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 버리겠군.
* * *
“정말 거기에 가면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비단 승진의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식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난관이 끊이지 않았다. 사귀자마자 터져 버린 요한의 스캔들부터 시작해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시비, 그리고 이어진 파파라치들의 미행까지.
하필이면 교제를 시작한 두 사람 모두 런던에서는 꽤 유명인들이었기에 행동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요한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휴가만큼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의심쩍어하는 요한의 물음에 레온하르트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방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네?”
“루체른의 별장은 우리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는 곳이야. 루체른이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중심에서도 살짝 벗어나 있지. 루체른의 관광객들은 우리 별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걸?”
“아…….”
“걱정 마, 요한. 비밀 유지라면 아주 도가 튼 곳이니까.”
하하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한 레온하르트였기에 요한은 그를 믿기로 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함께 있을 공간이었으니까. 그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중요했던 요한은 ‘거기엔 그쪽이 좋아하는 눈도 있어.’라고 속삭이는 레온하르트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랐어요! 틀림없이 여성분이 내리실 줄 알았는데 남성분이 내리셔서. 게다가 몹시 낯익은 분이어서 더더욱이요. 호호호. 레온이 휴가를 함께 올 정도로 유명한 축구 선수와 친해질 줄은 몰랐거든요.”
요한은 싱긋 웃으며 말하는 흑발의 여성을 말없이 바라봤다. 부드러운 미소를 장착한 연회색 눈동자의 여성은 요한에게 얼른 차를 마시라는 듯 손짓하며 차향을 음미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몹시 낯이 익네요? 혹시 런던 FC의 요한 백 선수 아닌가요?]
취리히 공항을 떠나 레온하르트가 있다던 루체른의 별장에 도착하기까지, 두근두근 뛰는 마음을 안고 온 요한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부딪치게 된 상황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다행히 표정 변화가 적은 그였기에 당혹감을 모조리 표출하진 않았지만 레온하르트의 곁에 서 있는 흑발의 여성을 본 순간 난처해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서 제게 손을 내민 여성이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요한이 어떻게 된 거냐는 눈빛을 레온하르트에게 보냈지만, 레온하르트는 쓴웃음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엘레나 윈터예요. 레온의 친구죠. 만나서 반가워요, 백 선수.]
제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듣지 못한 요한은 얼떨결에 엘레나와 악수를 나누었고,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방해를 안 받는다더니.’
괜한 원망감이 차올라 속으로 투덜거리던 요한은 후우 숨을 고른 뒤 앞의 여성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대꾸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유명 선수라뇨? 이제 막 이름을 알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럴 리가. 백 선수의 명성은 제가 있는 독일에까지 퍼져 있는걸요.”
“네?”
“만약 저번 월드컵 때 백 선수가 있었다면, 우리는 두 골 차 이상으로 패배했을 거예요. 안 그래, 레온?”
“……난 관심 없어서.”
“호호, 이거 보세요. 이렇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더 놀라는 거라고요. 축구에는 흥미조차 없던 레온이 축구 선수랑 친해질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런데 백 선수, 그거 알고 계세요? 레온과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 하셨는데, 레온은 그보다 더 백 선수를 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글쎄, 얼마 전에 레온이 제게 백 선수의…….”
“엘렌!”
엘레나 윈터가 신이 난 듯 이야기를 이어 가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엘레나를 비롯해 요한까지 깜짝 놀라 레온하르트를 응시했지만 레온하르트는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쓸데없는 소리라니? 나는 그저…….」
「그만해.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아, 백 선수는 모르는 거야?」
「알겠어. 그럼 뭐, 말 안 할게.」
요한은 자신을 앞에 두고 엘레나와 독일어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레온하르트가 점점 더 얼굴을 굳히는 것을 목격했다.
“미안해요. 조금 전 얘기는 신경 쓰지 말아요. 별거 아니었어요. 그것보다…….”
똑똑.
“말씀 나누시는 도중에 죄송합니다.”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고 생긋 웃으며 화제를 돌리던 엘레나가 다시 요한에게 말을 걸던 순간이었다. 요한은 루체른의 별장지기라던 프리츠가 ‘막심 님의 전화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레온하르트에게 전화기를 들이미는 것을 지켜봤다.
“뭐 해? 얼른 받고 와.”
요한과 엘레나를 번갈아 응시하며 난처해하던 레온하르트가 주저하자 엘레나가 그를 부추겼다. 프리츠가 전화기를 조심스레 쥐고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마저 그러라는 듯 얼굴을 주억이자 ‘금방 올게.’라는 말과 함께 레온하르트가 응접실을 벗어났다.
요한은 졸지에 오늘 처음 만난 두 남녀와 같은 공간 안에 있게 되었다.
꽤…… 불편한데.
레온하르트가 나가 버리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요한은 미소만 띤 채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엘레나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위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레온하르트가 돌아올 때까지 차라도 마실 생각이었던 요한의 귀에 아직 응접실을 떠나지 않은 프리츠가 엘레나에게 하는 말이 또렷이 들려왔다. 또렷한 영어였기에 요한 역시 알아듣는 데 무리가 없었다.
프리츠는 ‘네?’ 하고 되묻는 엘레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은 레온 님과 윈터 양께서 파혼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걱정했었거든요.”
……뭐?
91화
중년의 별장지기가 꺼낸 말에 요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다행히 엘레나와 프리츠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터라 요한에게서 일어난 작은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쿵쿵.
심장의 떨림 때문인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요한은 동요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뒤늦게 그런 요한을 발견한 엘레나 윈터가 빙긋 웃으며 프리츠에게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츠 씨도 참.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언제 적이라뇨.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어머, 무슨 소리를. 벌써 5년이나 지난 일이라고요.”
“예?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당연하죠.”
호호 웃으며 말을 마친 엘레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요한에게 시선을 꽂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요한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해요, 백 선수. 괜한 얘기를 듣게 했죠?”
“……네?”
엘레나의 대화 상대가 프리츠에게서 저로 옮겨지자 요한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잠잠한 연회색 눈동자를 요한에게 고정시키고 있던 엘레나가 입술을 움직였다.
“저와 레온이 한때 약혼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일 뿐이에요. 저는 현재 다른 사람의 아내이고요.”
“아.”
“그리고 그때는 사정이……. 후후. 하여간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랍니다.”
요한은 미묘하기 그지없는 엘레나의 발언에 움찔거렸다.
“그게 무슨…….”
쾅!
“엘렌!”
엘레나 윈터가 건넨 말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아함을 느낀 요한이 다시 되물으려던 순간,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발을 쿵쿵거리며 레온하르트 악셀이 응접실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세게 움켜쥐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꽤 흥분돼 보였기에 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흑발의 여인은 그런 레온하르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이가 뭐래?”
그이?
다정하기 그지없는 단어를 뱉어 내는 엘레나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던 요한은 왠지 화난 듯한 레온하르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미간을 좁히던 레온하르트가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엘레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네 임신!”
……!
‘아아, 그거?’ 하고 대수롭지 않게 중얼대는 엘레나와 다르게 레온하르트의 외침을 들은 요한의 얼굴은 확연히 경직됐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계속 엘레나에게만 눈을 두고 있던 레온하르트 악셀이 말했다.
“형님과 대화하는 중에 네 임신 이야기가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래서 휴가를 낸 거라며!”
“호호. 레온, 왜 흥분을 하고 그래? 임신은 축복이지, 유난 떨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너, 임산부 앞에서 너무 소리를 높이는 거 아니니?”
“……너 그걸 말이라고!”
버럭 화를 내려던 레온하르트가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엘레나의 모습에 ‘후우, 젠장.’ 하고 길게 심호흡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레온하르트는 성큼성큼 엘레나에게로 다가와 입술을 삐죽였다.
“언질이라도 줬으면 선물도 준비했을 거 아냐.”
“선물은 무슨. 4년 만에 연락한 것 자체가 선물이니까 괜찮아.”
“엘렌…….”
“그것보다 레온, 너도 볼래? 얼마 전에 아기집 사진을 찍었거든.”
“저…… 윈터 양, 저도 봐도 되겠습니까?”
“어머, 그럼요! 이리 오세요, 프리츠 씨!”
레온하르트에게 연신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엘레나 윈터가 핸드백을 뒤적여 사진을 꺼내려고 하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츠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아기집 사진을 지켜보는 두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요한은 문득 가슴이 콕콕 찔려 오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설마 내가 남자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도 너를? 하하,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불편한 기억.
잊어버리고 싶어 가슴 밑바닥에 꾹꾹 눌러 담아 둔 과거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애써 도려냈던 일들이 돌연 눈앞을 스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지.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면 다시 한번 말해 주지. 난, 여자를 좋아해. 남자가 아닌 여자. 나와 닮은 내 아이를 낳아 줄 수 있는 여자. 알겠어?]
‘여……자.’
[여기는 내 전…… ‘친구’ 엘레나 윈터.]
[저와 레온이 한때 약혼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쿵쿵. 쿵쿵.
입술이 바짝 말라 간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선수. 요한 백 선수!’ 하고, 아기집 사진을 보고 있는 남자들에게서 제게로 시선을 옮긴 엘레나 윈터가 그를 불렀을 때였다.
‘아.’
두 남자와 다르게 창백한 얼굴로 제 자리에 앉아 있는 요한을 보고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엘레나가 물었다.
“괜찮아요, 백 선수? 안색이 많이 안 좋아.”
그제야 자신이 파르르 떨고 있음을 알아차린 요한은 엘레나의 아기집을 보던 레온하르트와 프리츠 역시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요한은 응접실의 세 남녀를 차례로 응시하더니 쓰디쓴 웃음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응? 뭔데요? 얼른 말해요!”
엘레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요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한은 그런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다 말했다.
“슬슬 제 짐을 풀러 가도 되겠습니까?”
“예?”
“짐?”
요한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건 엘레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아기집 사진을 들고 있던 레온하르트 역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요한은 말을 이었다.
“숙소가 아닌 이곳으로 바로 와서, 정리를 좀 해 두고 싶어서.”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러고 보니 막 도착한 사람한테 티타임을 하자고 너무 붙잡고 있었네. 미안해요, 백 선수!”
취리히 공항에서 루체른에 있다는 레온하르트의 별장까지 차로 이동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레온하르트에게서 엘레나를 소개받은 그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숨 돌릴 시간도 없이 불편한 자리를 갖게 된 요한이 뒤늦게 의사를 피력하자 엘레나가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요한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프리츠, 요한의 방이 어딥니까? 내가 직접…….”
“아닙니다, 악셀 씨.”
자리에서 일어나는 요한을 따라 몸을 움직이려던 레온하르트에게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레온하르트를 막더니 멀뚱멀뚱 눈만 뜨고 있는 프리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프리츠 씨라고 하셨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 숙소를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 * *
[그럼 잠깐 쉬고 오겠습니다. 두 분 마저 말씀 나누십시오.]
다급하게 그를 따라나서려던 레온하르트를 저지한 요한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과거 저를 향해 둘렀던 그 벽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순간 당황한 레온하르트가 무어라 대응할 틈도 없이 요한은 프리츠와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하는 수 없이 멀어지는 요한의 뒷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던 레온하르트는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지금,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가…… 난 건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 같아도 그러겠다.’
지난 몇 주 동안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채 전화 통화만 주고받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로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거다.
휴가를 내기 힘든 상황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스위스까지 온 요한이 별장 앞에서 엘레나와 마주한 순간 당황해하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저 역시 말도 없이 찾아온 엘레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레온, 이해해 줘. 엘렌이 꼭 그곳에 가고 싶어 했어. 오랜만에 네 얼굴을 보고 싶다고도 했고.]
악셀가의 정통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하나뿐인 형님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줄이야.
그리고 그 형님이 엘레나의 임신까지 언급하며 꺼낸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자신이 차기 후계자의 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손위 형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기에 더더욱.
‘임산부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아직 성별은 알지 못하지만, 대대로 자손이 귀한 악셀가의 차차기 가주가 될 녀석이었다. 비록 지금은 가문의 그늘에서 멀어진 상태이나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악셀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기에 미래의 가주에 대한 배려 정도는 할 용의가 있었다. 해서 엘레나를 별장에서 쫓아내지 못했던 거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 버린 건지.
어떤 일이든 순탄하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여독을 풀겠다며 프리츠를 따라가 버린 이후 메시지 한 통조차 보내지 않는 요한의 연락을 기다리다 못한 레온하르트는 응접실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요한의 숙소로 걸어가려던 레온하르트는 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프리츠를 발견했다.
“프리츠!”
“아, 레온 님.”
“혹시 요한, 아니 백 선수의 숙소가 어디인지…….”
“하하, 안 그래도 백 선수를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레온하르트에게 프리츠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프리미어리그는 본 적이 없고 뉴스로 백 선수의 기사를 접한 적이 있는데, 생각 이상으로 진중하신 분이더군요. 짐을 풀자마자 바로 산책을 하고 싶다며 루체른 시내로 어떻게 가냐고 물으시기에 그곳까지 바래다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네?”
레온하르트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하는 프리츠를 보고 당혹감에 물든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말도 없이?’
여독을 푼 뒤 그들이 계획했던 달콤한 휴가를 보내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홀로 산책을 나섰다니.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프리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레온 님?”
“…….”
“레온 님?”
“거기가 어딥니까?”
“예?”
“백을 데려다줬다는 곳이 어딘지 말해 주십시오.”
레온하르트가 눈에 힘을 주며 입술을 달싹였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프리츠가 움찔하며 얼떨결에 대답하자 레온하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엔트런스 홀 쪽으로 달려갔다.
화가 난 게 틀림없군.
무표정한 얼굴로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요한이었기에, 그의 행동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던 레온하르트는 요한을 따라나설 생각으로 성큼성큼 발을 뻗어 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막 엔트런스 홀 계단을 내려올 때쯤, 현관 쪽 창문 앞을 기웃거리며 핸드폰을 붙들고 있던 흑발의 여성이 누군가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오지 못한다는 거죠? 어째서?”
다급하게 움직이던 레온하르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92화
곧 있을 크리스마스를 대비하여 반짝반짝한 조명들로 장식된 루체른 시내의 모습이 한 번에 보이는 카펠교.
유럽에서도 가장 길고 오래된 나무다리를 자랑하는 그곳 위에서 요한은 강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좀 춥네.”
“많이 추워?”
“응.”
“그럼 이리 와.”
“응?”
“온기는 나눠야지.”
살짝 흐린 날씨라 그런지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음에도 빛나는 시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몹시 인상 깊다 생각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제 옆의 연인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호오, 호오.
떨어져 있던 연인이 하나가 되어 추위를 가시게 하기 위해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모습은 홀로 카펠교를 걷고 있던 요한의 눈에 매우 이상적으로 보였다.
요한은 ‘이제 안 춥지?’ 하고 생긋 웃는 연인을 품에 안고선 작게 속삭이는 남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거 아나? 카펠교에서 눈 내리는 루체른 시가의 모습을 보는 거, 꽤 괜찮아.]
[……예?]
[그냥, 괜찮다고. 그러니까 우리도 가 보지.]
[……!]
[다행히 겨울이니, 대충 가리고 있으면 누구도 우리를 알아보진 못할 거야. 마침 루체른에는 눈이 자주 오고, 손을 잡는 건 어렵더라도 함께 걷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 그쪽의 로망도 실현되는 거겠군. 안 그래?]
겨우 갖게 된 휴가 때 스위스 별장에 가기로 한 후,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요한에게 레온하르트가 웃으며 제안했다. 그 말을 건네던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너무도 예뻐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었다. ‘요한?’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 겨우겨우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돌아가자.’
홀로 카펠교 위에 서 있다 보니 미친 듯이 들썩였던 심장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는다. 요한은 쓴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대로 홀로 일정을 보내며 휴가를 망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심신의 정리가 필요할 듯해 시가를 둘러본 것은 잘한 결정이었으나 함께하기로 했던 레온하르트 없이 더는 혼자서 산책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첫 연애.
처음으로 마음을 나눈 사람과 시작하게 된 연애였지만,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질투에 물들어 토라져 버린 모습 역시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벽을 둘러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불현듯 떠오른 과거의 편린이 자꾸만 부정적인 상황을 상기시킨 탓에 더욱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요한이 마음의 벽을 닫아 두고 지냈던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크나큰 상처를 얻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마음을 교환했다 여겼지만 알고 보니 자신을 단순한 유흥 상대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마음껏 농락했으며, 모두의 앞에서 망신을 줬다.
그에 대한 상처로 제게 다가오는 이들을 모두 경계하지 않았던가.
물론 레온하르트 악셀은 이성애자다.
아니, 이성애자였다.
적어도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래서 오늘 그 상황을 마주한 순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악셀 씨는…….’
사람의 성적 취향이라는 것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쩌면 레온하르트 악셀은 현재도 이성애자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간 레온하르트가 제게 건넸던 숱한 고백들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고, 하나같이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진실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는 내 전…… ‘친구’ 엘레나 윈터.]
돌이켜 보면 가장 친한 친구가 여성인 건 저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 성별과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뜻이 맞으면 계속해서 인연을 유지하는 거고, 아니면 그 반대가 되는 거겠지.
레온하르트와 엘레나 윈터의 사이 역시 비슷할 거다.
‘편협하게 굴지 말자, 백요한.’
어렵게 낸 시간이었다.
구단에게 협조까지 구해 가며 겨우겨우 낸 소중한 시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귀중할 시간을 고작 질투 따위로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머리를 뒤덮는 불안한 생각들을 모두 떨쳐 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두워 있던 안색을 밝히고 레온하르트가 있을 별장으로 돌아왔다.
긴 거리였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다 보니 비교적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레온 님이요? 아, 조금 전 응접실에 계신 걸 봤습니다!”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산책은 잘했냐고 묻는 프리츠에게 레온하르트의 위치를 물은 요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응접실을 향해 걸어갔다.
‘시간은 소중하니까.’
토라져 있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요한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레온하르트에게 다가가기 위해 막 응접실 문 앞에 섰다.
그런데 그때.
“벌 받는 게 아닌가 싶어.”
완벽하게 닫히지 않은 응접실 안에서 엘레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멈칫하기는 했으나 이내 ‘그게 무슨 소리야.’라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문고리를 잡으려던 요한의 귀로 한숨을 머금은 엘레나의 말이 들려왔다.
“네가 아닌 막심을 선택한 거, 이제야 벌 받나 봐.”
쿵.
가까스로 안정시킨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 * *
“뭐?”
레온하르트는 길고 긴 숨을 흘리며 중얼대는 엘레나를 황당한 시선으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