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59)

이 모든 게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일.

예전 같았다면 멘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지만 요한은 쓰러지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더 이를 갈았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훈련을 이어 갔다.

보다 못한 안나마리아가 요한의 집에 마련된 훈련실에서 그를 끌고 나올 정도로 요한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열심히 다가올 복귀 날만을 기다렸다.

‘흔들리지 않아야 해.’

이제 막 시작된 그의 선수 생활에 언제나 무지개만 뜰 수는 없는 법이다. 간혹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멘탈적으로 흔들리는 일도 생기기 마련이겠지. 꽃길만 걷고 싶기는 하지만,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 맞이할 흙길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일찌감치 이런 일을 겪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날, 자신이 동요했던 까닭은 아직 미성숙한 제 멘탈 때문이었기에 지난 일주일 동안 요한은 뼈저리게 그 멘탈을 단련시켰다.

안나마리아와 거짓된 연극을 하면서 따끔거렸던 가슴을 제자리로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자신이 경기를 뛰는 것밖에 없었다.

요한은 결의를 다진 눈으로 웰비 감독을 응시했다. 그 누구보다 빛나는 각오를 선보이는 요한의 모습에 웰비 감독의 입에서 흐응, 묘한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왔다, 왔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찰칵찰칵!

경기 한 시간 전, 런던 FC의 홈구장인 미라클 스타디움에 푸른색 팀 버스가 도착했다. 드르륵 열리는 버스 문으로 화려한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많은 기자들이 미라클 스타디움을 찾은 까닭은, 동 시간대에 발표된 런던 FC의 선발 명단에 놀랍게도 ‘요한 백’의 이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드레싱 룸으로 향하는 통로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선수들을 일일이 찍으면서도 요한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백 선수!”

“여기 좀 봐주시죠, 백!”

디에고 가르시아의 뒤를 이어 버스에서 내린 요한은 자신을 향한 외침을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게이 의혹 말입니다! 그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 일부러 여자를 이용한 거 아닙니까!”

구설수에 이어 부상까지 당했던 요한이라 이번 경기까진 휴식을 취할 것이라 생각했던 기자들은 굳은 얼굴로 움직이고 있는 그를 향해 궁금했던 질문들을 마구 쏟아 냈다. 그런 이들 중 가장 민감한 말을 건넨 사람은 놀랍게도 평소 요한과 자주 인터뷰를 하던 검은 머리카락의 한국인 기자였다. 보통 때라면 한국어로 뱉어 냈을 질문을 영어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일부러 그런 말을 던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봐요, 무슨 말을 그렇게!”

요한보다 앞서 나가던 디에고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그 발언에 미간을 찌푸리며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험상궂은 표정까지 지으며 예의 한국인 기자에게 다가가려 했다.

“……?”

“괜찮습니다.”

“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아무 말도 없던 요한이 처음으로 건넨 말에 디에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한은 놀라는 디에고에게 옅은 미소를 그려 준 후 흡,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한국인 기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유창하기 그지없는 영국식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간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아 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오간 것에 대해 똑똑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팀 분위기가 흐려진 것도요. 콜 업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군 데뷔를 하고, 또 리그 데뷔까지 한 덕에 지난 몇 달 동안 솔직히 좀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행동과 사생활이 팀에 이토록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둘러싼 루머로 인해 팀의 좋았던 분위기를 깨트린 점, 사과드립니다.”

요한은 머리를 살짝 꾸벅인 후 다시 들어 찰칵거리는 카메라들을 응시했다.

그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일주일간 휴식을 취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 행동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욱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것을요. 오늘, 그간의 의혹을 종식시키려 합니다. 앞으로는 팀에 폐를 끼치지 않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흔들리는 팀의 분위기를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훌륭한 경기력으로 보내 주신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단 한 번도 이번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요한이 무려 기자들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발표한지라, 기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이크만 가져다 댔다.

애매모호한 발언이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걸어 나가겠다 주장하고 있었다. 그에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라는 한국인 기자의 외침이 있었지만 이미 입장 발표를 끝낸 요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통로를 빠져나갔다.

“요한.”

단호하기 그지없는 발언을 한 뒤 드레싱 룸으로 향하는 요한의 뒤를 따라 말없이 걷고 있던 디에고와 바스티안 중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넨 사람은 바스티안 쪽이었다.

“성원에 보답할 수 있는 경기력이라고 했나?”

요한은 팀 내에서 자신에게 호의적인 몇 사람 중 하나인 바스티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바스티안은 씩 입꼬리를 올리며 요한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요한이 눈을 크게 뜨며 바스티안을 올려다보자 바스티안이 웃으며 말했다.

“너, 기자들한테 지키지 못할 말은 하면 안 되는 거 몰라?”

“…….”

“방금 했던 그 말, 자신 있는 거지?”

“자신 없으면 했겠어?”

요한이 ‘네, 자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들과 발을 맞춰 걷던 디에고가 흥, 콧방귀를 뀌며 요한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저를 바라보는 요한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꼬맹이 녀석이 아주 단단히 칼을 갈고 온 모양이군.”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디에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좋아.’ 하고 작게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헛소문이나 퍼트리는 기자 놈들한테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라도 이 몸이 좀 나서 줘야겠군.”

“호오, 가르시아. 오늘은 희생하겠다 이건가?”

“꼬맹이가 당하는 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럼 나도 협조해야겠네.”

“당연하지. 랄프, 오늘 네 녀석 골은 물 건너간 줄 알아. 난 무조건 꼬맹이한테만 패스할 거야.”

“하하. 그 헌신, 가끔 나한테도 좀 해 주면 안 되나?”

“미친 소리. 네놈의 명성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요한은 디에고와 바스티안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다 그들과 함께 드레싱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밤.

지금까지 치러진 경기에서 7실점만을 허용했던 부동의 리그 1위, 레드 가든을 상대로 런던 FC의 주전 스트라이커 요한 백 필립은 전반 3분, 전반 13분, 전반 18분, 전반 44분, 후반 56분, 그리고 후반 70분에 각각 골을 넣으며 유례없는 더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77화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제가 지금…… 대체 무엇을 본 거죠?』

영국에서 제일가는 스포츠 채널인 LandSports의 아나운서, 존 헨리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자신이 중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감탄사를 흘렸다. 그때는 막, 요한 백 필립이라 불리는 런던 FC의 스트라이커가 자신의 여섯 번째 골을 성공시켰을 무렵이었다. 존 헨리가 경의에 찬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아요. 보셨습니까,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 한국에서 온 런던의 별이 한 경기에서 자신의 최다 골을 경신합니다! 여섯 골! 더블 해트트릭! 근래 리그 경기 내에서, 아니 5대 리그 경기 내에서 한 선수가 여섯 골을 터트린 적이 있던가요? 루카스 씨?』

『정말…… 대단하군요.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솔직히 백의 선발 출전을 두고 걱정이 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온갖 구설수에 언론의 집중 표적이 되고 있지 않았습니까? 파파라치에 시달린 탓에 컨디션이 말이 아니란 이야기도 들렸던 와중이라, 웰비 감독의 기용에 의문을 표하기도 했었는데…… 하하, 순전히 제 기우였던 것 같군요! 원더풀입니다, 원더풀!』

『보통 ‘더블 해트트릭’이라는 것은 한 경기에서 두 명의 선수가 해트트릭을 기록하거나, 혹은 한 명의 선수가 골과 어시스트를 각각 세 개씩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여섯 골을 넣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바다 건너온 런던의 별이 해내고 맙니다! 요한, 백, 필립! 후반 70분, 황금 같은 여섯 번째 골을 기록하면서 MS를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립니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평소보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흥분된 말을 늘어놓은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시즌이 시작된 후 세 달째가 되는 11월까지, 총 7실점만 허용하던 리그 1위 레드 가든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무려 여섯 골을 넣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레드 가든의 수비는 견고했고, 골키퍼는 리그에서 클린시트(무실점 경기)를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는 최고의 선수였다.

리그 1위와 2위의 맞대결이었고, 또 2위 팀의 홈구장에서 열리는 경기였지만 뒤숭숭한 분위기의 런던 FC와 달리 연승을 달리고 있던 레드 가든이 우세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거기다 팀의 분위기를 망친 주 원흉인 요한이 피치 위로 올라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향한 야유가 경기장 곳곳에서 쏟아졌다. 어째서 그를 기용하는 것이냐부터 시작하여, 요한은 한 골도 넣지 못할 것이다, 등등의 비난은 킥오프 휘슬이 불릴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된 지 겨우 3분 만에 터진 요한의 골은 경기가 열리고 있는 미라클 스타디움을 잠재웠고, 경기 시작 70분이 흘러 버린 지금은 요한을 향한 환호와 박수로 가득 찼다.

완벽하고도 화려한 요한의 퍼포먼스에 원정 팀인 레드 가든의 팬들까지 경악하며 헛웃음을 흘리고는 박수를 칠 정도였다.

삐이익!

“와아아!”

우승을 다투고 있는 두 팀의 ‘승점 6점’을 건 것이나 다름없는 맞대결. 전문가들 10명을 모아 놓고 질문을 하면 열이면 열 전부 레드 가든의 승리를 점쳤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번 경기의 승리는 런던 FC의 차지가 되었다.

<다들 봤냐? 이게 백이다! 난 백을 지지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게이가 되겠어!>

런던 FC의 최대 팬포럼인 ‘GGBS(GoGoBlues)’에 수천 개의 글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바로 위의 글이었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네 말대로 나도 백이 게이라면 기꺼이 게이가 되겠어. 이 녀석을 어떻게 안 사랑해?

┗┗뭐야, 백이 게이라는 게 확실해진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저 하나의 비유인 거지. 그만큼 우리가 백을 사랑한다는 말이야.

┗네 의견에 동의해. 앞으로 우리 백을 건드리는 놈들은 내가 가만 안 둬!

┗가든 놈들을 상대로 여섯 골이라니. 클락 뭐 하냐? 얼른 재계약해! 백을 잡으라고!

┗┗라리가에서 백을 노릴지도 모르겠어. 이제 겨우 스물에, 아직 전성기도 안 온 선수잖아. 주급 올려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 내일부터 백네 집 근처에 있는 파파라치들 다 때려잡으러 간다. 백이 축구에만 신경 쓰도록 만들라고!

┗┗같이 가자. 파티원 2가 되겠어.

┗백! 이제부터 내가 너의 든든한 Bag이 되어 줄게!

┗┗뭐야, 이 썰렁한 개그는.

┗그런데 백, 오늘 더블 해트트릭 이후로 표정 괜찮았나? 그간 마음고생이 심해 보여서 걱정이야. 쓰레기 같은 언론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잖아!

┗┗경기 초반에는 그랬는데, 경기 끝날 때는 웃고 있더라. 휘슬 불리고 팬들한테 인사하러 왔을 때는 활짝 미소 짓고 있었어.

┗┗┗다행이네. 앞으로 백은 우리의 보물이야. 누가 이 보물을 괴롭힌다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가 나서서 가만두지 말자고!>

여론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 * *

“후반 80분쯤, 폴센 녀석 표정 봤어? 백이 마지막 스퍼트 올리면서 드리블 치는 거 보고 기겁하더라니까?”

“큭큭. 그 자식들, 얼마 전에 레스토랑에서 만났을 때 나보고 뭐랬는지 알아? ‘3:0 승리 정도는 쉽지.’라더군! 하하, 그런데 6:0으로 당했어, 오히려!”

“록허트 감독이 명장 중의 명장인데, 아까 우리 감독님이랑 인사도 안 하고 떠나더라.”

“꼬맹이, 진짜 한다면 하는 녀석이잖아!”

“어? 리드,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백은 어디 있어?”

우승이 걸린 경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팀의 사기를 끌어올리기에는 충분한 경기였다. 오늘 승리의 주역인 런던 FC의 선수들은 선발에서 후보, 그리고 명단 제외 선수들까지 전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샴페인만 없다뿐이지, 신이 나 댄스를 추는 선수도 있었으며, SNS에 좋은 분위기의 드레싱 룸 모습을 찍어 올리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간 바닥을 기고 있던 분위기를 바꿀 만큼 훌륭한 경기력에 스스로도 기뻤는지 미소 짓던 한 선수가 비어 있는 요한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요한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주전 골키퍼 조나단 리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먼저 빠져나오는 게 좋겠어. 오늘 같은 날 더욱 노릴 거거든. 감독이랑 코치들 허락은 받았으니 따라와.]

경기 직후 열린 간단한 인터뷰를 마친 뒤 드레싱 룸으로 향하려던 요한은 그곳으로 들어서기 직전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자신을 잡아끄는 앨리슨으로 인해 행동을 멈추었다. 요한의 물품들을 모두 챙겨 들고 속삭이는 앨리슨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기자들을 염려하는 듯했다.

기자들 앞에서 선언을 하고, 그 선언을 지키기 위해 경기 내내 최선을 다했던 요한을 보고 기함했던 사람 중 하나인 앨리슨은 요한이 쓸데없는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경기가 끝날 무렵부터 미리 관계자들과 상의를 한 그녀는 요한을 데리고 몰래 MS를 빠져나왔다.

“요한.”

경이로운 기록을 남긴 요한을 보고도 운전하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앨리슨 디어는 요한의 집이 가까워졌을 때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경기장에서 바로 귀가를 하는 중이라 혹 땀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하던 요한은 앨리슨의 부름에 그녀를 바라봤다.

앨리슨은 핸들을 꽉 움켜쥐고 정면으로 시선을 꽂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하하. 아무래도 넌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아이인 게 틀림없어.”

“앨리?”

“참나. 해트트릭도 아니고 더블 해트트릭이라니. 너, 그거 런던 FC가 레드 가든을 상대로 처음 기록한 더블 해트트릭이라는 거 알기는 해?”

혀를 내두르는 앨리슨의 발언에 요한은 쓰게 웃었다. 그 이야기는 몇 분 전 열렸던 인터뷰에서 이미 기자를 통해 들었다. ‘내 고객이지만 정말 최고라니까?’라고 중얼거리는 앨리슨의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지금이야.’

요한은 후우, 숨을 고른 뒤 얼마 남지 않은 귀갓길에서 앨리슨에게 말했다.

“앨리.”

“응? 뭐 할 말 있어?”

“……예.”

“요한?”

“핸드폰,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앨리슨이 요한의 말에 끼익, 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마침 신호에 걸렸기 때문이다. 앨리슨 디어는 꽤 놀란 듯 요한에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전에 쓰던 핸드폰을 말하는 거니?”

요한은 대답했다.

“네.”

“요한.”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후우, 너희 가족을 말하는 거라면 지금 있는 핸드폰으로도…….”

“가족이 아니에요.”

“……!”

단호하게 대답하는 요한을 보고 앨리슨이 눈을 크게 떴다. 요한은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진작 연락하고 싶었는데, 철저하게 저만 생각하느라 그러지 못했어요.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한 상태여서……. 앨리에게 준 핸드폰에 그 사람 번호가 있어요.”

“요한.”

“저, 그 사람에게 연락하지 못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앨리.”

“…….”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담담하지만 요한이 뱉어 낸 말이기에 임팩트가 있었다.

앨리슨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빵빵―

이미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앨리슨의 차로 인해 도로 정체가 시작됐다.

“아.”

그들의 뒤편에서 계속 클랙슨 소리가 울려 퍼지자 낮게 탄성을 터트린 앨리슨이 요한을 향했던 시선을 겨우 정면으로 옮겼다.

얼이 빠진 건지, 아니면 제정신이 든 건지.

요한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앨리슨의 얼굴을 살폈다.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운전을 이어 가던 앨리슨은 요한의 집 차고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고는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핸드백 속에서 요한이 전에 사용하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앨리.”

“성별은 묻지 않을게.”

앨리슨은 요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신, 내가 준비됐을 때 오늘 일에 대해 제대로 말해 줘야 해. 그래야 나도 대응책을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어어,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요한. 너는 내 최우수 고객이잖아!”

씁쓸한 표정을 짓는 요한의 얼굴만으로도 그 마음을 충분히 알겠다는 듯 앨리슨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녀는 ‘얼른 들어가서 쉬어!’라고 말한 뒤 요한을 조수석에서 쫓아냈다. 요한은 차고와 이어진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앨리슨이 빠져나갈 때까지 한동안 가만히 차고에 서 있었다.

‘…….’

그녀가 완벽하게 나간 이후 요한의 손에는 두 개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앨리슨이 그를 위해 마련해 준 새 핸드폰, 그리고 또 하나는 레온하르트의 연락처가 담긴 이전의 핸드폰.

두근.

요한이 둘 중 오른손에 쥐고 있던 이전의 핸드폰 전원을 켜려던 순간이었다. 지이잉, 왼손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을 했다. 안나마리아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 경기 봤어. 대단하더라, 요한. 축하의 의미로 내가 네 침실에 선물을 준비해 뒀어.>

……뭐?

요한은 꽤 당혹스러운 그 문자에 잠시 놀랐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뭐라 답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안나마리아는 저를 도와주는 정말이지 고마운 친구였지만, 자신으로 인해 과한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일상이 저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워 오늘 경기를 더욱 열심히 뛴 이유도 있었다. 모든 시선이 자신의 사생활이 아닌 경기력에 쏠린다면, 더는 그녀와 위장 연애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침실의 선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안나마리아의 호의를 거절하는 편이 맞다고 생각하며 요한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

어두운 얼굴로 침실의 문을 여는 순간, 요한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축하해.”

안나마리아가 준비했다는 선물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더블 해트트릭이라는 거, 꽤 어려운 일 맞지?”

금발의 레온하르트 악셀이 요한의 침실 안, 침대 위에 앉은 채 꽃다발을 내밀고 있었다.

78화

“악셀 씨, 당신 요한과 단순한 친구가 아닌 거죠?”

레온하르트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던 안나마리아의 시선이 매섭게 바뀌었다. 호의적이었던 눈빛이 적의로 물들자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안나마리아는 부정도, 그렇다고 긍정도 하지 않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신이었어!”

“디어 씨.”

“당신이, 요한이 말했던 바로 그…….”

“말?”

흥분하려는 안나마리아를 보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레온하르트는 ‘디어 씨!’ 하고, 안나마리아에게 다가갔다.

“윽!”

“무슨 말을, 했습니까?”

“……예?”

“요한이…… 나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

“디어 씨! 부탁입니다. 요한이 나에 대해 했던 말,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모두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요한이 자신을 언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안나마리아의 양팔을 붙잡고선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녀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처음에는 그런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던 안나마리아는 크게 일렁이는 그의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안나마리아의 대답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레온하르트는 문득 제 행동을 자각했다.

“아…… 시, 실례했습니다.”

뒤늦게 자신이 안나마리아의 양팔을 있는 힘껏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에게서 손을 뗀 후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꾸벅이며 한숨을 푹 내쉬는 그의 모습이란 실로 처량하기 그지없어,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웨스트엔드의 왕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젠장.’

두근두근.

그녀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레온하르트는 안나마리아가 곧 제게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에게 화가 나 있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아래로 내리깐 눈을 쉽게 들지 못했다.

“악셀 씨는…….”

그 순간이었다.

성난 음성이 터져 나올 것이라 여겼으나 놀랍게도 안나마리아의 음성은 분노보다 놀람을 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안나마리아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요한을…… 좋아하는 거예요?”

레온하르트가 붙잡았던 부위가 쓰렸는지 팔을 쓰다듬던 안나마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너무도 정직한 물음에 순간적으로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안나마리아는 ‘우리 요한한테 진심이냐고요.’ 하고 뒷걸음질 치는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며 큰 눈을 부라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눈빛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한이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게 정확히 말한 적은 없지만 신문에 난 기사들을 딱히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안나마리아와의 연극에 대해 요한 역시 암묵적인 수용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레온하르트 역시 그녀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요한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휘청거리던 안나마리아는 곧 재빨리 이성을 되찾았다. 이어진 안나마리아의 지시에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의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하나만 명심하세요. 저, 당신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요한의 ‘가짜 WAGs’, 안나마리아 디어가 옅은 녹색 눈동자로 레온하르트를 직시하며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요한은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전혀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레온하르트가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지켜봐 온 안나마리아의 눈빛은 단순한 우정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제게 접근했을 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만약 안나마리아가 자신과 요한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그녀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과 요한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길길이 날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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