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는 한때 프랑스 청소년 대표 팀에서 날고 긴다는 이들도 다 제쳐 가며 청소년 월드컵의 우승을 일궈 낸 주역 중의 주역이었다. 당당하게 런던 FC의 고주급자로 입단하여 다년간의 계약을 체결해 냈다.
물론 지금은 폼이 많이 떨어져서 고작 스물밖에 안 되는 애송이에게 밀린 신세였지만…….
“러시아라니!”
이 내가, 겨우 러시아 따위로 팔려 가야 한단 말인가!
“빌어먹을!”
그래도 러시아 내에서 최상위 클럽이라 불리는 곳에서 오퍼가 왔다고는 하나,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별 중 하나였던 자신이 축구 종주국인 영국에 와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하고 러시아로 팔려 가는 것은 틀림없이 조롱거리가 될 것이었다.
게다가 러시아로 가서 다시 유럽으로 진출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가 아닌가.
이 모든 일은 그 젠장맞을 애송이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나비효과나 다름없다. 자신이 주전에서 밀린 것도, 그리고 러시아로의 임대 제안이 들어온 것도, 전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장은 서늘한 눈으로 벽을 치지 않은 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입술을 움직였다.
“안녕하십니까. ‘The Moon’이죠? 제보할 것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내가 죽는다면, 그 자식도 같이 죽여 버리는 길을 택하겠어.
* * *
11월 A매치 기간.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마르셀로 감독 덕분에 A매치 기간임에도 영국에서 훈련장과 집을 오가는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요한은, 오전 트레이닝 세션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 요한이 드레싱 룸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할 때쯤, 갑자기 누군가가 그를 막아 세웠다.
놀랍게도 요한을 부른 사람은 런던 FC의 라이트 윙 포지션 후보 선수인 에런 레이스였다.
‘잠깐 얘기 좀 해, 백.’ 하고 그를 불러 세운 레이스는 장 크로비스 주니어와 함께 움직이며 요한을 노려보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대표 팀 코치진과의 트러블로 인해 이번 11월에도 국가 대표에 소집되지 못한 디에고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요한의 팔을 덥석 붙잡았지만, 요한은 빙긋 웃으며 디에고를 안심시켰다.
“……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길 원하는 에런 레이스의 요구에 모두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린 요한은, 모두 LTC를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에런 레이스의 일방적인 발언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요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런은 제 말이 끝나자마자 어째서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냐는 표정을 짓는 요한에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승적 차원이야.”
“……!”
“난 더 이상 팀 내 분위기를 망치는 데 일조하고 싶지 않아. 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긴 하지만, 그 녀석이 근래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
“어쨌든 이번 일은 터지기 전에 네 선에서 어떻게든 막아 봐.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미리 경고했다, 꼬맹이.”
요한은 말을 마친 뒤 쓴웃음을 흘리며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에런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얼굴을 굳혔다.
‘눈치는 챘었지만…….’
이 모든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드러나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조셉 테임즈라고, 혹시 들어 본 적 있니? 안나가 너희 동네에서 그런 이름을 지닌 탐정을 마주쳤대. 아무래도 너한테 붙은 사람인 것 같아서 끝까지 그 사람을 따라가 겨우 이름을 알아냈다던데……. 그나저나 요한, 네 생각에도 안나가 너무 겁이 없지 않아?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려고.]
며칠 전 앨리슨을 통해 들었던 그 낯선 탐정의 이름 역시 에런 레이스와의 대화에서 흘러나왔다. 의심이 확신이 되고, 확신이 사실이 되자 눈빛은 점점 냉랭해진다.
‘더 이상 내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군.’
요한은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었다. 견딜 수 있고, 감내할 수 있을 만한 일이라 생각이 되었을 때는 더욱.
그러나 현재 그가 처한 상황으로 미뤄 짐작해 보건대, 이번 일은 축구에만 전념하고 싶은 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언론 플레이를 즐기겠다면, 저 역시 그에 맞서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거리를 안겨 드리고 싶진 않았는데.’
요한은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곳과 이곳의 시차는 9시간. 어둑한 밤이 내려앉았을 시간이지만, 제 전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받는 분이니 아마도 전화를 받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누구야!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남자 아니냐!
예상했던 대로 전화 통화를 하자마자 대답이 들려왔다. 요한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첫 번째가 아니죠? 아, 설마…….”
-그래, ‘그 자식’이 조금 멀리서 지켜보고 있어. 마음 같아서는 첫 번째라 하고 싶은데…… 흠흠, 가까이 온다. 쉿.
-요한이야?
-어. 잠깐, 야! 인마! 나 아직 우리 요한이랑 제대로 대화도……!
-요한아, 안녕. 잘 지내?
요한은 자신이 전화를 건 상대의 전화를 빼앗아 들고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귀 익은 음성에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우영 삼촌.”
81화
『고올~ 골입니다! 바스티안 랄프의 벼락같은 중거리 슛이 프랑스의 골망을 뒤흔듭니다! 이로써 허무한 패배를 앞두고 있던 독일이 기사회생을 하게 됩니다!』
“흥, 정말 질리지도 않는 녀석이군. 어떻게 국대만 가면 저렇게 펄펄 나는 거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TV를 응시하고 있던 레온하르트는 요란한 함성 소리와 함께 이어진 캐스터의 외침을 가만히 듣고 있다 툭 말을 던지는 이안 키스트를 힐긋거렸다.
[뭐?]
[할 것도 없을 텐데 경기나 보자고. 어차피 너, 오늘 백 선수 만나러 못 가잖아. 아직까지, 만나는 건 금지 맞지?]
[…….]
[우리 집 TV가 고장 나서 그래. 실례 좀 하자. 하하.]
TV 핑계를 대며 다짜고짜 레온하르트의 집으로 쳐들어온 이안은 하필 공연이 없는 날에 열린 독일과 프랑스의 경기 중계를 함께 보자는 제안을 건넸다.
TV가 고장 나면 고치면 되고, 그것이 안 되면 새로 사거나, 아니면 인터넷을 통해 보면 될 것을.
굳이 제집으로 들어와 소파까지 차지한 이안은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독일 국가 대표의 다른 선수들과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바스티안 랄프를 힐긋거리며 툴툴거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이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이안.”
“……?”
“그렇게 투덜댈 거면 그냥 안 봐도 돼.”
“……어어?”
“축구를 보고 싶으면 잉글랜드 경기를 봐. 같은 시간에 열린다며? 그럼 될 걸 왜 굳이 독일 경기를 보는 거지?”
“……!”
“난 우리나라 축구 따위는 관심이…….”
“이 애국심도 없는 자식아!”
요한이 뛰는 대한민국 대표 팀의 경기도 아니고, 런던 FC의 경기도 아니다. 기껏해야 아는 선수라고는 요한의 팀 동료이자 아직도 거슬리는 바스티안 랄프밖에 없는 독일 국가 대표 팀의 경기.
영국인인 이안 키스트가 이 경기를 보는 이유가 설마 자신 때문인가, 하고 생각하던 레온하르트는 아까부터 랄프가 볼을 잡으면 중얼대는 친우를 향해 한숨과 함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이안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뭐?”
“명색이 축구 선수랑 사귀는 녀석이 축구에 그리 관심이 없으면 쓰나! 연인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흥미를 붙여 보라고!”
아.
“난 인마, 너를 위해서 독일 팀의 경기를 틀어 준 거야. 잉글랜드의 경기가 무척이나 보고 싶지만 그런 내 욕망 따위는 저버리고, 네가 조금이라도 축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나를 희생한 거지. 그래서 백 선수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배려한 거라고.”
“……그런 거였군.”
“레온, 나한테 다른 의도 따위는 없어.”
“또 골이군.”
“뭐? 누가? 헉, 랄프 저 자식이 또! 빌어먹을, 그럼 영락없이 그걸 해야 하잖아!”
“영락없이 뭘 해?”
“뭐긴! 귀국하면……!”
“이안?”
“화…… 화장실 좀. 갑자기 볼일이 급하군.”
무심코 말을 흘린 이안에게 생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안이 화들짝 놀라며 홱 몸을 돌렸다. 레온하르트는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도망치는 이안 키스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 이거지.’
설마 바스티안 랄프와 이안이 미묘한 관계가 될 줄은 몰랐는데.
요한의 팀 동료인 바스티안 랄프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레온하르트는 그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요한도 그렇고 랄프도 그렇고 서로를 단순한 팀 동료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기에 다행이라 여겼거늘, 근래 들어 이안과의 사이가 심상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요한은 모르는 척하라고 살짝 귀띔해 주었지만 이안이 저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레온하르트는 불과 5분 만에 역전 골까지 터트려 자국 팬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바스티안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깐.’
두 놈이 부딪치면…….
‘누가 깔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레온하르트 악셀이 눈을 크게 떴다.
“윽. 기분 나쁜 상상을 할 뻔했어.”
레온하르트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장면에 온몸을 파르르 떨다 애써 그것을 떨쳐 냈다.
‘응?’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던 그는 마침 테이블 위에서 울려 대고 있는 핸드폰의 액정 위로 뜬 문구를 가만히 쳐다보다 가슴이 철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받네? 두어 번 정도는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신경을 긁는 말투임은 부정할 수 없다. 레온하르트는 호호 웃으며 말을 건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달싹였다.
“알아봤어?”
-인사부터 하지. 우리 오랜만이잖아.
인사는.
“엘렌, 너와 농담 따먹고 싶은 생각 없으니 결론부터 말해. 어떻게 됐지? 도와줄 수 있는 건가?”
엘렌, 아니 엘레나 윈터라는 이름을 가진 통화 상대는 결론적으로 그와 가까운 사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애정과 친분이 흘러넘치는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과거에 잠깐, 아주 잠깐 그랬던 전적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일일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쌀쌀맞긴.’ 하고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상대의 중얼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악셀가(家)의 수많은 변호인단 중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이자, 또 개중 능력을 인정받은 엘레나의 연락을 기다린 지 무려 일주일 만에 받은 전화였다. 그간 묵묵히 인내하고 있는 요한을 가만히 지켜봤었기에 레온하르트는 엘레나의 답변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은 비단 제 일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반가운데. 4년 만에 네가 처음 보낸 메시지잖아?
“엘렌.”
-호호, 알겠어. 사담은 여기까지……. 레온, 네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을게.
“뭘.”
-백이라고 했던가? 너 그 귀여운 동양인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
레온하르트가 순간 멈칫하자 엘레나는 그 반응에 흐응, 묘한 콧소리를 흘렸다. 레온하르트가 핸드폰을 꽉 움켜쥐며 인상을 썼다.
“친한 친구야.”
-단순히 친한 친구일 뿐이니? 정말?
“……그래.”
-신기하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레온하르트 악셀이 오지랖이 넓지는 않았는데.
“이봐.”
-호호, 알았어. 결과부터 말하자면, 못 도와줘.
……뭐?
미묘하게 그를 자극하는 것이 분명한 엘레나의 말투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레온하르트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하고 성난 목소리를 흘리려다 생각을 바꾼 그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 엉덩이를 소파 위로 붙였다.
“악셀가(家)의 힘을 사용하라고도 했을 텐데?”
-레온, 우리 귀여운 막내 도련님. 아버님이나 어머님께선 네 말이면 꿈뻑 죽으니 당연히 널 위해 그렇게 움직이라고 변호인단에 지시를 내리겠지. 너도 그걸 알고 나한테 부탁 아닌 부탁을 했을 테고.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발언은 충분히 정곡을 찔렀으니까.
일부러 가문의 변호사 중 하나인 엘레나에게 연락해 집안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방법을 알아보라 명령한 것은 사실이니 부정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레온하르트에게 깔깔 웃음을 흘린 엘레나가 대답하지 않는 그를 향해 말했다.
-물론 네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가문의 힘’을 사용하려 들었다는 게 나로서는 조금 충격이었어. 레온, 너는 어딜 가서도 악셀가의 자제라는 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딴따라의 길로 빠져든 거고.
“말이 심하군.”
-그랬나?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 일에 악셀가의 힘을 사용한다면 가능해. 고작 축구 선수 하나를 매장시키는 데 그리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하지만…….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말끝을 흐리는 엘레나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레온하르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깔깔 웃더니 말했다.
-우리가 한발 늦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내뱉는 엘레나였다. 레온하르트는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엘레나는 ‘아니, 한발이 아니라 조금 많이 늦었어.’라고 중얼거린 뒤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우리보다 빠르게 움직인 쪽이 있더라고. 오래전부터 준비를 한 모양이던데?
레온하르트는 이해할 수 없는 엘레나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악셀가의 힘을 쓸 필요도 없었어. 레온, 너 혹시 P&K라고 들어 봤니?
“P&K?”
레온하르트는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자 엘레나가 피식 웃더니 설명했다.
-뮤지컬밖에 모르는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업계에선 무척 영향력 있는 글로벌 로펌 기업이야.
“로펌……이라고?”
-응. 요한 백? 그 축구 선수와 관련된 일에 무려 그 기업의 중역이 움직였다더라. 이건 그쪽에서도 비밀스럽게 움직여서 나 같은 거물이 아니고서야 알아낼 수 없는 희귀 정보지. 그러니 고맙게 여겨. 네 일은 도와주지 못했지만, 이런 고급 정보를 알려 주는 거니까.
호호, 웃는 엘레나의 말을 듣고 있던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말들을 곱씹어 보다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네 말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요한이 도움을 받았다는 건가? 그래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일이 해결된 거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렇지.
“…….”
-거물 P&K 그룹이 움직였으니 아마 크로비스는 이번 주 내로 런던에서 짐을 싸야 할걸? 크로비스가 벌여 놓은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그걸 막으려면 어쩔 수 없이,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엘레나의 음성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이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던가.’
그런 레온하르트를 볼 수 없는 엘레나가 이어 말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건, P&K는 개인을 위해 움직이는 기업이 아니라는 건데. 흐음, 대체 요한 백이라는 그 선수가 P&K와 무슨 관계이길래 그쪽에서 손을 뻗고 나서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 그게 궁금해서라도 조만간 영국에…… 레온, 너 내 말 듣고 있어?
대답 없는 레온하르트에게 웃음 섞인 말을 건네던 엘레나가 그의 대답을 종용했지만, 이미 상념에 잠긴 레온하르트는 굳은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82화
-장, 나야.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잠깐 집으로 찾아가도 될까?
프랑스와 독일의 국가 대항전을 경기장 내가 아닌 자택의 TV를 통해 지켜보는 것은 장 크로비스 주니어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일게 했다. 물론 그가 국가 대표에 차출되지 않은 건 꽤 오래전부터이지만 근래 들어 다시는 호출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까지 들려오고 있었기에 더더욱.
하여 자국이 2:1의 역전패를 당한 것을 보면서도 분노가 아닌 희열을 느끼고 있던 그는 A매치 데이 다음 날 아침, 런던 FC의 훈련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온 에이전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아침? 갑자기? 나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출근? 아, 마침 잘됐어. 출근은…… 하지 마.
“뭐?”
-잠깐만 기다릴 수 있어? 거의 다 도착했어. 집 근처야.
다급해 보이는 에릭의 말에 인상을 쓰던 장은 현관 근처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거렸다. 어차피 A팀에 차출되지 않은 선수들이 모여 갖는 훈련이었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장은 들고 있던 차 키를 선반 위에 올려놓은 후 몸을 돌려 거실의 소파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세상의 그늘을 전부 짊어진 듯한 에릭 스피츠가 그의 집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쾅!
“이 개자식 어디 있어!”
두근두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장은 활짝 열려 있는 드레싱 룸 바닥으로 들고 있던 가방을 내던지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크로비스? 갑자기 왜 그래?”
두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 댈 기세로 소리치는 장의 모습에 곧 있을 트레이닝 세션을 준비하던 수비수 출신의 로버트 파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어디 있냐고, 그 개자식!”
“컥!”
“백, 그 빌어먹을 자식 말이야! 어디 있어!”
비록 선발 명단에는 자주 이름을 올리지 못하지만, 오랫동안 팀에 머물며 다른 선수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파고는 씩씩거리는 장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파고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의 멱살까지 잡아끈 장의 행동에 드레싱 룸에 있던 다른 선수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은 그들의 반응을 못 본 체하며 소리쳤다.
“백이라면 방금 피치로 나갔어.”
그때, 장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앉아 신발 끈을 묶고 있던 에런 레이스가 스윽 고개를 들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그 말을 들은 장은 파고를 잡은 손을 아래로 내리치며 홱 몸을 돌렸다.
“커컥! 콜록콜록!”
“롭, 괜찮아?”
“저 자식 왜 저래?”
갑작스러운 장의 행동에 황당함을 느낀 몇몇 선수들이 투덜거렸지만 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에런이 일러 준 곳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
에런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몇 걸음 걷지 않아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꼬맹이, 너 어제 랄프 그 자식 경기 봤어?”
“예? 아, 네.”
“복귀하면 또 입꼬리가 찢어져 있겠군. 그 꼴을 어찌 보나.”
“하하. 대놓고 자랑하시는 것도 아닌데요, 뭘.”
“이봐, 꼬맹이. 넌 몰라서 그래. 차라리 대놓고 자랑하는 게 낫다고. 그 자식은 항상 국대만 가면 골을 넣고 온다니까. 그러고 은근히 먼저 칭찬해 주기를 원…….”
“백!”
A팀에 차출되지 않은 디에고 가르시아와 함께 걸어가던 요한 백이 제 외침에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장은 으드득, 이를 꽉 악물더니 의아해하는 백과 가르시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뭐야, 크로비스. 눈빛이 왜 그…….”
섬뜩한 눈으로 백의 앞에 선 장을 본 가르시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먹을 꽉 움켜쥔 장이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퍽!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백의 얼굴을 정확히 후려친 장의 일격에 그를 내려다보던 백이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야! 너 미쳤어?”
그런 장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 가르시아가 입가를 스윽 닦고 있는 백을 향해 ‘괜찮아, 꼬맹이?’ 하고 말을 건네는 게 보였다.
‘웃기는군.’
장은 다른 팀원들에게는 그토록 까칠하게 굴면서 유독 이 빌어먹을 동양계 애송이를 아끼는 디에고 가르시아를 냉정하게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뭐 하는…… 짓입니까.”
그때였다.
디에고의 부축에 살짝 고개를 까딱여 감사 인사를 전한 백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저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온 힘을 담았던 주먹이었기에 백의 입가엔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불시의 일격을 받고 평소보다 더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백의 모습을 보자니 장은 다시금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뭐 하는 짓? 하?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네놈이지?”
눈에 잔뜩 힘을 준 장이 소리쳤다. 그러자 장이 주시하던 백이 아닌 그 옆의 가르시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어이, 크로비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갑자기 사람을 때려 놓고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할망정…….”
“닥쳐, 가르시아!”
“……!”
“제삼자는 빠져 있으라고!”
장은 버럭 외친 뒤 ‘괜찮습니다.’ 하고 가르시아에게 말하는 요한 백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백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수를 쓴 거지?”
“무슨 말입니까.”
“발뺌하지 마! 네놈이 그랬다는 거 다 알고 왔어.”
“…….”
“이 빌어먹을 동양인 자식이 누구한테 엿을 먹이려고! 네가 그렇게 나온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크로비스 씨.”
“그 역겨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이 더러운 동양인 자식아!”
흥분한 장의 목소리가 피치로 향하려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해 있던 장은 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과 백, 그리고 가르시아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장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흑발의 동양인에게 실소를 터트렸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여기서 나가? 1군에 들어온 지 이제 몇 달밖에 안 된 네 녀석이 대체 뭔데! 이 크로비스가 너 따위 하찮은 수작질에 백기 투항이라도 할 줄 알았냐? 그럴 줄 알았냐고!”
[장, 흥분하지 말고…… 들어 봐.]
이 모든 일은 오늘 오전, 저를 찾아온 에릭 스피츠의 말로부터 시작됐다.
[보드진이…… 아무래도 너를 내보낼 생각인가 봐. 가급적…… 빨리.]
[뭐?]
[만약 이번 겨울에 안 나가면, 지금 당장이라도 네게 징계를 줘서 구단 자체 퇴출을 시킬…… 생각인 것 같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장, 너 혹시…… 사람 썼니?]
[……!]
[구단에서 네가 사람을 붙여 백을 감시한 걸 알아차린 모양이야. 백도 그걸 알고 너와 함께 뛸 수 없다고, 네가 팀에 남는다면 자신이 팀을 나갈 거라는…… 말을 한 모양이더라고. 하아, 장. 대체 왜 그랬어? 내가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하필 사람을 붙인 거야?]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저를 탓하는 것이 분명한 말들을 쏟아 내던 에릭은 이번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에릭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에 장은 일언반구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최대한 보드진을 설득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우리 그냥 눈 딱 감고, 임대 갈까?’라고 말하며 오늘 하루는 출근하지 말라는 충고를 건넸지만 장은 그가 저택을 나서자마자 LTC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이번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요한 백을 찾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