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59)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가로젓자 ‘역시나!’ 하고 로저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는 당장이라도 레온하르트의 대기실로 달려가려는 듯 홱 몸을 돌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그가 몸을 움직이기 전,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하고 로저스를 말렸다.

‘날 찾아온 남성이라.’

순간 요한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요한이었다면 런던 FC의 광팬인 로저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그렇다면 누가?

로저스의 말대로 제 에이전트인 마커스의 연락도 없었기에 자신을 찾아올 이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굳은 표정으로 어느새 도착한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

달칵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 안의 광경이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제 대기실 안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있던 갈색 머리카락의 사람이 저를 보자마자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멈칫했다.

“이제 오십니까?”

그러자 한 번 만났던 전적이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알아듣기 어려운 한국어가 아닌, 유창한 영어를 쏟아 내며 레온하르트에게 미소 지었다.

* * *

“못 보던 물건이군?”

마무리 트레이닝을 마친 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요한은 제 뒤로 스윽 다가와 툭 말을 던지는 디에고 가르시아의 말에 몸을 움찔거렸다. 마침 핸드폰 두 개를 가방 안으로 넣으려던 상황인지라 그의 두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는 걸 들켜 버렸다.

놀란 요한이 슬며시 뒤를 돌아보자 생글생글 웃으며 팔짱을 끼고 있는 바스티안과 눈을 가늘게 뜬 채 요한의 손 위에 놓인 핸드폰 두 개를 응시하는 디에고가 보였다.

“꼬맹이 너, 이제 핸드폰도 두 개를 사용하는 거냐?”

“뭐 어때? 런던의 스타가 됐으니 사생활 전용 핸드폰이 하나 정도는 더 있어야지. 가르시아, 너도 핸드폰 두 개 쓰지 않아?”

“난 원래부터 두 개였어. 태어날 때부터 스타로 태어났거든.”

“……말을 말자.”

디에고의 뻔뻔한 발언에 헛웃음을 삼킨 바스티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요한은 티격태격하는 디에고와 바스티안을 향해 물었다.

“두 분도…… 핸드폰을 여러 개 사용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업무용 하나, 사생활용 하나, 그리고 비상용 하나. 나는 세 대야.”

세 대씩이나?

디에고의 답변에 놀라는 요한을 보며 바스티안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하나로 관리하는 경우는 드물어. 가르시아처럼 업무용이나 사생활용이 보통이지만, 스폰서들의 요구로 마케팅 전용 핸드폰을 사용할 때도 있거든. 아마 여기 있는 다른 동료들도 전부 기본 두 개 이상일걸?”

“아…….”

“이제 갓 스타가 된 꼬맹이는 지금부터라도 관리하면 되는 거지. 그래서.”

……응?

“내놔.”

“예?”

“번호 말이야.”

“……!”

“그 표정은 뭐지? 설마 우리한테도 번호 안 가르쳐 줄 거냐?”

태연하게 사생활 전용 핸드폰 번호를 요구하는 디에고의 말에 요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디에고는 크게 당황하는 요한을 보며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가장 친한 동료인 우리에게 번호를 안 가르쳐 준다고?”

“그게…….”

요한은 계속해서 핸드폰 번호를 요구하는 디에고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번에 마련한 핸드폰은 오로지 레온하르트와의 연락만을 위해 준비한 거라, 앨리슨이나 안나마리아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디에고에게 번호를 알려 준다면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겠는가.

요한의 무표정한 얼굴에 난색이 스치자 하하 웃은 바스티안이 ‘섭섭한데!’를 외치고 있는 디에고를 말렸다.

“이봐, 가르시아. 요한 좀 그만 놀려. 요한, 가르시아 말은 신경 안 써도 돼. 장난일 테니까. 그것보다 그 핸드폰은…… 아무래도 애인 전용인가 봐?”

정곡을 찌르는 바스티안의 질문에 요한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디에고와 바스티안이 하하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해킹 안 당하게 조심해.’라는 말을 남긴 뒤 드레싱 룸을 벗어나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쉽지 않겠네.’

핸드폰 두 개를 관리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삼촌인 승진이 그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엔 어떻게든 레온하르트와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어렵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배워 나가야겠다 여기던 요한은 순간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얼른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어제 안나마리아가 레온하르트에게 예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더욱.

<요한아, 나야, 준오. 12월 말쯤 런던에 들르게 될 것 같은데 혹시 괜찮다면 그때 잠깐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아.

순간적으로 레온하르트일 거라 여기며 입꼬리를 올리던 요한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원래 핸드폰이 울렸다는 것을 깨닫고 쓰게 웃던 요한은 대한민국 국가 대표 주장인 준오에게 ‘알겠습니다.’라고 답한 후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악셀 씨…….’

연락이 없군.

요한은 울리지 않는 레온하르트 전용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난 건 아니겠지…….’

안나마리아를 통해 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하기는 했지만, 때로는 글자보다 말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스스로 자각할 만큼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자 그에게 미안해졌다. 연애가 처음이라는 이유보다는 제 성격상의 이유가 조금 더 큰 것 같아 어떻게든 노력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LTC를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요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이?」

요한이 집 근처 골목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마도 승진이 있을 제집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레온하르트에게 메시지라도 보내야겠다 다짐하던 요한은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와 한국어에 뒤를 돌아봤다.

「우영 삼촌? 삼촌이 어떻게……?」

요한의 외삼촌인 승진에게는 오랜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이번에 함께 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다른 곳도 아닌 영국에서 그를 마주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요한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안경을 낀 샤프한 인상의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녀석이 돌아올 생각을 해야 말이지.」

「예?」

「……별거 아냐. 일단 들어가자. 춥다.」

요한은 호오호오, 손에 입김을 불며 생긋 웃는 우영에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과거 요한의 집에 몇 번 방문한 전적이 있는 우영은 아무렇지 않게 요한보다 앞장서서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

그리고 그런 집 안에서 요한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87화

「요한이 왔냐?」

“왔군, 요한!”

집 안에서 이미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당연히 승진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보인 또 다른 한 사람의 존재에 요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온하르트가 어떻게 승진과 함께 제집에 있는 건지 몰라 크게 당황한 요한만큼이나 의아해하던 우영이 ‘저 사람은……?’ 하고,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요한은 두 남자의 표정을 보고 쿡쿡 웃은 승진과 레온하르트가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봤다.

「뭘 그리 놀라? 레온이 여기 있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니잖아?」

「……네?」

「두 사람, 친한 친구라며.」

「……!」

요한은 미소와 함께 제 옆의 레온하르트를 힐끔거리는 승진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까 그 남자, 누구야?]

[…….]

[백요한.]

[치, 친구예요.]

[뭐?]

[네. 친한…… 친구요. 안나마리아만큼이나 정말 친한 친구입니다, 방금 그 사람…….]

그러고 보니 나흘 전, 레온하르트의 정체에 대해 묻는 승진에게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 기억났다. ‘샤워’라는 단어를 언급한 승진의 눈초리가 워낙 매서운 탓이었지만 어쩐지 그 말을 꺼내고 난 뒤 승진이 묘하게 납득을 하는 바람에 해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하여 지난 나흘 동안 승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건데.

요한은 레온하르트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로 굳이 ‘친한 친구’를 강조하는 승진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악셀 씨가 어떻게 여기에…….」

「아, 내가 초대했어.」

「네?」

「그렇잖아. 안나만큼이나 중요한 친군데, 그날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쫓아 버린 셈이 된 게 왠지 미안해서.」

「악셀 씨가 누군지 아시는 겁니까?」

「아니. 전혀 몰랐어. 그런데 어제 거실에서 공연 티켓을 발견하고 알아차렸지. 요한아, 이렇게 유명한 배우와 알고 지내면서 왜 말을 안 했냐? 진작 알았다면 네 친구가 레온하르트 악셀이라고 삼촌도 자랑하고 다녔을 거 아냐!」

승진은 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요한과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레온하르트를 힐긋 쳐다보더니, 요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결국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레온하르트가 조심스레 묻자 승진이 빙긋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레온이 우리 요한이랑 절친한 ‘친구’라길래 삼촌 된 도리로 식사 한 번 대접하려고 초대했다고 설명하는 중이야.”

레……온?

요한은 레온하르트에게 상황 설명을 하던 승진이 레온하르트의 애칭을 매우 자연스럽게 부르는 걸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셨습니까?’ 하고, 레온하르트가 납득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자 괜히 더 움찔하게 됐다.

「그럼 나는 왜 여기 부른 거지?」

승진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유창한 영어의 향연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던 우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승진을 향해 툭 말을 던졌다. 그러자 흥, 콧방귀를 뀐 승진이 우영을 응시했다.

「신가 넌 인마, 요리하라고 불렀지.」

「……뭐?」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어서 이리 와. 사랑하는 조카님의 손님한테 이상한 걸 먹일 순 없으니까 나 좀 도와줘.」

「…….」

「어서!」

승진은 요한이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요한 뒤편에 서 있던 우영을 잡아끌며 부엌 쪽으로 향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해. 실례가 된 건 아니지?”

그들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제게로 다가와 작게 속삭이는 레온하르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기치 못한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승진의 친구인 우영이 메인 요리사를 맡아 한국에서나 먹을 법한 음식들을 요리했고, 승진은 방긋방긋 웃으며 식탁에 완성된 음식들을 가져다 놨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레온하르트가 요리가 나올 때마다 요한에게 물었고, 요한은 친절하게 예의 요리들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식사가 시작된 후에는 자꾸만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 승진으로 인해 요한이 얼굴을 붉혔다. 어릴 때도 무뚝뚝했다는 둥, 어른들을 많이 당혹시키는 질문을 했다는 둥, 사람을 면전에 두고 제 과거를 읊는 삼촌으로 인해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레온하르트가 귀까지 쫑긋거리며 경청하고 있었기에 승진을 제대로 말리지는 못했다.

“그럼, 요한의 일을 해결해 주신 분이…… 혹시 삼촌이십니까?”

승진이 한국에서 검사로 활동 중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레온하르트가 조심스레 묻자 잡채로 젓가락을 옮기던 승진이 하하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해결했다기보다는, 아는 사람들한테 압력을 가하기는 했지.”

“국가 공무원이 완전히 권력을 남용한 행위라고나 할까.”

“어이,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서 뭔들 못 해? 신가 너 역시 우리 요한이 괴롭히는 놈은 가만두면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었잖아.”

“그래서 반대는 안 했지.”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하게 말하는 승진의 답변에 내내 말없이 앉아 있던 우영이 툭 말을 내뱉자 승진이 발끈하며 그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생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한 뒤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 우영은 ‘으으!’ 하고 투덜거리는 승진을 다루는 데 도가 튼 것 같았다.

‘여전하시군.’

요한은 변하지 않는 두 사람을 보며 옅게 웃다 제 옆의 레온하르트를 힐긋거렸다.

‘악셀…… 씨?’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일로 골머리를 썩는 요한의 일을 해결한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삼촌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왠지 모르게 안색이 어두워진 레온하르트의 모습에 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화제는 얼마 전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치른 요한의 경기 이야기로 넘어갔고, 식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봐, 레온. 내일은 저녁 공연이라고 하지 않았어?”

친구라는 탈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안나마리아나 앨리슨 외의 사람을 가족에게 소개해 준 일은 처음이었다. 계기야 어찌 되었든 그들이 레온하르트를 좋게 봐주기를 바라며 내심 가슴 졸이던 요한은 무사히 식사가 끝난 것에 안도했다.

식사가 끝나고 어느덧 밤이 찾아오자 레온하르트는 돌아갈 준비를 했다.

레온하르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움직이려던 요한은 그런 그들의 뒤를 따라오다 묻는 승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면 자고 가지그래?”

“예?”

“우리 요한이가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준 건 처음이라서 말이지.”

“나, 남자 친구는……!”

“남자인 친구 말이야. 뭘 그리 놀라?”

당황하여 손을 내저으려는 요한에게 피식 웃으며 말한 승진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던 요한은 왠지 고민하는 듯한 레온하르트를 쳐다보다 얼른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삼촌, 여기엔 침대가 두 개뿐입니다.”

요한의 집에는 빈방이 많았지만 침대가 있는 방은 단 두 개뿐이었다. 물론 이불이 넉넉히 있으니 빈방에 자리를 마련하면 되기는 하지만…….

‘악셀 씨를 바닥에 재우기는 좀.’

바닥에서 잔 적이 없을 것 같은 레온하르트를 바닥으로 안내하는 것은 아무래도 손님을 대접하는 방법이 아닌 듯했다. 생각을 정리한 요한이 단호하게 말하자 승진은 ‘어, 알아.’ 하며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놀란 요한이 되물었다.

“삼촌이랑 우영 삼촌도 주무시고 가는 거 아닙니까?”

“백요한, 너 왜 그래? 당연히 자고 가야지. 근데 이 시간에 저 녀석만 밖으로 내쫓을 순 없잖냐.”

“그럼 악셀 씨를 어디서…….”

설마.

요한은 문득 든 생각에 소파 쪽을 힐긋거렸다. 거실의 소파가 침실의 침대처럼 넓기는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자기에는 불편할 터.

요한은 생긋 웃는 승진에게 빠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안 됩니다. 악셀 씨를 거실 소파에 재울 수는 없…….”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응?

“손님을 왜 거실에서 재워?”

“……예?”

승진은 어리둥절해하는 요한에게 외쳤다.

“당연히 네 방에서 재워야지!”

* * *

[백승진입니다. 요한의 외삼촌이죠.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랐으려나?]

대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가 다름 아닌 요한의 삼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처음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레온하르트가 답지 않게 돌처럼 굳어 버린 것은 다음 행동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그런 레온하르트에게 ‘하하, 완전히 굳었네.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죠.’라고 말하는 승진에게선 확실히 요한이 웃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

뒤늦게 승진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긴장을 푼 레온하르트는 그에게 식사 제안까지 받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와 달라고 하는 승진을 보며 고심하기는 했지만 요한의 가족이 건넨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걱정했던 것보다 식사 자리는 편했다. 승진이 또 다른 동양계 남자를 초대했다는 것에 조금 놀라기는 했으나 승진의 친구라는 사실에 다시금 안도했다.

승진은 여러 사람과 함께 식사를 즐기는 게 긴장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레온하르트는 승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두근두근.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었더라면.

‘……젠장.’

심장이 터져 버리기 직전이다.

레온하르트는 멋대로 들썩이는 가슴의 박동에 입술을 꽉 악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현재 레온하르트 악셀이 있는 곳은 불이 꺼진 요한의 방 침실.

그것도 한때 두 남자가 뒹굴었던 매트리스 위에, 요한의 체취가 가득한 이불을 뒤덮은 채 가만히 누워만 있다.

이런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요한의 방에서, 그리고 그의 침대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요한을 탐한 적은 있어도 옷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후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채 그저 잠을 청하기 위해 누운 적은, 단연코…….

쿵쿵쿵쿵.

‘빌어먹을.’

그래서인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목에 진한 갈증이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불이 꺼져 있는 방이라 그런지 그의 마음만큼이나 눈앞이 컴컴한 기분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아마도 제 옆에서 자고 있을 것이 분명한 요한에게 이 급격하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까 싶어 노심초사하다, 결국 입술을 뗐다.

“저…… 요한.”

칠흑으로 물든 침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한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자?”

“그럴 리가요.”

……!

“잠이 안 와?”

“예.”

“왜?”

대답 없는 요한이 제 옆에서 살짝 뒤척이는 것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괜히 머쓱해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기는 처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뭘 했다가는, 소리가 들리겠지.”

“……아마도요.”

“민망한 상황인데.”

“…….”

레온하르트는 하아, 한숨을 내쉬다 천천히 몸을 틀었다.

‘아.’

그러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두근두근두근.

어떻게 된 게 옷을 벗고 그를 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심장이 뛰는 걸까.

[그럼 좋은 꿈 꿔!]

레온하르트에게 자고 갈 것을 제안했던 승진은 얼떨결에 요한의 방으로 들어가게 된 레온하르트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었다.

아무리 노골적이라 해도,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요한을 안을 생각은 없었던 레온하르트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온몸이 불끈거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고민 끝에 레온하르트가 입술을 뗐다.

“요한.”

“네.”

“우리…… 손이라도 잡을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인지하며 레온하르트는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요한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것이 보인다.

실수했나?

그의 온기라도 닿으면 편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여겼거늘.

레온하르트는 ‘아냐. 신경 쓰지 마.’ 하고는 머쓱한 얼굴로 홱 몸을 돌리려 했다.

‘……!’

그러나 이내 다가온 요한의 손길이 레온하르트의 심장을 폭격했다.

88화

닿는다.

따뜻한 온기를 담은 요한의 손바닥이.

어두운 침실 안에서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손길에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것은 당연한 일.

그는 돌아서 누우려는 자신을 저지해 버린 요한의 손길에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물론 말을 꺼낸 것은 자신이었으나 막상 그 손이 눈앞에 있으니 다음 행동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꽤 고민하며 망설였다.

“뭐 하십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주저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요한이 뱉어 내는 것이 틀림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안 잡으십니까?’ 하고, 멈칫한 저를 향해 말하며 요한은 순수하게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잡을 거야.”

불 꺼진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수도 없이 많거늘, 고작 손 한 번 잡는 데 왜 이리 떨리는 건지. 그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제게로 다가온 요한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쿵쿵. 쿵쿵.

바랐던 일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니 이상하게 더욱 심장이 뛴다. 요한과 닿기만 하면 통제 불능으로 변해 가는 신체로 인해 난처해졌다. 이 넓은 지붕 아래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닌지라 아무 짓도 하지 않으려 맞잡은 손이지만, 오히려 그 손을 잡고 나니 흥분이 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젠장.’

꿩 대신 닭이라고, 잡아 버린 손이 스스로를 더욱 안달 나게 만들 줄이야.

맞닿은 손바닥에서 저릿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이를 꽉 악물던 레온하르트는 스윽 다시 얼굴을 옆으로 움직였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요한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요한.”

“네.”

“저기…….”

“왜 그러십니까, 악셀 씨?”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제 부름에 의해 반짝이는 것이 보이자 숨을 고른 레온하르트가 낮게 속삭이려 했다.

“조금만 만…….”

달칵.

쿵!

“갑자기 들어와서 미안해. 두 사람 아직 자는 거 아니지? 저 방에 이불이 부족해서 말이야. 혹시 남는 이불 없……. 어이, 레온. 왜 그러고 있어?”

요한을 향해 은근한 유혹을 가하려던 레온하르트는 불쑥 열리는 문소리에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움직이다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컴컴한 방의 불을 켜며 말하던 승진이 차가운 바닥에 등을 대고 있는 레온하르트를 황당하게 내려다보며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레온은 몸부림이 심한가 보네. 요한아, 괜찮겠어? 만약 레온이랑 자기 힘들면 우리랑 같이 자도 돼.]

바닥에서 자신을 맞이한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승진은 아마도 레온하르트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자리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요한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었다.

다행히 요한이 그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괜찮다고 답변했기에 승진은 레온하르트를 미묘한 눈길로 흘긋거리다 이불 몇 개를 챙겨 요한의 침실을 나섰다.

‘……하아.’

그리고 동이 트기까지의 몇 시간 동안 정말이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밝아진 창밖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누구보다 혈기 왕성한 레온하르트 악셀이 설마하니 손만 잡고 자는 상황에 직면할 줄이야.

승진이 나간 이후 다시 잡게 된 손에 어쩐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괜히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요한이 그 손을 거두어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스르륵 놓지도 못했다.

그 탓에 몇 분이 지나자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흘리며 잠든 요한과 다르게 눈을 크게 뜬 채 누워만 있어야 했던 레온하르트의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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