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일은 지난 11월 초에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다.
“그래서, 대체 휴가 때는 뭘 할 건데?”
레온하르트 악셀의 2주간 부재에 대해 그 누구보다 부러워하던 이안 키스트는 12월이 다가오자 한숨을 푹푹 내쉬며 물었다.
“글쎄. 아마도 푹 쉬겠지.”
“애인도 생겼으니 아주 살판나겠어.”
“애인이 없었어도 살판은 나겠지만…… 있으니 뭐, 더 나긴 하겠군.”
“좋냐?”
“……그걸 말이라고 묻냐?”
“젠장! 입꼬리 올리지 마. 부러워 죽을 것 같으니까!”
부러움에 얼굴을 찌푸리는 이안의 모습이란 아주 흥미롭기 그지없어 레온하르트는 11월 말쯤부터 이안을 볼 때마다 생긋 미소를 짓곤 했다.
‘2주간의 휴가라…….’
하루도 아닌 무려 14일의 휴가는 그간 못 해 본 일들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매일같이 공연을 치러 내느라 하지 못했던 독서도 즐길 수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드러누워 있을 수도 있었다. 뿐인가, 근교로 여행을 떠나거나 아예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스위스가 좋겠어.’
지난 7월까지만 하더라도 레온하르트는 예정된 휴가 때 홀로 영국을 일주할 계획이었지만, 올여름 새 연인이 생기면서 휴가 계획을 바꾸었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12월.
레온하르트 악셀은 자신의 가문인 악셀가가 소유하고 있는 스위스의 별장에서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소중한 연인과 달콤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의 연인 요한 백이 시간을 내준다는 전제하에.
[왜? 안…… 되나?]
[…….]
[요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일이 마무리된 지난 11월 중순쯤, 제 계획을 은근히 전한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던 요한은 잠시의 망설임 끝에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가능? 그럼 된다는 말이야?]
[네. 하지만 2주는 무리예요.]
레온하르트는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예상은 했어. 그럼 얼마나 낼 수 있는 거지?]
[……아마도 하루 정도.]
[뭐? 고작 하루?]
시즌 중인 요한이 많은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루는 너무 짧았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묻자 요한이 어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예. 사실 하루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최악의 경우 몇 시간밖에 못 낼지도 모르고요.]
[……그게 무슨 소리지? 그쪽은 크리스마스 휴가 같은 거 없어?]
공연계는 그때가 대목이었지만 축구는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정도밖에 하지 않는 걸 알고 있는 레온하르트가 툴툴거리자 요한이 쓰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박싱데이(Boxing Day)잖습니까. 그때는 경기가 2, 3일에 한 번꼴로 열립니다.]
[그럼…… 쉽지는 않겠군.]
[아뇨. 반드시 되게 할 겁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요한을 보고 깜짝 놀란 레온하르트가 그를 쳐다보자 요한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악셀 씨가 기대하고 계시잖습니까. 그간 자주 못 봤으니 어떻게든 시간을 내봐야죠.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하루 정도는 온전하게 악셀 씨와 보낼 겁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답변에 그 말을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벌렁거린 것을 요한이 알까. ‘방법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푸른 눈동자의 남자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레온하르트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태연하게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래. 그랬었는데…….
“빌어먹을.”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있을 저녁 공연에 대비하여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레온하르트의 입술 밖으로 진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구겨진 채 펴질 줄을 몰랐는데, 아무래도 꽉 움켜쥔 대본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곧 휴가도 앞둔 녀석이 웬 욕지거리?”
레온하르트와 합을 맞추어 보기 위해 그의 대기실에 들렀던 이안 키스트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이안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흠칫 놀라더니 쓰디쓴 한숨을 흘렸다.
이안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빤히 주시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머리 아픈 일은 아직 해결 안 된 거야? 무슨 일 있어?”
해결…… 해결이라.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간 요한뿐 아니라 레온하르트의 머리까지 지끈거리게 만든 주 원흉,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다가오는 겨울 이적 시장 때 런던 FC를 떠난다는 소식은 희소식에 가까웠다. 그로 인해 안색이 어두웠던 요한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요한이 웃으면 저 역시 기분이 좋아졌으니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행여나 또다시 미행할 이들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요한의 친구인 안나마리아의 도움까지 받고 있는 상황인 데다 지난 몇 주 동안 요한에게 들러붙어 있던 수많은 파파라치들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요즘 들어 요한과 은밀히 만나 자주 사랑을 꽃피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악셀 씨.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날 이후 벌써 나흘이 흘렀다.
또다시, 나흘.
물론 그 나흘 사이 요한에게 경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의 귀여운 연인이 연락할 정신이 없었을 거라고 이해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래도 간단한 문자 정도는 남겨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연락을 ‘못 한’ 걸지도.’
두근.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잠식하자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좁혔다.
‘그 자식, 뭔가 이상했어.’
나흘 전 요한의 집을 점거하고 있던 그 의문의 동양인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연락을 주겠다던 요한 역시 그 동양인과 부딪친 이후 레온하르트에게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체 그 자식은 뭐지…….”
“그 자식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죠?”
“인상착의라……. 글쎄. 일단 갈색 머리였고, 눈은 검정색.”
“키는요?”
“요한보다는 컸지만 나보단 작았지.”
“흐응, 그러면 나이는?”
“……동양인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워서. 하지만 나보단 있어 보였어. 많아 봤자 30대 중반?”
“그러면 요한의 삼촌인가?”
“흠, 삼촌? 글쎄. 요한에게 삼촌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 헉! 어, 언제 왔지?”
무심코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던 레온하르트는 어느새 제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랐다.
85화
레온하르트의 녹안에 비친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지난 몇 주 동안 안면을 익혀 온 사람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요한 백 필립의 ‘WAGs’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상은 레온하르트와 요한의 애정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는 몹시 고마운 존재, 안나마리아 디어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레온하르트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안나마리아를 향해 질문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대답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안나마리아가 아닌 이안이었다.
“언제긴. 내가 들어올 때부터 여기 계셨었는데? 안 그래요, 디어 양?”
“호호. 맞아요, 키스트 씨. 악셀 씨와 달리 키스트 씨는 기억력도 좋으시고 눈썰미도 좋으시네요.”
“하하하. 제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레온이 둔한 거죠. 본인이 데려와 놓고도 잊다니, 이거 손님을 맞이하는 호스트 준비도 안 돼 있는 녀석입니다.”
“그런 것 같아요. 아까 인사도 나눴는데 대기실에 앉자마자 저를 완벽하게 잊으시더라고요.”
“이 녀석이 그렇죠, 뭐.”
저를 놀리기 좋아하는 이안과 몹시 죽이 잘 맞는 안나마리아의 답변에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안나마리아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대기실로 들인 사람이 확실히 자신이었던 기억이 나서,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입술만 꿈틀거렸다.
이안과 안나마리아는 대꾸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상승세를 얻었는지 계속해서 레온하르트를 눈앞에 두고 농담 섞인 험담을 이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해 준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건만, 저보다 더 친해 보이는 남녀의 모습에 레온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붙어 있으면 안 될 텐데.’
안나마리아도 안나마리아지만, 이안에게는 혹이 하나 달려 있지 않은가.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이 모습을 들키지 말라고 말해 줄까 하다 넘긴 레온하르트는 이안과 웃으며 재잘거리는 안나마리아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디어 양은 정말 어쩐 일이십니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
“여기요.”
“이게 뭡니까?”
의아해하는 레온하르트에게 안나마리아가 메고 온 백팩 속에서 하얀 봉투를 하나 꺼내 건넸다.
돈은 아닌 것 같고.
레온하르트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안나마리아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요한의 편지예요.”
“네? 요한이요?”
안나마리아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반가운 단어에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급하게 봉투를 낚아채더니 얼른 봉투 속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렇게나 기다리던 요한의 연락이었다.
설마 안나마리아를 통해 요한의 편지가 도착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레온하르트는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접혀 있는 편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악셀 씨. 오늘도 평안한 하루 보내고 계십니까.>
사랑스러운 요한이 어떤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을까.
미소를 지으며 편지 내용을 읽던 레온하르트는 풉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연애편지 맞는 거지?’
요한에게서 받은 첫 연애편지는 지나칠 정도로 딱딱하다 못해 격조까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편지에서도 성격이 묻어나는군.
고작 글자 하나에서도 요한이 느껴지자 레온하르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참나, 애도 아니고 편지 하나에 어지간히 좋은가 보군.”
내내 침울해 있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안 키스트가 툭 말을 던졌다.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편지의 다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중략)…….
실은 나흘 전, 악셀 씨를 집 앞에서 그렇게 보낸 일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유선으로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이제야 연락을 드립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걱정됩니다.>
나야 당연히 잘 못 지내지.
‘그쪽을 못 봐서 애가 탈 지경이니까.’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봐, 분위기가 너무 확확 바뀌는 거 아니냐?”
편지의 내용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레온하르트를 지켜보던 이안이 또다시 태클을 걸었다. 레온하르트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요한의 정갈한 문자가 이어졌다.
<저번 일 이후 연락이 되지 않을 땐 미리 말씀드리기로 했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생겨서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악셀 씨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염려하고 계실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나흘 전 악셀 씨께서 뵈었던 분에 대해서 말이죠. 그 때문에 안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안나에게는 계속 신세를 지게 되네요.>
‘그래, 그 갈색 머리 동양인.’
그놈은 대체 누구야.
국자를 들고 저를 노려보던 동양인이 생각나자 레온하르트는 쳇,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에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하고 이안이 중얼거렸다.
안나마리아 쪽을 힐긋거리던 레온하르트는 아무래도 그녀에게 선물이라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여러모로 그들을 위해 고생해 주고 있으니, 보답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셀 씨께서 궁금하신 점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궁금해하실 의문에 대해 답을 하자면, 그날 악셀 씨께서 저희 집 현관에서 마주친 분은…… 저의 삼촌입니다.>
‘삼촌……?’
레온하르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젊은 삼촌이 있었군.’
곰곰이 떠올려 보니 자신은 요한에게 부모님 외의 존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연애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상대일 뿐, 가족이 아니니까.
‘닮은…… 구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저 거슬리기만 했던 예의 동양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상하게 익숙하다 했더니 요한과 피가 이어져 있어 그랬던 거군.
물론 요한이 자신을 두고 다른 생각을 했을 거라고는 오해하지 않았지만 연인의 집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을 본 기분이 가히 좋지는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가족이라니, 다행이군.
‘그런데 어쩐 일이지?’
요한의 가족은 모두 한국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문이 해소되자마자 새로운 의문이 머리를 덮쳤다.
레온하르트는 다음 문구를 읽었다.
<삼촌께서는 잠깐 볼일이 있어 런던에 방문하셨다가, 부모님 없이 혼자 지내는 제가 걱정되어 들르신 모양입니다. 기왕 오신 거 한동안 저희 집에 머무르시게 할 계획이었는데, 바빠서 못 오고 계시다 마침 시간이 나서 잠깐 오신 것 같습니다. 먼저 집에 들어가 저를 깜짝 놀라게 하시려다 그렇게 마주치게 된 겁니다.>
‘흠, 그래서 그랬던 거군.’
<……삼촌께서 오시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악셀 씨를 그렇게 놀라게 만들진 않았을 겁니다. 죄송해요, 악셀 씨. 그날 급하게 악셀 씨를 내보낸 후 해명하지 못해서……. 부디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하하. 오해는 무슨. 안 해, 오해 안 해.’
레온하르트는 풀 죽은 모습으로 편지를 보냈을 요한의 얼굴이 떠올라 큭큭 웃었다.
“남이 연애편지 보는 걸 지켜보는 게 뭐 그리 재밌다고! 젠장, 난 가련다!”
아직도 나가지 않았는지 편지만 붙든 채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하고 있던 이안이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이안이 대기실 문을 닫고 나가는 것도 본체만체하고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편지의 내용을 마저 눈에 담았다.
줄어 가는 게 아쉽군.
<몹시 죄송한 얘기지만 삼촌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까지는, 핸드폰으로 연락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아쉽긴 하지만 일리가 있는 결정이다.
요한이 저에 대해 무어라 해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은 그가 괜스레 걱정됐다.
산 넘어 산인가.
레온하르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응?’
아직 남아 있네?
그러다 편지의 내용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선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래서 말인데, 얼마 전에 새로운 핸드폰을 마련했습니다. 악셀 씨 전용으로요. 악셀 씨에게만 알려 드릴 새로운 핸드폰 번호는…….>
새로운 핸드폰이라.
그래, 아무래도 보안상 핸드폰을 두 개 가지고 있는 게 낫……!
“헉! 뭐?”
레온하르트는 믿을 수 없는 문구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편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분명 요한이 새로운 핸드폰을 마련했다는 글귀가 똑똑히 적혀 있었다.
쿵쿵, 레온하르트는 요동치는 눈으로 남은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입니다. 이 번호는 악셀 씨만 알려 드리는 거니 편하게 연락하셔도 됩니다. 삼촌께서 한동안 집에 머무르실 것 같고, 또 낮에는 훈련 때문에 제대로 답 못 하겠지만 그래도 메시지 남겨 주시면 어떻게든 연락드리겠습니다.>
쿵쿵.
레온하르트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안나마리아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봤다.
“신기하네. 무대랑 대본이랑 생각보다 많이 다르……. 왜 그러세요?”
요한의 편지를 건네준 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뮤지컬 의 대본을 열심히 읽고 있던 안나마리아가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는 스윽 고개를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꿀꺽 침을 삼키며 물었다.
“디어 씨.”
“네?”
“혹시, 이 편지 내용 보셨습니까?”
“예?”
안나마리아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를 대체 어떻게 보시는 거예요? 저 몰래 남의 편지 보고 그러는 사람 아니에요!”
레온하르트는 발끈하는 그녀에게 사과하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메일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SNS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렇고요. 만약 메일이나 SNS를 사용하다 해킹이라도 당하면…….]
[그럼 핸드폰을 하나 더 사용하는 건 어떻지?]
[핸드……폰이요?]
[업무용이랑 사생활용을 나눠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
[요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 개의 핸드폰을 관리할 자신이…… 없습니다.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기도 하고요…….]
스캔들로 인해 연락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답답함을 느낀 레온하르트가 요한에게 그런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저 역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요한을 위해서라면 핸드폰 두 대 정도는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 여기며 말을 건넸더니 요한이 크게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었다.
‘그랬는데…… 말이지.’
변화가 느껴진다.
아주 사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하르트 악셀에게는 반갑게 느껴지는 연인의 변화였다.
86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직접 퀸 레베카 시어터까지 찾아온 안나마리아를 배웅하기 위해 극장 후문 쪽 관계자 출입구로 향했다.
요한 덕분에 무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공연을 관람했다며 기뻐하던 안나마리아는 정중하게 레온하르트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리려 했다.
레온하르트는 마침 도착한 택시에 올라타려는 안나마리아에게 말했다.
“저…… 괜찮습니까?”
“네?”
레온하르트의 물음에 안나마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머쓱한 표정을 한 채 주저하다 말을 이어 갔다.
“디어 씨도 몹시 바쁜 사람인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아.”
“게다가 디어 씨는 요한을…….”
“잠깐, 잠깐만요!”
택시 문을 잡고 레온하르트의 말을 듣고 있던 안나마리아가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를 불렀다. 레온하르트가 말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하자 안나마리아는 흥 코웃음을 치며 눈을 휘었다.
“지금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건 전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거라고요.”
“네?”
안나마리아는 빙긋 미소 지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요한이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많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그걸 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죠. 가짜 WAGs가 되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편지 전달책? 어렵지 않죠. 그 일로 인해 요한의 얼굴에 미소가 깃든다면 그의 유일한 친구로서 그를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게다가…….”
게다……가?
“전 뮤지컬을 매우 좋아해요. 무대 위에 선 악셀 씨의 모습도요.”
“……!”
“편지 전해 주러 온 김에 공연도 공짜로 보고, 다른 사람들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악셀 씨와도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됐잖아요? 후일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는데, 제가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죠!”
호호, 웃으며 말한 안나마리아는 ‘그러니 그런 측은한 표정은 짓지 마세요.’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이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에 전혀 상처받지 않은 듯 눈을 빛내고 있는 안나마리아를 말없이 응시하다 피식 웃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택시로 다시 올라타는 안나마리아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를 태운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
밤 공연이 끝난 직후라 하늘은 칠흑으로 물든 상태.
물론 늦게까지 환한 불을 밝히고 있는 웨스트엔드의 뒷골목인지라 다른 거리보다는 밝은 편이었지만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안나마리아를 배웅한 후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하려던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지이잉, 진동이 느껴지자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악셀…….”
-스위스에 갈 예정이라며?
이 시간대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방금 전 안나마리아가 다녀가기도 했으니 혹시 요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아닐까 싶어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번에 그 음성을 알아차린 레온하르트는 움찔했다. 그러고는 실망감이 가득한 음성을 내뱉었다.
“누구에게 들었지?”
-뭐야, 톤이 금방 다운되네? 기다렸던 연락이 아닌 모양이지?
“엘렌.”
얼마 전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연락을 취했던 엘레나 윈터와는 그 일을 끝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자 픽 웃은 엘레나가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프리츠 씨에게 들었어. 네가 이번 크리스마스 즈음 별장을 찾을 거랬다던데.
엘레나가 언급한 프리츠 씨라면, 스위스 루체른의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악셀가의 별장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번 휴가 때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미리 프리츠에게 연락을 넣어 두었고, 그에게서 준비해 두겠다는 답을 받았다.
그런데 하필 그걸 엘레나 윈터에게 들켜 버리다니.
‘찝찝하군.’
본능적인 경계심에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구겼다. 그러자 엘레나가 ‘맞아?’ 하고 한 번 더 물었다. 잠시 대답을 주저하던 레온하르트가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알았어. 끊을게.
“그게 끝인가?”
레온하르트는 제 답변을 듣자마자 통화를 종료하려는 엘레나의 음성에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한 엘레나가 말했다.
-네가 스위스에 간다길래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뭐?”
-확인했으니 됐어. 그럼 잘 지내.
“이봐, 엘렌. 그게 무슨…….”
……끊었잖아?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말만 한 후 툭 전화를 끊어 버린 엘레나의 행동에 황당한 표정으로 조용해진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뭐야, 이 전화는.
예나 지금이나 제멋대로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며 쯧 혀를 찬 레온하르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대기실로 걸어갔다.
“악셀 씨!”
얼마쯤 걸었을까.
내일 있을 마티네 공연을 위해 가급적 빨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레온하르트는 맞은편에서 헉헉거리며 달려오는 한 스태프를 발견하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로저스? 무슨 일 있나?”
“예. 실은 악셀 씨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 웬 남성분이 악셀 씨를 찾아오셨습니다.”
“나를?”
레온하르트가 의아해하자 로저스가 안색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배우들에게만 나눠 준 초대권을 가지고 있길래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 아르바이트생이 악셀 씨의 지인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로 대기실로 안내한 것 같고요. 그런데 악셀 씨에게 언질 받은 게 없어서……. 혹시 젠슨 씨에게 연락받으신 거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