을 노려보자 이안은 황당한 눈빛을 안나마리아와 주고받은 뒤 차분하게 말해 주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만 묻자.”
“뭘?”
“넌 이번 휴가를 형님의 부인을 위해 낸 거냐, 아니면 백 선수를 위해 낸 거냐?”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군. 당연히 요한을
“그런데 왜 형님의 부인을 위로하느라 시간을 보낸 건데?”
멈칫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이안이 말했다.
“물론 네 입장도 이해가 가. 친구이자 전 약혼녀, 그리고 이제는 형수가 된 여자가 상심해있으니 걱정됐겠지. 하지만 레온, 상처를 받은 건 네 형수뿐만이 아니야. 백 선수는 안 그래도 바쁜 시간을 오직 네 일정에 맞춰서 비워 뒀어. 그런데 그런 귀중한 시간을 자신이 아닌 네 형수랑 보내고 있는 네가 고깝지 않겠냐?”
“……!”
“형수를 위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지켜야 할 사람을 내팽개쳐 두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안 그렇습니까, 디어 양?”
이안은 대답하지 않는 레온하르트에게 일갈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는 안나마리아에게 동조를 구했다. 안나마리아는 ‘미안해요, 악셀 씨. 이번에도 공감하기 힘드네요.’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꽉 악물었다.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려고 했으나 변명의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저 역시 이안처럼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 그런 말을 들으니 더욱더 현실이 되는 것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긴 숨을 흘리는 이안의 음성을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잘못은, 바로 백 선수의 전화를 방해한 점이야.”
“이안, 그건 말하지 않았나. 하필 그때 요한한테 전화를 걸어온 놈이…….”
“그래그래, 네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축구 선수였다는 거. 나도 들었어. 질투가 난 거겠지. 이해해. 그렇지만 레온.”
이안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안 그래도 너에 대한 화를 누르고 있는 사람 앞에서 네 기분을 우선시한 건 나빴어. 그 순간 넌, 조금도 백 선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단 걸 드러낸 거라고. 알아?”
목구멍이 컥 막혔다.
이안 키스트의 말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어버린 레온하르트가 이안의 옆을 지키고 있던 안나마리아를 응시하자 안나마리아 또한 쓰게 웃으며 머리를 아래위로 주억거렸다. 레온하르트의 안면이 돌처럼 굳어졌다.
이안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질린 레온하르트를 직시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