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은 못 할 일이군.
호의로 시작된 제안이었지만 요한의 옆에서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잠을 자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침대를 벗어나려 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저녁 공연이 있는 만큼 가급적 빨리 집으로 돌아가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2주 뒤면 휴가가 시작되는지라 그때까지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무대 위를 오르고 싶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한 레온하르트가 침실 문을 열고 나오자 요한이 부엌에서 그를 반겼다.
그러한 요한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헤벌쭉 웃으려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혹시나 있을 승진과 우영의 존재를 떠올리며 경직됐다.
레온하르트는 빙긋 웃으며 제게 우유를 건네주는 요한에게 물었다.
“삼촌분들은?”
안 보이시네?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거리니 현재 시각 오전 7시 30분. 두 분 다 아침형 인간은 아닌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레온하르트는 ‘아.’ 하고 낮게 탄성을 터트리는 요한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요한?”
“두 분은 일찍 나가셨습니다.”
“뭐?”
“오전부터 볼일이 있다고, 저한테도 편지 하나만 남기고 가셨어요.”
“편지?”
요한은 예,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엌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메모지를 가리켰다. 무심코 그의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옮긴 레온하르트는 메모지에 적혀 있는 글자를 발견하고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예의 메모지에는 아마도 승진이 남겨 놓은 듯한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영어와 독일어가 아래위로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조카야. 일이 있어 삼촌이랑 우영 삼촌은 일찍 나가. 몸조리 잘하고 저녁에 보자.’라는 영어를 읽어 내려가던 레온하르트는 그 아래 익숙한 독일어로 적혀 있는 글귀에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 이게 무슨…….’
제 시력을 의심하며 메모지의 글자를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또 비벼도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서 콘돔은 확실히 쓰시길 바랍니다, 악셀 씨.’라고 적혀 있는 독일어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거, 독일어죠?”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요한이 레온하르트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빙긋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삼촌이 독일어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독일어는 미처 배우지 못해서 악셀 씨가 깨어나시기만을 기다렸어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
“왜 그러십니까, 악셀 씨?”
레온하르트는 미소 짓는 요한에게 홱 고개를 돌렸다. 그 행동에 깜짝 놀란 요한이 ‘악셀 씨?’ 하고 한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온하르트가 손을 뻗어 요한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요한.”
“예?”
“삼촌 말이야, 아직 우리 사이…… 모르시는 거 맞지?”
심장이 벌렁거린다.
메모지에 적힌 단어를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으나 확실히 콘돔이라고 적힌 게 분명했다. 요한의 얼굴로 보아서는 이 글귀를 해석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요한은 경직된 레온하르트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제 주변에서 악셀 씨와 저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안나마리아뿐입니다. 삼촌도 그러셨잖습니까. 어젯밤 식사에 악셀 씨를 초대한 건, 앞으로도 홀로 지내게 될 저를 잘 봐 달라는 의미에서라고. 저와 계속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하, 하하……. 그, 그래. 그랬었……지. 맞아, 분명 그러셨는데…….”
레온하르트는 의아해하는 요한에게서 시선을 돌려 메모지를 응시했다.
[사교성이 부족해서 친구가 별로 없는 우리 요한이가 요즘 자주 교류하는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안면도 틀 겸 찾아와 봤습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하하. 그럼 정말 레온이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악셀 씨?]
[우리 요한이랑은 어떻게 알게 됐지? 뭐? 촬영? 우리 요한이가 그런 걸 찍었어?]
[휴일에 만나서 게임을 한다고? 이야, 요한이 녀석 게임 좀 잘하는 편인데, 레온도 좀 하나 봐?]
[친구라고는 안나마리아뿐이었는데, 레온하고도 친구가 되었다니 안도가 되는군. 누님한테 이 사실을 꼭 전해 줘야겠어. 요한이가 영국에서 아주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고 말이야!]
[참, 이렇게 된 거,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하는 게 어때? 요한이 녀석한테 새로 생긴 친구에게 한국식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아, 과보호 맞아. 하하!]
승진이 퀸 레베카 시어터까지 찾아오긴 했지만 아직 저와 요한 사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요한이 말하지 않았기에 섣불리 저와 요한의 관계에 대해 언급할 수 없었던 레온하르트는 철저하게 요한과 절친한 친구인 것처럼 행동했고, 그를 순수히 받아들인 승진의 제안으로 어제저녁 식사에까지 초대받았던 것이다.
분명 식사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서도 승진은 요한과 레온하르트를 친구 이상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어젯밤 요한의 침실로 밀어 넣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본의 아닌 곤욕을 겪긴 했으나 무사히 위기를 넘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레온하르트는 생글거리며 제게 말을 걸던 승진을 떠올리고는 말라 버린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켰다.
“결정했습니다.”
듣기로는 레온하르트의 휴가가 시작되기 바로 전주까지 런던에서 머물다 갈 예정이라고 했는데, 이제 승진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던 레온하르트는 곁에서 들리는 요한의 음성에 겨우 상념에서 벗어났다.
“악셀 씨와의 휴가 말입니다. 아무래도 하루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이틀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레온하르트에게 결의에 찬 음성이 흘러들어 왔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악셀 씨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89화
[요한! 기쁜 소식이 있어! 구단에서 네 뜻대로 해 주겠대!]
얼마 전, 요한은 밑져야 본전인 심정으로 휴가 신청을 했다.
한창 바쁜 12월과 1월 사이에는 실상 휴가를 받기 어려웠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시즌이 끝날 때까지 레온하르트와 보낼 시간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특히나 박싱데이가 있는 12월 말과 아시안컵이 있는 1월에는 더욱더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 듯하여 앨리슨을 통해 구단에 이틀만 휴가를 내줄 수 없겠느냐는 의사를 전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앨리슨이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
[그간 네가 팀을 위해 수고해 준 의미로 보상하고 싶대. 얼마 전 네 더블 해트트릭 이후로 팀이 상승세잖아. 그래서인가? 물론 시즌 중이긴 하지만 곧 있을 리그컵 8강전에서는 하부 리그 팀이랑 붙으니 후보 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줄 겸, 웰비 감독이 주전 선수들한테 휴식을 부여할 모양이더라고. 특히 너는 1월에 아시안컵도 치르러 카타르까지 가야 하니……. 하여간 클락 단장, 투덜거리기는 해도 인심 쓸 땐 제대로 쓴다니까?]
목요일인 20일에 열리는 풋볼 리그컵에서는 2부 리그에서도 하위권을 달리는 팀과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1부 리그 팀들도 탈락한 리그컵 경기에서 무려 8강까지 올라오며 돌풍을 일으킨 팀이기는 하지만, 지난 11월 리그 1위 팀까지 쳐부수고 리그 1위를 탈환한 뒤 현재 극강의 포스를 보이고 있는 런던 FC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전 스트라이커인 요한뿐 아니라 나머지 선수들의 폼마저 물이 올라 다득점 경기를 이어 가고 있는 런던 FC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아마 요한의 휴가 신청이 통과된 것도 주전과 후보를 가리지 않고 적절한 로테이션을 취하며 곧 있을 박싱데이를 대비한 팀의 전략적 분석으로 인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정말 전용기 안 타도 되겠어?”
공항까지 요한을 배웅한 앨리슨이 차에서 내리려는 그를 향해 걱정이 가득 담긴 말을 건넸다.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려던 요한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위스까지 거리가 먼 것도 아닌데요, 뭘. 괜찮아요.”
“그래도, 누가 널 알아보기라도 하면…….”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죠. 설마 시즌 중에 휴가를 얻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음, 그런가?”
“걱정 마세요, 앨리. 힘들게 얻은 휴가인 만큼 안 들키게 주의할게요.”
“……하아. 그래도 요한,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야 해. 알았지?”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음에도 부족하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당부하고 또 당부하는 앨리슨을 응시하던 요한은 결국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나서야 겨우 공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더욱 한적해 보이는 내부를 둘러본 요한은 체크인을 하기 위해 탑승 수속 카운터로 걸음을 옮겼다.
‘스위스라…….’
청소년 대표 팀 시절에 대회를 치르기 위해 스위스 원정을 가거나 합숙을 간 적은 있어도 순전히 여행을 목적으로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설렘을 느낀 요한은 탑승 시간이 되자마자 비행기에 올라탔다.
[함께 움직이면 눈에 띄기 쉬우니까 난 먼저 가 있도록 하지.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저보다 한발 앞서 스위스로 떠난 레온하르트와 주고받은 전화 내용을 떠올리던 요한은 좌석 앞에 꽂혀 있는 기내용 잡지를 응시하다 눈을 크게 떴다.
“어? 에밀, 이거 악셀 아냐?”
무심코 손을 뻗으려던 요한의 행동이 멈칫한 것은 마침 옆자리의 소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뭐야, 진짜 악셀이잖아!”
“악셀이 잡지 표지 모델이 되다니. 게다가 뮤지컬 잡지도 아닌 기내 잡지의 주인공이라니. 완전 의외다. 그렇지?”
“그렇게 광고는 안 하겠다더니 이거 봐, 승무원처럼 옷을 입었어!”
“무슨 축구 팀 메인 모델을 하고 난 후로 계속 광고 활동을 늘리는 것 같지 않아? 물 들어온 김에 노 젓는다, 이건가?”
“그런 것보다 그렇게 안 하던 광고를 시작하니까 다들 손을 내미는 거겠지. 눈독 들이던 업체가 어디 한둘이겠어?”
“하긴, 악셀이 엄청 핫하니까. 이러다 할리우드까지 진출하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네. 웨스트엔드를 점령했으니 이번엔 영화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요한이 탄 항공사의 메인 모델로 활약하게 되었는지, 승무원 복장을 한 채 작은 비행기 모형을 들고 미소 짓고 있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확실히 자신이 봐 왔던 그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쿡쿡 웃으며 나누는 소녀들의 얘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들게 된 잡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간 너무도 가깝게 지낸 탓에 레온하르트 악셀이 어떤 사람인지 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마주한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생각보다 큰 사람이었고, 유명했으며, 많은 이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는 배우이기도 했다.
‘할리……우드.’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에서 활약하던 배우들이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일은 종종 있어 왔다. 얼마 전 레온하르트가 쏟아지는 영화 캐스팅 제안으로 인해 자신의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이 고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리듯 꺼냈던 것이 떠오르자 요한은 잠시 멈칫했다.
‘할리우드는 너무 먼데.’
요한의 주 활동 무대는 유럽이었기에, 레온하르트가 미국으로 진출하게 되면 만나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만일 요한이 국가 대표에 차출되어 한국으로 가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더더욱.
어두워진 얼굴로 잡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보니 그를 태운 비행기가 어느덧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착륙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요한은 잡지를 원래 자리에 끼워 놓은 후 다른 승객들을 따라 움직였다.
‘……!’
입국장 게이트를 지나며 미리 마중 나오기로 했던 레온하르트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요한은 ‘혹시 필립 씨 되십니까?’ 하고 제게 다가온 운전기사 복장의 남자를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추었다.
* * *
[악셀 씨, 필립 씨와 만났습니다!]
타국에서 요한을 맞이하려던 레온하르트의 계획은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를 알아본 팬들로 인해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급히 운전기사를 구해 루체른 별장까지 요한을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행히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공항에서 요한을 만난 기사에게서 연락이 왔고 이어 요한과도 통화할 수 있었다.
‘슬슬 나가 봐야겠군.’
한적한 별장의 발코니에서 요한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그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몸을 일으켰다.
3층의 제 침실에서 엔트런스 홀이 있는 1층까지 걸음을 옮기는 동안 두근두근 뛰는 가슴의 박동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오늘부터 이틀 동안 요한과 단둘이 이 넓은 별장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삼촌이 몹시 아쉬워하셨어요. 악셀 씨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작별 인사는 하지 못했지만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꼭 시간을 내달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요한의 삼촌인 승진은 요한은 알지 못할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채 저번 주에 런던을 떠났다.
노골적이었던 예의 메모지를 발견한 이후 은연중에 승진을 회피해 온 레온하르트는 승진의 말을 전하는 요한에게 사실을 말하려다 꾹 참았다. 앞으로 며칠만 더 참으면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굳이 요한에게 걱정거리를 안길 이유는 없었다.
승진은 웃는 얼굴로 칼을 들이밀 무서운 남자였다.
몇 번 보지 않았지만, 백승진이라는 남자에게서 으스스한 오한을 느꼈던 레온하르트는 다시 생각해 봐도 소름 끼치는 그날 일을 떠올리다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온 님.”
그때였다.
요한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엔트런스 홀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뒤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루체른 별장을 관리하고 있던 프리츠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드시면서 기다리시죠.”
“……고마워요, 프리츠.”
레온하르트는 제 대답에 프리츠의 흰색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프리츠는 생긋 웃으며 그의 옆에 섰다.
“곧 있으면 눈이 내릴 것 같군요.”
“눈을 볼 수 있을까?”
“그럼요. 아마 밤쯤에는 소복이 쌓일 겁니다.”
“다행인데.”
“예?”
“곧 도착할 사람이 눈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각국의 많은 별장들 중 루체른의 별장을 골랐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으면서, 그의 기억 속 설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으니까.
[……눈이네요.]
이곳에서 눈 내리는 광경을 본다면 요한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 옅게 웃던 레온하르트는 제 모습에 프리츠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프리츠는 요한을 생각하며 미소 짓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하다 결국 입술을 달싹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상념을 깨트리는 프리츠의 발언에 고개를 돌렸다.
프리츠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들뜬 레온 님의 모습 말입니다.”
“……네?”
“5년 전이었던가요. 레온 님께서 갑자기 영국으로 건너가신 뒤 가주님과도 사이가 안 좋았을 때, 윈터 양께서 레온 님의 기분을 풀어 준다고 함께 오셨던 게 기억납니다. 참, 그러고 보니 마침 윈터 양께서…….”
“프리츠.”
“예?”
허허,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 나가던 프리츠를 부른 레온하르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술을 달싹였다.
“곧 도착할 사람 앞에서 엘렌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그 사람, 나한테는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이라, 괜히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리고 엘렌에겐 이미 알려졌으니 어쩔 수 없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내가 여기 온 것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프리츠?”
“하하, 제가 너무 주책을 부린 모양입니다. 레온 님께서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레온 님의 방문은 윈터 양 빼고는 모르십니다. 그런데…….”
“그거 다행이네요. 알려지면…… 어?”
뭔가 더 말을 이으려는 프리츠를 저지한 레온하르트는 마침 들려온 자동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창밖에서 별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차 한 대가 보였다.
두근.
‘요한인가?’
왠지 들뜨는 기분을 느낀 레온하르트는 프리츠에게 미소를 지은 후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끼익, 그의 눈앞에 멈춰 선 차 문이 검게 선팅된 탓에 내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얼른 계단을 내려가 차 문을 열며 입술을 달싹였다.
“비행은 어땠지? 힘들진 않……!”
웃으며 요한을 반기려던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머?”
문을 열어 주자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레온하르트는 그만 굳어 버렸다.
“레온, 네가 날 이렇게 반겨 줄 줄은 몰랐는데?”
연회색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던 흑발의 여인이 싱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90화
차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흑색 머리카락의 주인이 당연히 요한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레온하르트의 시야로 들어온 흑발의 주인공은 여성이었고,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생긋 웃으며 자신을 태워 준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그녀는 ‘윈터 양,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건네는 프리츠에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프리츠 씨.”
“비행은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힘들긴요.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인걸요. 그런데…….”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프리츠를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레온하르트는 프리츠와 대화를 주고받은 뒤 제게로 시선을 옮기는 그녀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옅게 일렁이는 연회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혀 버린 레온하르트를 향해 그녀, 엘레나 윈터가 말했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호호, 낮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 말에 화답하지 않은 레온하르트는 인상을 쓴 채 프리츠를 바라봤다. 허공에서 레온하르트의 눈빛을 읽어 낸 프리츠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응시하다 홱 고개를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마침 윈터 양께서…….]
아까부터 무언가 말하려 했던 프리츠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건가.
레온하르트는 어색한 얼굴을 하고선 제 시선을 피해 버리는 프리츠를 바라보다 다시 엘레나 윈터에게로 눈을 옮겼다.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엘레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빙긋 웃자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더욱 가라앉았다.
“바쁜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머, 난 휴가도 못 오니?”
“……휴가?”
헛웃음이 흘러나올 정도다. 그가 알고 있던 엘레나 윈터는 휴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 정도로 워커홀릭이던 그녀가 놀랍게도 근교가 아닌 스위스까지 휴가를 오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정말 휴가야.”
“…….”
“겨울에 올 만한 곳이 여기뿐이잖아. 나도 프리츠 씨한테 네가 마침 이곳에 올 거라는 이야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물론, 일정까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굳이 날짜를 바꾸지 않은 건 맞지만.”
호호 웃으며 말하는 엘레나의 얘기를 듣던 레온하르트가 프리츠를 힐긋거렸다. 레온하르트와 겨우 눈이 마주친 프리츠가 구레나룻 쪽을 긁적이는 것이 보였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레온하르트는 엘레나의 발언 중 걸리는 단어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우리?”
“아, 아직 얘기 안 했구나. ‘그이’도 올 예정이야.”
“……!”
“네가 도착했다는 이야기 듣고 난 먼저 온 거고, ‘그이’는 나중에. 우리 오랜만에 뭉치는 거겠다. 그렇지 않니?”
그녀가 꺼낸 ‘그이’라는 단어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는 게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생긋 미소 짓는 엘레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차에서 내린 직후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던 엘레나는 레온하르트의 주변을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그게 괜히 거슬려 레온하르트가 미간을 좁히자 들켰다는 듯 씩 웃은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왜 혼자야? 아직 안 왔어?”
“무슨 소리지?”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레온하르트가 되묻자 깔깔거리던 엘레나가 쯧 혀를 차더니 말했다.
“네 애인 말이야. 같이 온 거 아니었어? 아니면 안에 있는 건가?”
엘레나는 한 번 더 레온하르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두며 중얼거렸다. 노골적인 그녀의 말에 레온하르트가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그래서 일정을 변경하지 않은 거군.”
“호호. 알잖아, 레온.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
“겸사겸사 그런 거지. 레온하르트 악셀의 새 애인이라니. 네가 단순한 데이트 상대 말고 정식 애인을 두지 않은 지 꽤 됐잖어? 몇 년이나 됐지? 스캔들 났던 것까지 포함하면 2년? 아니 3년인가?”
레온하르트는 손가락으로 햇수를 헤아리는 엘레나를 노려봤다.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할 말을 끝까지 내뱉은 엘레나가 피식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여간 그런 레온하르트 악셀이 악셀가의 일원만 올 수 있는 가문의 별장에까지 초대할 정도면, 내 생각 이상으로 진지한 사이라는 이야기인데……. 가문의 일원으로서 미리 안면이라도 익혀 둬야지. 안 그래?”
그녀의 입장에선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결코 달갑지 않았다.
엘레나가 스위스 휴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왠지 불안하더라니.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하필 그녀에게 소식을 흘린 프리츠를 다시 한번 원망하며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별장지기를 한 번 흘겨볼 때였다.
“어머.”
레온하르트와 엘레나, 그리고 프리츠까지, 세 남녀가 본관 1층의 엔트런스 홀로 들어가지 않고 별장의 현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시금 대문과 정원을 지나쳐 현관 쪽으로 달려오는 차 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레온하르트가 기다리던 그 사람의 등장임이 틀림없었다. 엘레나가 긴장한 레온하르트를 향해 낮은 탄성을 터트리더니 속삭였다.
“저기 오나 봐, 레온. 네 애인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호호 웃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끼이익.
별장 본관 앞 분수대에서 원을 그리며 뱅그르르 돌던 차가 드디어 세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어떤 여자일까?’라고 중얼거리며 레온하르트를 흘긋거리는 엘레나였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은 채 차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어라?”
곧이어 멈추어진 차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키 큰 성인 남성이 기다란 다리를 쭉 뻗으며 내렸다. 그를 발견한 엘레나 윈터가 깜짝 놀란 음성을 흘렸다. 레온하르트는 큰 눈을 뜬 채 저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시선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