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고 있어! 이봐, 동양인. 난 절대로 여기서 못 나가! 네놈이 나가는 걸 보고 난 뒤에 나가도 나갈 거…….”
“일전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자신의 임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눈앞의 동양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더더욱.
장은 주변의 반응이 어떻든 이 젠장맞을 동양인에게 온갖 험담을 퍼부으려 했다.
이판사판이다.
그가 자신을 끌어내리려 한다면 저 역시 이 동양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장은 후우, 긴 숨을 흘리더니 닫혀 있던 입술을 달싹이는 백의 음성을 들었다.
장은 제 주먹질에도 변화가 없던 동양인의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음을 인지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요한은 순간 당황한 기색을 흘리는 장에게 말했다.
“일전에, 한 번 경고했던 것 같은데.”
핏기를 머금은 요한 백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다음번엔 한 대로 안 끝날 거라고.”
“……뭐?”
백은 황당해하는 장을 말없이 응시하다 돌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접니다, 변호사님. 네. 조금 전 크로비스 씨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네, 지금 당장 이리로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
“너, 너,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 얼른 백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빼앗아 든 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러자 요한 백이 피식 웃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데요.”
백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대체 제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사람을 붙여 감시까지 하고, 제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내려 하신 겁니까?”
“뭐, 뭐?”
“듣자 하니 언론에 제 루머를 흘린 것도 크로비스 씨라고 하던데.”
“……!”
“크로비스 씨, 그렇게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장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제 앞까지 다가온 백의 물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에 안 든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자다가도 벌떡 일어설 정도다. 이 망할 동양인을 팀 내에서, 그리고 제 눈에서 치워 버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싸우는 거, 맞지?”
“크로비스가 백을 때린 거야?”
“이봐, 거기! 무슨 일이지?”
뒤늦게 이성을 찾은 장은 제가 저지른 짓을 자각하고선 입을 꾹 다물었다.
‘제기랄!’
저를 향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건네도 제게 이득이 될 리 없었다. 확실히 그는 흥분하여 요한 백을 가격했고, 그 모습을 목격한 당사자도 한둘이 아니니까. 이제 와 눈앞의 녀석이 자신을 구단에서 퇴출시키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는 말을 건네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더러운 동양인이라는 발언, 저거 꽤 위험한 거 아냐?”
“설마 장, 인종 차별자인 건가?”
“우리 팀에 인종 차별자가 있다고?”
“잘못 들은 거겠지. 장이 그럴 리가.”
평소라면 눈앞의 흑발 동양인에게만 작게 속삭였을 그 말을, 분에 못 이겨 큰 소리로 뱉어 내고 만 장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찮았다.
유럽 축구 연맹은 물론이거니와 국제 축구 연맹에서까지 캠페인을 벌일 정도로, 축구계 내에서는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계의 일원인 자신이, 평소 인종 차별 반대의 캠페인에도 자주 참여했던 자신이 인종 차별자라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그가 업계에서 매장되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빌어먹을!’
이것까지 모두 염두에 두고 일을 벌인 건가?
장은 술렁이는 반응에 이도 저도 못 한 채 말없이 저를 쳐다보는 요한 백을 응시했다. 요한 백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장을 한동안 직시하다 이내 짧게 숨을 고르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흠칫 놀란 장이 미처 그를 피하지 못하자 백은 그의 귓가에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전 정말로 당신을 인종 차별자로 몰아갈 거니까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크로비스 씨가 진짜 인종 차별자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윽!”
요한 백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크로비스 씨. 돈과 권력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 제 뒷조사까지 하신 모양인데, 아직 그것까지는 모르시나 보군요. 이왕 조사를 하실 거면 제대로 하시지 그랬습니까. 전 당한 건 그대로 갚아 주는 사람입니다.”
“……너, 너!”
부들부들 떠는 장에게 요한 백은 싱긋 웃어 보였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시기에, 저 역시 그대로 갚아 드린 것뿐인데 왜 그리 흥분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불쾌하시다면, 구단에 압력을 가할 만큼…….”
그에게 말하기 위해 살며시 고개까지 숙인 요한 백의 음성이 장의 귀를 울렸다.
“저보다 실력이라도 있지 그랬습니까.”
83화
[생각보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다. 크로비스인지 크레파스인지 하는 그 녀석, 지저분한 일을 꽤나 많이 벌였더군. 크게 걱정할 필요 없겠어.]
그래도 같은 업계에서 뛰고 있는 동료 선수라 어떻게든 참아 보려 애썼지만 더 이상은 한계였다. 만약 크로비스가 자신만 건드렸다면 이런 식으로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비스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요한뿐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까지 뒤를 밟았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내심이 강할 뿐이지 잘못을 내버려 두는 성격은 아닌 요한은 제가 당한 일을 그대로 돌려주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두근.
장 크로비스 주니어에게 일격을 가한 뒤 얼어 버린 그를 두고 냉정하게 돌아선 요한은 저와 크로비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동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요한은 그들에게 묵례를 한 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트레이닝 세션에 참석하기 위해 훈련장 피치 위로 나섰다.
툭. 툭.
조금 전 일의 여파 때문인지 훈련이 시작되었음에도 피치로 나오는 선수들이 적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발밑의 공을 차며 숨을 고르던 요한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요한은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이 옆에서 신발 끈을 조이고 있던 디에고 가르시아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인지하고선 그를 내려다봤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신발 끈을 묶는 척하면서 요한을 올려다보던 디에고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내가 꼬맹이 네 녀석을 너무 얕잡아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한은 뜬금없는 디에고의 발언에 미간을 좁혔다. 디에고는 일부러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녀석이니 가급적 건드리지 말고 알아서 모셔야겠다고 다짐했지.”
말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디에고를 향해 헛웃음을 흘린 요한은 피치 위로 나오면서 ‘곧 트레이닝 시작한다!’고 외치는 코치진의 등장에 발등 위로 굴리던 볼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이번 트레이닝 세션에 불참한다는 이야기가 LTC에 퍼졌다.
“그 기사, 봤어?”
“런던 FC의 그 축구 선수 기사 말하는 거지? 장 크로비스?”
이른 새벽,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뜬 요한은 조깅을 하기 위해 집 근처 공원으로 나섰다.
현재 런던에서 가장 핫한 이들 중 한 명인 요한 백이 고작 검은 모자 하나와 트레이닝복만 입고 공원으로 운동을 나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건지, 그를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비교적 여유롭게 조깅을 마친 요한은 목요일에 있을 챔피언스리그 홈경기를 앞두고 휴식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커피 한 잔을 사기 위해 자주 들렀던 카페로 향한 그는 신문 가판대 근처를 지나다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행동을 멈추었다.
“의외긴 해. 갑자기 러시아 임대 예정이라니. 크로비스가 그 정도로 폼이 떨어졌던가?”
“의외는 무슨. 폼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지. 런던에 있을 만한 선수가 아니라니까?”
“그래? 그래도 뜻밖이야. 러시아면 다시 유럽 복귀가 쉽지 않을 텐데, 크로비스 자존심에 그 임대를 순순히 받아들였네?”
“어쩌겠어? 웰비가 안 쓰겠다고 공언했다는데. 감독이 안 쓰겠다면 선수가 떠나야지. 게다가 크로비스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는 그 녀석보다 잘하는 선수들이 많다고.”
요한의 발걸음이 멈춘 까닭은, 런던 FC의 팬인 듯한 두 남자에게서 낯익은 이름들이 계속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크로비스 임대설이 나오는 걸 보면, 곧 겨울 이적 시장이 다가오나 봐.’라는 마지막 말까지 날린 후 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긋 본 요한은 신문 가판대 쪽으로 향했다.
요한은 런던 FC가 패배할 때를 제외하고는 오랜만에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한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얼굴이 담긴 신문을 가판대에서 꺼내 들었다.
“하나 주십시오.”
트레이닝 상의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 둔 후 한 번도 꺼내 들지 않았기에 크로비스와 관련된 언론 기사를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요한은 주인에게서 받아 든 신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프랑스의 장 크로비스, 모스크바로 임대 예정!’이라고 크게 적힌 글귀가 시야로 들어왔다.
<한때 프랑스의 기둥이 될 것이라 많은 언론의 찬양을 받았던 장 크로비스 주니어(27, 런던 FC)가 러시아로 임대를 갈 예정이라 화제다. 프랑스 청소년 국가 대표 팀의 청소년 월드컵 우승을 이끌어 낸 주역으로 리그 앙의 가스통을 거쳐 런던 FC로 이적한 그는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치러 내며 런던의 주전으로 자리 잡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포지션인 마이크 비츠의 영입으로 인해 후보로 밀려나 비주전들을 주로 기용하는 리그컵 경기 등에서만 선발로 출전하며 런던에서의 생활을 이어 가던 그는, 시즌 아웃된 마이크 비츠의 빈자리를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이제 막 성인이 된 런던의 새로운 별에게까지 주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한창 뛰어야 할 시기임에도 축구 선수로서의 생활에 위기를 느낀 크로비스 본인이 스스로 임대 이적을 요청했다는 것이 런던 FC 구단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이에 크로비스의 에이전트인 에릭 스피츠 씨는 그것이 모두 사실임을 본지에 확인시켜 주며…….>
한창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요한은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지퍼를 열었다.
“네.”
-소식 들었어?
액정 위로 뜬 반가운 단어에 빙긋 웃은 요한이 대답하자마자 미소를 머금은 음성이 들려왔다. 요한은 들고 있던 신문을 덮어 옆구리에 끼고선 입술을 달싹였다.
“네. 방금 확인했습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결해도 되는 거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이 괘씸해.
요한의 전화 상대는 크로비스를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계속해서 툴툴거렸다. 요한은 쓰게 웃었다.
“크로비스 씨가 제게 계속해서 차별적 발언을 한 건 확실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그렇지? 그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 길을 못 걷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뭐?
요한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듣자 하니 본인의 자존심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태여서 저에 대한 질투심이 차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만해 보이는 저를 계속 갈군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제가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고 하니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모습이…… 꽤 처연하더군요.”
[용서……해 줄 수 없을까? 나 이, 인종 차별자는 결단코 아니야! 네 녀석이, 네가 싫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인종 차별자로 찍힐 수는 없어. 알잖아? 어차피 러시아로 가야 하는데 그곳에서까지 인종 차별자로 찍혀 버리면…… 나, 난 어쩌면 선수 생활은 물론이고 다른 생활까지 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부탁할게. 그 이야기만은…… 제발, 인종 차별 문제만은, 안 하면 안 될까?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백, 네가 원하는 대로 임대고 뭐고 가서 네 눈앞에서 사라져 줄 테니까 부디 그것만은…… 응? 미안해. 정말 미안해!]
며칠 전, 요한에게 한 방 먹이려다 오히려 된통 당해 궁지에 몰린 장 크로비스 주니어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며 그를 찾아왔었다. 요한이 콜 업 된 이후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던 크로비스의 일화가 팀 내에 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요한에게 사람을 붙였다는 뒤숭숭한 이야기까지 퍼지자 크로비스는 졸지에 외톨이가 됐다. 다른 것도 아닌 인종 차별을 하는 동료와는 가까이할 수 없다는 의견이 공통적이었다.
날이 갈수록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고립되어 가던 크로비스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러시아 임대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언론과 팀 분위기를 수습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런던 FC의 마리오 클락 단장은 그 조건을 수용하는 대신 요한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라는 말을 건넸고, 벼랑 끝에 서 있던 장 크로비스는 결국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며 부탁했던 것이다.
-요한, 너는 마음이 너무 넓어서 문제야. 하아, 정말 누구를 닮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속 좁은 매형은 아닌데…….
요한은 투덜거리는 것이 분명한 통화 상대의 발언에 옅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삼촌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어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서라면 영국까지 날아와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 게다가 내가 한 건 얼마 없어. 일개 공무원이라, 그저 누님 회사에 말을 흘린 것뿐이니까.
누님이라는 단어에 요한이 안면을 굳혔다.
“어머니는…….”
-아, 걱정 마. 누님은 이번 일 모르시니까. 매형도 모르셔. 네가 알리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내 선에서 해결했어.
요한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그런데 삼촌.”
-응?
“지금 런던에 계시는 겁니까?”
-어어? 어, 뭐…….
“그런데 왜 집에는 안 오시는 거죠? 영국 도착하셨다는 이야기 듣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요한은 ‘그게……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막내 삼촌, 백승진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막내 삼촌이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친히 연차까지 내고 런던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일주일 전에 접했었기에 더더욱.
‘내가 보, 볼일이 있어서. 조만간 너희 집으로 갈게!’라는 승진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알겠다고 대답한 요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움직였다.
‘정말 바쁘신가 보군.’
런던에 오면 항상 저부터 찾았던 막내 삼촌이 일주일씩이나 제집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요한은 피식 웃으며 쭉쭉 발을 뻗었다.
‘일단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에 연락을 해 볼……까.’
골머리를 썩이던 일이 무사히 해결됐다.
여전히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락조차 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기다릴게.]
비록 그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미 한 번 말없이 저를 기다려 주었던 이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한번 떠올리니 순식간에 머릿속을 장악해 버린 ‘누군가’로 인해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서려 요한은 앞으로 뻗어 가던 걸음을 조금 더 빨리 움직이기 위해 힘을 줬다. 곧, 제집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걸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요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굳게 담긴 대문의 손잡이로 손을 뻗으려 했다.
“요한.”
“……!”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요한의 고개를 돌아가게 만들었다.
“악…….”
“쉿.
귀 익은 음성에 무심코 옆으로 시선을 돌린 요한의 푸른 눈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큰 키의 남자가 들어왔다. 요한이 그의 이름을 부르려 하자, 선글라스 너머로 저를 바라보는 것이 분명한 레온하르트가 속삭였다.
“기사 보고 왔어.”
아.
“들어가도…… 되지?”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말하는 레온하르트 역시 아직까지 남아 있을 파파라치들을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꽤 지켜봤는데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요한은 잠시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네.”
“응?”
“얼른 들어오시죠.”
“……!”
“빨리.”
그러고는 ‘들키면 곤란한데.’ 하고 어떻게든 모자를 눌러쓰려 하는 레온하르트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마침 열린 대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 올 거 알고 있었어?”
대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현관으로 저를 데리고 직행하는 요한에게 레온하르트가 물었다.
“아뇨.”
“그런데 왜 이리 행동이…….”
“자연스럽냐고요?”
요한은 여전히 레온하르트의 손목을 잡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현관 앞에 선 후 한 손으로는 현관문을 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레온하르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글쎄요. 마침 악셀 씨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나 보죠.”
“……뭐?”
“오늘 휴일이시죠?”
“어? 뭐, 그렇지.”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저녁까지 먹고 가십시오.”
“정말?”
“제가 언제 악셀 씨에게 빈말한 적 있습니까. 샤워부터 하실 거죠?”
“…….”
“왜요?”
“같이 하면 안 되나?”
“……하.”
“왜? 싫어?”
“……아뇨. 싫지 않아서 어이가 없습니다.”
“하하. 그거 다행인데? 머리 말이야, 내가 감겨 줘도 돼?”
“참나.”
낯간지러운 말도 이제 태연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른 요한이 제 대답에 반색하는 레온하르트를 내버려 둔 채 현관문을 돌리던 시점이었다.
달칵, 문을 열고 레온하르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요한은 현관 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요한아.」
국자를 든 채 생긋 웃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요한과 그의 뒤에 서 있는 레온하르트를 차례로 응시하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분은 누구시기에, 네가 같이 샤워까지 하겠다는 거냐?」
84화
#Second Half : 후반 21′ ~ 후반 30′
「왜 말이 없지, 백요한? 내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나?」
선명하게 박혀 드는 한국어가 요한의 귀를 울렸다.
냉철함을 유지하던 요한의 얼굴이 국자를 든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로 인해 사색이 됐다.
어……떻게.
쿵쿵, 심장박동이 빨라져 요한은 순간적으로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백요한.」
요한의 답이 늦어질수록 국자를 든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한.”
그때였다.
요한은 뒤늦게 제 뒤에 있던 레온하르트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악ㅅ……!”
“당신은, 누굽니까.”
레온하르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요한의 집에서 나온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다 요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그러고는 그들을 응시하고 서 있는 남자에게서 요한을 지키려는 듯 요한에게 손을 뻗어 앞으로 나오는 것을 저지했다.
요한은 제 시야를 막아선 레온하르트가 마치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가족도 없이 혼자 살고 있다고?]
비록 근래 들어 약간의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레온하르트 악셀은 현재 요한의 연인이었고, 충분히 낯선 남자의 접근을 막을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요한에게서 요한의 가족이 전부 한국에 가 버리는 바람에 홀로 영국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갑작스레 나타난 남자를 의심할 수밖에.
물론 레온하르트는 예의 낯선 남자가 요한과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데다 미묘하게 눈매가 요한과 흡사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흐응, 꽤 흥미로운 짓을 하는군.」
“요한, 이자가 뭐라고 말하는 거지?”
「웬 ‘날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요한!”
유창한 영어와 한국어가 귓속으로 쏙쏙 박혀 들 때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던 요한은 결국 ‘젠장!’ 하고 입술을 잘근 깨문 후 누군가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
요한이 붙잡은 상대는 국자를 쥐고선 콧소리를 흘리는 흑안의 남자가 아니라, 남자의 정체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는 레온하르트 쪽이었다.
“요, 요한?”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돌연 제 손목을 덥석 움켜쥔 요한이 자신을 현관 안이 아닌 대문 쪽으로 이끌고 나오자 레온하르트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요한을 불렀다.
요한은 의아함으로 잔뜩 물든 레온하르트를 대문 밖으로 밀어 버린 후 현관 쪽을 흘긋거리더니 그를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악셀 씨.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뭐?”
“죄송합니다. 연락드릴게요.”
“이봐, 그게 무슨 소리야? 잠깐만 기다……!”
그리고 요한은 레온하르트가 붙잡을 새도 없이 대문을 쾅 닫은 후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두근두근.
한동안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구기고 있던 요한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여전히 국자를 든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요한의 경직된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번져 갔다.
“언제부터 계셨던 겁니까?”
* * *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큰 극장인 퀸 레베카 시어터에서 단독으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는 독일에서 시작됐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퀸 레베카 시어터의 오너이자 유명 뮤지컬 제작자인 스티브 위버가 우연히 독일에 갔다 뮤지컬 를 웨스트엔드화 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영국의 관객들도 예의 뮤지컬을 안방에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보통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새로운 공연을 올리기보단 이미 있는 공연들을 재연하는 경향이 높았던 웨스트엔드의 관계자들은 뮤지컬 의 실패를 전망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뮤지컬 는 초연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관객들이 기대하고 만족하는 공연 1위에 꼽히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현재 뮤지컬 는 전용 극장에서 진행될 만큼 상시 공연 체제를 이룩하고 있었는데, 특히나 공연을 이끌어 나가는 두 주연 ‘얀 훈트’와 ‘클라우스 아들러’는 원 캐스트가 아닌 멀티 캐스팅으로 진행하여 배우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곤 했다.
대대로 최고의 스타들이 맡거나, 혹은 맡아서 최고의 스타가 되는 뮤지컬 의 두 주인공 ‘얀 훈트’와 ‘클라우스 아들러’에서 ‘얀 훈트’ 역할을 맡고 있는 레온하르트 악셀은 오는 12월의 마지막 2주 동안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레온, 너 진짜 2주 동안 쉬는 거 맞지? 스티브가 나 볼 때마다 너 그때 쉬는 거 맞냐고 물어보던데.”
“이봐, 마키. 몇 번을 말해. 12월 마지막 두 주는, 무조건 쉴 거야.”
“그렇지?”
“그래. ……스티브도 왜 자꾸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군. 분명 그때는 일 안 할 거라고 말했는데.”
보통 연말연시가 바쁜 공연계였지만 레온하르트가 얻게 될 2주간의 휴가는 이미 올해 초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스티브 위버의 눈에 띄어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던 레온하르트는 지난 몇 년 동안 공연이 없는 날을 제외하고는 쉰 적이 없었기에 다가오는 휴가가 더욱 의미 있었다.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그 누구보다 좋아하는 레온하르트가 쉰다고 하자 믿기지 않는지 그의 에이전트인 마커스 젠슨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질문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좁히며 그렇다고 답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